질투하는 시간의 분노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 [출애굽기 34:1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4:24]
14.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지 말라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킬까 두려워하노라 [신명기 6]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내 맹렬한 질투로 남아 있는 이방인과 에돔 온 땅을 쳐서 말하였노니 [에스겔 36:5]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나훔서 1:2]
부분적으로 초월적인 것에 관한 근대적 사유를 낳은 수많은 시조 가운데 야훼의 질투가 있다. 질투가 유치한 심리적 한계에서 벗어난 것 — 한 개인의 존재에 이른 것 — 이야말로 서양 일신론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종교적 사유다. 나누지 않는 것, 공존하지 않는 것, 동등성을 허용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은 지독하게 신성하다. 기독교의 신조차도 야훼에 비하면 짐수레꾼, 방문 판매원에 불과하다. 신성을 독차지하고자 집단 학살도 마다하지 않는 야훼의 광분이란 과연 두려운 것이다. 도덕적인 민감성이 부족하다고 야훼를 질타할 수는 없는 법이다.
1.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신명기 7]
1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찌니 17. 곧 헷 족속과 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대로 하라 [신명기 20]
질투와 역사적으로 국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던 발작적인 폭력은 불가분하다. 그 이후 발작적 폭력은 신성의 우주적 편협 속으로 승화되었다. 그런데 둘 중에 무엇이 도구인지가 당최 왜 중요하던가? 신이 민족을 시켜 절멸케 하는 것이든 민족이 이방 신을 몰아내서 땅을 정화하는 것이든 그게 중요한 일이던가? 질투의 기원에는 적대 관계가 없다. 도리어 선택받은 민족과 이름할 수 없는 분의 처절한 고독 사이에 놓인 완벽한 동맹 관계가 있다.
유대민족이 이름할 수 없는 신에 관하여 추호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하물며 기독교인들은 유대민족만큼도 이해하지 못했다.) 바로 질투 어린 분노의 지고성이다. 이 뜨거운 분노가 도대체 어떻게 자체를 넘어서는 미련한 존속이라는 목표에 무릎꿇었다는 말인가? 신께서 — 조차도 — 억압을 당한단 말인가? 존재의 요구에 화 잘 내는 비위를 무릎 꿇린 신, 자기를 억누른 신, 그런 신은 태양의 영광에도 한참 못 미칠 것이다. (해봐야 고작 보통 수준의 별에 굴욕당할 것이다.) 피조물 하나하나가 존재를 버리면서 신의 헤픈 낭비를 능가할 것이며, 자신이 그저 노엽기만 한 신의 마음은 조금씩 커져갈 것이다.
자기 분노의 불가능한 지고성을 — 비개체적 상실의 어둔 수직갱이 벌어지듯 열리는 시간을 — 흘겨보며 자신의 노예 처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증오스러워 울부짖는 신께서, 어찌 어서 십자가에 매달려 자살하려고 허둥지둥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크하르트가 말하기를 신께서는 스스로를 만끽하고 계신다지만, 정작 신께서는 이 세상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스스로를 혐오하는 마음을 만끽하고 계신 것 같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신의 자기혐오는 곧 시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긋지긋하다. 시간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던가? 눈물 흘릴 때마다 신의 자기혐오가 느껴진다. 눈물을 흘릴 때 나는 아무것도 따져 헤아리지 않는다) [V 120].
시간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무어가 있던가? 무슨 이유가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뼈만 남은 앙상한 팔, 손가락, 수수께끼 같은 표정, 이런 것은 이해가 된다(아프다). 그러나 시간은 결혼 생활만큼이나 공허하고, 어둠 속에 홀로 있는 신만큼이나 공허한 것이다.
