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50년이 지난 뒤에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였으면 싶노라고 하였지만, 그렇다고 고작 지적 이해를 바란다는 의미였을 리는 없다. 니체가 체험하고 찬미하며 바라보았던 것은 권태 서린 지성의 주의 따위가 아니라 삶, 환희, 죽음이 운동할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직접 뛰어들겠다는 신념으로 꾸밈없이 말해야 하노라. 가치 전도 속에서는 비극 그 자체가 요동치고 있으며 이제 안식처라고 할 것도 얼마 남지 않았으라. 인생의 심장이란 곧 불현듯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이며, 더없이 상스러운 것들이 일으키는 웃음에 젖어 환희의 극치로 나아간다는 것, 이 기묘한 사실은 지표에서 인간에게 닥치는 온갖 것들과 필사적으로 투쟁할 것을 요구하는지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세간에 만연한 진리의 속박을 부숴야 한다고 말하노라. 그러나 허망한 관심밖에 없는 분들께 호소하는 것은 가증스럽고도 헛되도다. 으레 다른 것보다 투쟁하기가 항상 한참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뜻을 알고 니체의 가르침이 지닌 무게를 이해하지 않을 수 없으라. 내가 말한즉 아무것도 그림자 속에서 몸을 숨길 수 없는 곳을 향하여 더디게 더디게 나아가기 위함이라.
I. 파시즘에 대한 제안
1. ‘신은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조직이라고 불릴 만하다.‘*
파시즘은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로부터 사회를 재구성한다. 파시즘은 가장 폐쇄적인 조직 형태이며, 즉 인간적 존재로써 영원하신 신께 가장 가깝다.
반면에 (현실 스탈린주의를 제외한) 사회 혁명에서는 해체decomposition, 부패가 극단에 달한다.
무릇 존재란 하나같이 환상에 불과한 두 가능성 반대편에 자리 잡는다. 그 가능성이란 ‘영원한 신격화와 탈신화ewige Vergottung ud Entgottung‘, 즉 ’신격화하는 (신을 만들어내는) 영원한 통합과 신을 소멸하는 영원한 해체‘이다.
파괴된 사회 구조는 종전에 일어난 해체에 대한 반발을 천천히 내부로부터 발전시키며 다시금 조직된다.
재조직된 사회 구조는 — 파시즘에 뒤따르는 재조직인가 종전의 사회 구조를 부정하는 혁명에 뒤따르는 재조직인가를 막론하고 — 끊임없이 해체를 주문하는 존재의 운동을 마비시킨다. 통일주의적 대건조물이란 종교가 맹위를 떨치고 비굴한 필요 너머에 존재하는 삶을 향한 운동의 바람을 불어올 것이라는 전조에 불과하다.
마력이란 곧 니체적 고양이라는 그 신랄한 의미에 따라 삶을 힘에의 의지와 모순의 절정으로 이끌며 해체하는 것이라.
* 《힘에의 의지》, §712 (전집, 라이프치히, 1908, 14권, 170쪽).
2. 역사를 보면 개인은 공동체에 대하여 대체물의 성질을 지닌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 사람은 통일적 공동체 속에서 형태와 존재를 얻는다. 서로서로 한없이 거세게