존재의 진창에 푹 빠져 배후에 놓인 목적을 증오하는 마음에 취해 있을 때 나는 신이며 시간은 노예들의 끝없는 허세를 보고 웃는다. ‘구름 밑에 있는 우리를 이끄는 신은 미쳤다. 나는 그 신을 알고 있다. 내가 그 신이다’ [III 39]. (바타유는 이렇게 암송하라고 한다. ‘때부서졌으나 현영되어 세상과 하나된 피로 뒤덮인 나 자신을, 한시에 끊임없이 죽이고 죽임당하는 시간의 먹이이자 시간의 턱인 나 자신을 상상하노라’ [I 5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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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와 진멸은 불가분하다. 신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신성의 소유에 한정할 수도 없고 신성의 속성에 한정할 수도 없다. 그렇게 되면 먼저 본질이 있고 그다음에 질투가 온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시간이라는 더없이 황량한 황무지를 신께서 원망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 신의 증오는 풍화의 흐름에 빌붙어야 하니까. 어쩌면 신께서는 자기가 시간인 줄 착각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그 착각은 피조물이 넙적 죽어버리고 신조차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절망에 잠겨 신을 반역할 때 가서나 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당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라는 말은 사방을 불사르는 특권이 쏟아지는 것과 같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태초에 증오가 계시니라 — 아니면 우리가 신께서 피조물에 실망하시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다는 것인가? 신께서도 놀라신다는 말인가? 신께서도 당황하신다는 말인가? 피조물은 신의 손을 떠나버렸다. 이것이 바로 못된 아이들이 두려워하는 심리학적인 신이요, 우리가 다섯 살배기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기분 상한 신이다. 진노하지 않으시며 ‘정당한 분노’로 가득한 신. 치안 판사. 이런 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질투는 의분(義憤)이 아니다. 분노가 풀려나고 신께서 아무것도 섬기지 않게 되는 순간, 주권자의 변덕에 존재가 고개 숙이고 녹아버린 진노의 끝자락이 환희하는 순간, 그때 ‘권력이란 신께 고유한 힘이 아니라 시간에 고유한 힘이다‘ [I 471].
바타유가 ’시간 파멸‘에 대해서 쓰는 것은 안위의 기반이 안위 자체일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며, 시간이 존재를 질투하기 때문이다. 바타유는 초기작 《희생》(1936)에서 시간의 파멸에 관한 사유를 결론까지 철저하게 밀고 나가 미완성과 붕괴에 다다른다. 시간의 존재론은 불가능하지만, 사변의 완성을 이루려면 존재론의 기반을 취하는 방법밖엔 없다. 삼라만상을 허무는 시간이 공허만큼이나 차갑고 적나라하게 환희하며 저도 알지 못하는 희생제의의 잿불 속에 생각을 처박을 때, 그땐 온통 부숴진 철학의 잔해와 패러디밖에 없다.
만일 존재와 무가 시간 속에서 구해지는 것, 자의적으로 분리된 개념에 불과하다면, 시간은 존재와 무의 정반합이 아니다. 사실상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도 없고 완전히 개별적인 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시간이 존재할 뿐이다 [I 96].
사물의 존재는 스스로 불러온 죽음을 덮을 수 없으나, 그 자체로서 자신을 뒤덮는 죽음 속으로 투영된다 [I 96].
시간이란 자살 공갈도 불사하는 신의 질투다. 모든 존재가 — 지고의 존재마저도 — 그 앞에 넙죽 희생양이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시간이란 궁극적인 내재성의 대양이며, 그 어떤 것도 이 대양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 삼라만상을 시간의 바닷속으로 집어삼킨다. 질투 어린 증오의 검은 덩어리가 우주 한가운데 자라는 종양처럼 부풀고, 신의 내장 속에 자라나는 궤양의 화산처럼 부어오르고, 파멸적으로 폭발하며 비개체성이라는 산성 용암 속으로 만물을 삼킨다. 신을 여의고 순수해지는 질투를 두고 우리는 ‘시간‘이라고 부르며 철학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신과 함께 순수조차도 붕괴해 버리고 만다.)
어쩌면 아직도 신 안에 일말의 정열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목줄에 묶인 개의 정열이나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곧 이성이므로 하나님의 정열이 목줄에서 풀려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비주의자들이 체험이 나와 동일 선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신비 체험은 어떠한 한계에도 순응하지 않고 목줄을 벗어던질 곳이 신성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신성은 신성인바 모든 한계를 부숴야 하며 이성적 한계와 도덕적 한계의 가능성을 믿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 다시금 말하건대, 지금 이 순간에는 신이 죽는다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VII 370].
질투하는 시간이 만물을 지워버린다는 것은 절대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신이었기 때문이다. 물질이 시간의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은 불가능인 ‘동시에’ 부정한 (그리고 황홀경이기도 한) 진리를 잘 보여주는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질투의 충격파가 이성의 분화구에서 젖비린내 나는 우주의 잔해를 분출할 때, 초월적 물질은 관성(계획)으로서 지니고 있던 완전성을 잃어버리고 자연은 찢기고 경련하며 내파(內破)한다. 파괴자로서 우주는 곧 시간이며 파괴당하는 자연으로서 우주는 곧 시간이다. 그러나 자연은 파괴 속에서 스스로 경질화할 때 사용한 껍질을 버리고 부패마냥 시간을 침식하여 녹아내리는 심부로, 저열 물질, 생성, 흐름, 에너지, 내재성, 연속성, 욕망, 죽음으로 되돌아간다. ‘황홀경적 시간은 순진무구한 우연을 통하여 불현듯 돌발하는 것들, 주검, 나신, 폭발, 쏟아진 피, 심연, 태양의 섬광, 천둥의 광경 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노라’ [I 471].
이런 광기를 막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이유reason, 이성{이}란 그런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멈추는 일보다 큰 노동력이 들어간 계획은 확실히 없다’ [I 504] 는 것보다 더 자명한 말은 없다. 이 과정에 우리가 붙인 이름이 바로 ‘문명’이다. 문명 과정은 애당초 그 과정에 들어 있는 사회적 재앙 — 우주의 병증 — 에 등을 돌렸다. 홍수는 위험 그 자체다. 그런데도 역사를 구동하는 결정적인 동력원은 홍수다. 따라서 무수한 대문명이란 동력기engine이자 복합 기계이며, 물길을 파고 기능이라는 신기루를 만든다. 개미굴과 똑같이 광적인 현상유지 정책이, 그야말로 기계주의robotism가 전체적으로 나타나며, 과정을 노동으로 변환하고 더욱이 노동을 {과정의 부패를 막기 위한} 방부처리와 같은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모든 것이 ‘폭발적인 시간의 장대함’ [I 472] 과 척을 치고 있다. 따라서 문명이란 잘 기능하면 할수록 더욱더 경화되고 더욱더 피라미드화되는 것이다. 에너지원이 녹아내리며 줄줄 흘러나오는 견딜 수 없는 힘을 막으려 제례 의식, 관습, 규율로 벽을 세운다. (그 벽은 점점 더 상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가고 정화된다.)
그 불변함이 그지없어 삼라만상을 허무는 시간의 운동을 막을 경계를 설치하는 데는 고대 이집트 왕국부터 — ‘대민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콩코르드 광장 위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 오를레앙의 부르주아 군주정에 이르기까지 지나간 기나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주는 근원의 불변을 보장하는 분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단출한 영원성 속으로 조소를 머금고 어슬어슬 끌려 들어갔다. 느릿느릿 흐리터분히 흐르는 역사의 운동은 바로 이곳, 존재의 심장에서 일어난 것이지 변두리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운동이란 시간과 신의 기나긴 싸움이고, 멈추지 아니하는 싸움이며, ‘정주하는 주권’ 대 만물을 부수고 창조하는 비이성folie, 광증의 싸움이다. 그렇기에 역사란 강과 불로 이루어진 헤라클레이토스의 세상에 대고 변치 않는 암석으로 되풀어 답하기를 끊임이 없는 것이다 [I 505].
이것이 동기화 운동이다. 절대 시간을 정제하고 외부로부터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연속체로 엮어 구멍 없는 역사에 형태를 선사하려는 것이다. 모든 문명은 초월적인 영원Aeon을 갈망한다. 영원에 시간chronos, 크로노스의 기능적인 기관을 위탁하고 부패가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함이다. 영원이라는 댐이 파열과 무자비한 재-창조의 시간을, 진득하게 물질적인 시간을 막고 있다. 반대로 핏기 없는 연대기적 시간chronology에는 고작 균질적, 단위적 과정과 재현할 수 있는 과정을 매개하는 시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노동에 맞추어진 가축화 당한 시간성이다. 파멸catastrophe은 무한으로 승화되어 시간으로부터 추상화되었다. 동기화의 기반은 엄청나고도 불안정한 안정화다. 즉 순수하고 절대적인 시간을 경화하고, 그러한 순수 시간을 완성하는 것이다(시간의 무시간적 본질). 동기화는 사건을 한 치의 오류 없이 완전무결하게 최종적으로 기록하는 영원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이란 창조가 펼쳐지는 모습이 한 치의 오류도 없이 모두 적혀 있는 두루마리와 같다. 따라서 동기화는 신의 예속, 즉 신이 본유한 기능과 우주라는 도서관의 사서로서 지닌 우주적 의무에 대응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동기화의 가능 조건은 신의 절대적 이성이다. 니체가 말하기를 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도착하는 데는 — 신 죽음이 일어난 후에도 —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러나 도착이 지연된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신 죽음은 신이 신으로서 억압하고 있던 비동시성을 해방한다. 너무 일찍 왔다는 것 — 반시대적unzeitgemäß이라는 것 — 은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도리어 진정한 시간의 폭발을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비동시성 속에 아무렇게나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주부主部, subject이고 비동시성이 술부述部, predicate인 것도 아니다. 죽음은 외재적으로 비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비동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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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지옥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어떤 사물은 무로 되돌려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끝은 시작과 대응한다. 그런데 시작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있었다. 따라서 사물들은 오직 하느님만이 존재하는 그러한 종점으로 이끌려진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은 무로 되돌려진다 — 아퀴나스와 교섭하는 이단자의 목소리 [아 XIV 131].
서양 전통에서 죽음이 갖는 의미를 가장 근본적으로 짠 문헌은 바로 요한계시록 20장과 21장이다. 요한계시록은 ‘둘째 죽음’, 즉 서양사를 지배하였던 영혼의 최종적 운명이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장 11절 및 20장 6절도 보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서기 413년에서 427년 사이에 쓴 《신국론》은 요한계시록 구절을 해석하는 전통적 틀을 닦은 책이다. 《신국론》에서 ‘둘째 죽음’이 맨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3권 2장이다. 그러나 주요 내용은 12장에 등장한다. 12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첫째 죽음은 두 가지 죽음, 곧 하나는 영혼의 죽음으로, 다른 하나는 육체의 죽음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죽음은 전인의 죽음인데 영혼이 하느님 없이, 그리고 육체 없이 일시적으로 형벌을 당하는 것이다. 둘째 죽음은 영혼이 하느님 없이 육체와 더불어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이다 [신국론 1396].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쓰면서 짧은 논의를 결론짓는다.
둘째 죽음이라고 말하는 최후의 죽음 (그다음에는 아무 죽음도 없다) [신국론 1369].
따라서 둘째 죽음은 영벌과 아주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 하물며 영벌이란 계시록 및 여타 문헌에 나와 있는 말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2000년간 서양 세계가 궁극적인 고문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할 때 사용한 지옥의 수사법이다. 두 번째로 죽는다는 것은 지옥의 불길에 끝없이 갇혀 영원히 불탄다는 것이다. 무한대로 늘어난 연소 과정은 첫째 죽음이 뜻하는 지상의 자의성을 초월하며, 부정적인 것the negative이 작동하는 데 있어 모종의 한계, 넘어갈 수 없는 불타는 지평선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항상 그렇듯이 말이 범속하고 품위가 없으며 지성이 완전히 결여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둔하게 조잡스럽다. 이것은 나중에 기독교도들이 같은 주제에 대한 사변을 펼칠 때 참고하는 핵심 모델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란 것의 본질이 어찌나 야만스러운 것인지 통렬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영성이 뛰어난 교부들조차 전통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이런 야만을 계속하여 퍼뜨렸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한참 능가하는 지력과 문학적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도리어 그 능력을 아우구스티누스의 교조주의에 이바지하는 데 사용하여 정통 기독교 문화에서 가장 숭고한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교부들께 물려받은 세련되지 못한 영성을 가다듬으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이었다.
바타유는 《무신학 대전Somme Athéologique》으로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을 패러디한다. 《신학 대전》이라는 지식의 대성당은 아마도 기독교 문명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업적일 것이다. (바타유가 《태양 항문》에서 말하듯이 ‘인간이 관찰하는 사물은 각기 다른 것의 패러디거나 똑같은 사물이 기만적인 형상에 씐 것에 불과하다’ [I 81].) 《신학 대전》에서 아퀴나스는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을 세심하게 쌓아올려 기독교가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이것은 칸트가 금시대에 갖는 기능과 같다. (칸트에 이르러서 인식론이 — 혹은 통제된 회의주의가 — 사회·역사적 생선 과정 기반 시설에 커다란 변화를 낳은 추동력을 등에 업고 신학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아퀴나스가 《신학 대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265년이었는데, 그때 아퀴나스의 나이가 마흔이었다. 간간히 멈추는 일이 있었지만 1273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집필은 계속되었다. 헤게모니적 기독교 교리의 기반이 되는 것은 지저분하고 한참 일관성이 없으며 그저 자의적으로 긁어모아 만든 책인 ‘성경’이 아닌 《신학 대전》이며 — 특히 루터처럼 — 1차 성서로 회귀하는 것은 멈출 수 없는 퇴화 과정의 시작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학 대전》의 중심 업적은 신앙 속에 박혀버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함을 지탱하기 위한 이성적 기초를 다졌다는 것이며, 그중에는 영겁의 형벌로써 ‘둘째 죽음’ 개념이 있다. ‘둘째 죽음‘ 개념은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한다는 교리에 묶여 있다. (이것은 기독교적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의 우물 중에 가장 깊은 우물이다.) 이 주제에 관하여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것의 핵심은 제104문제 제4절에서 찾을 수 있다 [아 XIV 131-37]. 이 절은 아마도 스콜라 철학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일 것이다.
아퀴나스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계승한 입장을 철학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높게 쳐 줘봐야 성실하긴 하지만 박해자의 권위를 야망하는 반(反)이교도 논쟁의 맥락에서 쓴 무능한 경전 주석을 기반으로 일관성 있는 교리 비스름한 것을 세우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것이 자신이 독실한 유대 기독교인의 모범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아우구스티누스의 과격한 불관용은 일신교 신앙을 아우르는 논조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신앙의 이성을 옹호하려는 아퀴나스의 주장을 들을 때면 아퀴나스를 동정할 수밖에 없다. 아퀴나스가 이성을 옹호하는 동안에도 배후에는 이런 정신 나간 개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다만 종말의 단죄를 받고 나서 인간은 지각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지만 감관 자체가 쾌락으로 감미로워지고 안식으로 유쾌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고통으로 벌을 받는 것이므로 그런 것은 삶이라기보다는 죽음이라 불려도 부당하지 않다. 그래서 둘째 죽음이다. 첫째 죽음, 즉 상합시키는 두 자연본성, 그것이 하느님과 영혼이든, 영혼과 육신이든 두 자연본성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죽음 다음에 오기 때문이다. 육체의 첫째 죽음에 대해 말하자면 선인들에게는 선한 죽음이요 악인들에게는 악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둘째 죽음은 의심 없이 어느 선인들의 죽음도 아니고 어느 누구에게도 선한 죽음일 수 없다 [신국론 1341].
◇
아퀴나스에게 부여된 엄청나게 복잡한 임무는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한다는 개념 속에 있는 인본주의적 불경에 무릎 꿇지 않으면서 죽음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정통의 토양에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성적인 교리여야 했다.) 이레네우스도 아르노비우스도 영혼이 불멸한다는 교리를 비판하였고 신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모두 신께 의존한다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아우구스티누스조차도 이따금 영혼이 불멸한다는 교리를 깎아내리려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영혼이 본질적으로 불멸한다는 상념을 일단 의문에 부치면 고쳐먹을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자들이 영겁의 고문을 견뎌야 할 필요가 없고 — 엄중한 처벌을 적당 기간 견디고 나면 — 촛불 꺼지듯 영영 사라지고 끝나리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레네우스가 이런 교리를 추종했던 것 같고 아르노비우스는 확실히 믿었다. 바로 이것이 영혼멸절론annihilationism이라는 극단적 이단이다. 나중에 영혼멸절론은 소치니파와 엮였고 (때문에 소치니파 신자들은 엄청나게 박해당했다.) 아리우스파 신자들과도 엮였다. 기독교가 치세를 떨치던 시절 내내 영혼멸절론은 그야말로 악랄하기 짝이 없는 믿음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에 영혼멸절론을 가르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영혼멸절론자는 무신론자와 똑같이 고문과 사형으로 처벌했기 때문이다. (고문도 받고 사형도 받았는데, 당연히 무신주의자들은 전자를 더 걱정했다.) D. P. 워커는 17세기와 18세기 사이에 걸친 영혼멸절론을 논하면서 이렇게 언급했다. ‘무신론자들과 소니치파교도들은 죄를 지은 자들이 소멸한다고 믿는다고 생각되었다. 이들은 종교적 관용의 테두리 한참 밖에 놓여 있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위험한 종자들이었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DH 4].
따라서 아퀴나스가 — 약 400년 전에 — 영혼멸절론자의 주장이 (제한적으로) 타당하다고 주장한 것은 상당한 진실성을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다. 아퀴나스는 논증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첫 번째 단계에서는 피조물을 소멸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긍정하며, 그다음에는 비로소 이 능력을 사용하시는 분께서 자애로는 분이시라는 것을 부정한다(영겁의 형벌은 하나님의 감상벽). 아퀴나스는 논증의 첫 번째 단계에서 이렇게 시인한다.
사물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하느님은 그들에게 존재를 제공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들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듯이, 사물들이 이미 만들어진 이후에도 존재를 유지시키지 않을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존재하기를 멈추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물들을 무로 되돌리는 것이다Quod est eas in nihilum redigere [아 XIV 129].
소멸, 혹은 — 정확하게 말하자면 — 무(無)에의 회귀는 스콜라 철학에서 서로 연관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와 보존이다. 소멸(消滅)annihilation, 무화(無化)의 멸(滅)nihil, 무(無)은 곧 하나님이 존재를 창조하는 배경, 즉 무(無)다. ‘창조된다는 것은 무에서 되는 것[ex nihilo]’이기 때문이다 [아 VIII 107]. 창조는 무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내며, 존재가 무를 저항케끔, 즉 보존케끔 한다. 존재를 영원히 보존하는 것은 긍정적이고 끊이지 않는 인과 작용이고, 이 인과로써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만일 하느님이 어떤 사물을 무로 되돌린다면 이것은 어떤 작용을 통해서 일어나지 않고 작용을 중지함으로써 일어나게 될 것이다’ [아 XIV 131]. 따라서 소멸은 행위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회귀로서 신과 부정적 관계에 있을 뿐이다. 신께서 절대적인 죽음과 피조물 사이를 그만 방해하는 순간 존재가 소멸을 향하는 것은 존재의 본래 경향 때문이다. (신은 절대적 죽음을 알지 못하며, 이것은 신과 무의 관계가 순전히 억제 관계이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존재란 어떻게 보면 원인이신 신과 교감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피조물은 무로부터의 차이로서 오로지 죽음과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신은 제삼자로서 본인을 초월하는 교통communication, 소통을 우연히 침범하고 있을 뿐이다. 신과 무nihil는 경쟁자들이 연인을 두고 서로 질투하는 것처럼 피조물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하지만 피조물은 — 아무리 하나님을 우러러봐도 —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무nihil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유혹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감질나는 무심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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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멸절론을 믿는 이단은 영벌이라는 산만한 곡예에서 벗어남으로써 유대·기독교 일신론의 근본적 추동을 그 어떤 교리보다 명쾌하게 드러낸다. 일신론의 신은 제로zero의 적대자이며, 고로 독자성, 개인, 개별화의 수호자다. 이런 신께 완전히 추방당하여 신의 가호를 잃는다는 것은 곧 불가분의 비존재로 회귀한다는 것이며, 무nihil로 비(非)창조되는 것과 같다. 영혼멸절론이 기독교 정통 교리에 커다랗게 영향을 미친 부분이 없다는 것은 교회 내부에서 기독교보다 도리어 민속 종교와 미신이 지적 일관성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악인들이 영벌을 받는다는 생각에 쾌락주의적이고 징계를 내리고자 하는 심적 투자investment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다.)
독실한 영혼멸절론자에게 존재가 죽은 뒤에도 영속한다는 것은 곧 상일 것이다. 영속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만, 즉 선한 자들만 얻을 수 있는 것이리라. 진정한 형벌은 비존재다. 영벌의 범속한 경험성empiricity보다 비존재가 훨씬 더 오묘하다. 악인들의 영혼은 어느 쪽인지 도무지 구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심판이라는 극의 손아귀에 있다. 그저 절멸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죽은 뒤에도 하나님 밑에서 갈 길이 멀다는 말에 까탈스럽게도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자들에겐 비교도소적이고 외과적인 대안이 있다.
반응적 리비도 뭉치가 으레 그렇듯이 기독교의 영혼멸절론도 자기 속에 길을 잃은 능동적 충동이 있는 곳을 보여 주었다. 완전한 소산이라는 미끼가 놓여 있긴 하지만, 논리적·도덕적 차단 과정의 체계가 그 미끼를 안전하게 가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동물이 억압당한 물질성으로부터 튀어 오르는 말할 수 없는 정열만이 그 차단 체계를 투과할 수 있다. 악이라는 오명, 즉 신(부모)의 반대는 자아와 죽음의 비(非)형상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으로써 작용한다. 하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논리의 기원과 동시적인 함정이요, 즉 신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함정이다. 이 함정은 아주 깊숙이 숨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신 — 하나의 존재 — 께서는 흔들리지 않는 지배권을 통하여 존재와 존재의 부정을 사유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비존재에 관한 사유는 (지고한) 존재, 완전히 메마른 존재의 힘을, 두 갈래로 나누어진 존재 중에서도 열등한 극의 힘을 통한다. 비존재는 곧 사유의 문제이며, 신성한 논리적 연관성의 모형이 비존재를 방법론적 전제라는 예복으로 치장하여 존재의 특권을 공고히 한다. 죽음은 법칙을 표현한다. 고로 죽음은 최고 존재에 종속된다. 따라서 신께서 이해하시는바 비존재의 성질인 중립성이야말로 죽음학thanatology, 즉 죽음 논리의 진정한 조건이다.
믿음이 신실한 영혼멸절론자들이 죽음학의 조건만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실한 영혼멸절론자들은 죽음학이 하나님의 지성 속에서 이성과 정의의 절대적인 정점으로써 실질적으로 존재하리라고 믿는다. 신실한 영혼멸절론자들에게 죽음학은 신법의 건축 구조상 근본적이다. 영혼멸절론자 식으로 바라본 예속적 소멸은 곧 제거적 부정성인데, 이것은 크게 형식적 관계와 사번적 관계로써 두 방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해체주의의 경우에는 형식적 관계든 사변적 관계든 곧 치환할 것이므로 어느 쪽을 골라도 마냥 좋다.) 형식적 제거는 긍정성과 긍정성의 부정적 성질 사이에 관련이 없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 형식주의적으로 이(오)해되는 — 사변적 제거는 부정적 성질이 동시적으로 긍정성에 내속하기도 하고 내속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부정 속에 무엇이 들어있냐는 문제는 부정의 성질이 무엇이냐가 결정한다. 이것이 곧 제거의 엄밀한 정의다. 헤겔이 형식적 추론에서 움트는 사변적 동요라며 뜨겁게 포옹한 스피노자의 법칙 — 모든 규정은 부정이다Omnis determinatio est nagatio — 의 의미는 긍정성이 긍정성의 제거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논리의 학》의 부록Zusatz에 따르면 헤겔이 말한바 ‘모든 규정성의 기초는 부정이다’ [H VIII 196].
비규정에서 비(非)는 형식적 부정이라고 읽거나, 그 자체로서 제거적으로 이해한다면, 즉 규정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규정의 사변적 발전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이 같은 운동은 완전히 펼쳐지는 순간 헤겔주의 그 자체와 같아진다. 반면 비규정적 부정의 비규정적 의미는 제거적이지 않으며 맹렬하다. 맹렬한 부정은 자신이 낳는 소멸과의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이질적이다. 따라서 정의상 형식 논리로도 사변 논리로도 자기가 낳은 제거적 결과로부터 도출할 수 없다. 논리는 전혀 화제중립적이지 않다. 논리란 안정적 존재의 기반 위에서 추론하는 것, 즉 시간의 부재 속에서 추론하는 것이다. (헤겔은 역사를 사유하지만 시간을 사유하지는 않는다.) 동일성의 법칙, 무모순의 법칙, 규정적 부정determinate negation은 모두 논리적 관계의 동시성과 시간적 분화의 부재(비시간성)를 고집함으로써 변형metamorphosis보다 더 커다란 자격을 갖출 때만 엄밀할 수 있다. 약한 (과학만능주의적) 의미에서든 강한 (신학적) 의미에서든 이런 자격이 바로 관념성의 구성 요소다. 달리 말하면 관념성이란 곧 논리적 복종, 즉 순수 존재이며, 논리의 화제는 존재론이다. 자살이 결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무존재할 수 있는 존재의 잠재력 사이에 놓인 완전히 이질적인 관계를 예시하는 기술적인 문제라는 것은 논리학자들에게 딱한 일일뿐이다. 잊으려는 몸부림과 희생제의 과정이 지닌 긍정성이 이런 이질성을 보다 더 일반적으로 증명하는바 있다. 죽음의 맹렬이 죽음을 에로티즘 속에 얽어맨다. ‘성행위가 시간 속에서 의미하는 것은 호랑이가 공간 속에서 의미하는 것과 같다’ [저주 15]. 죽음은 논리적 부정과 다르게 얽히고설킨 기회와 복잡한 결합, 신체의 상호 관통, 난류를 요한다. 죽는 방법은 수도 없이 많지만, 미궁을 빠져나가는 길이 수두룩하게 불어난다고 해서 보편적 부정적 가능성이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다.
맹렬은 부정 작용을 통하여 반성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맹렬에는 과연 규정이 없다. 다만 이질적 요소들이 강렬하게 충돌하며 생겨난 진짜 구성만 있을 뿐이다. 진짜 구성의 자손은 복합적 종합이다. 복합적 종합 속에서 결합한 수많은 부정성에는 논리적 등가물이 없다. 진짜 일관성만 있을 뿐이다. 이것을 바타유의 용어로 하면 공동체community다. 낭비를 실현하는 것은 복합적 종합의 집합을 요하기 때문에 소진/소모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며, 소진/소모를 불가피하게 방출하는 통로는 불가능, 죽어가는 느낌, 비죽음undeath에 있다. 존재는 잉여에서 나왔다. 자연은 추호도 논리적이지 않다.1 자연은 ‘아마도 완전히 자체의 잉여’, 제로zero에 얼룩진 재, 제로에서 타오르는 불, ‘일지도 모른다’ [III 219]. 그리고 제로zero는 장대하다.
- 조르주 바타유는 〈낭비의 개념〉(1931)에서 물질은 ‘비논리적인 차이’라고 했다. (조르주 바타유, 《저주의 몫》, 조한경 역, 문학동네, 2008, 48쪽 참조.)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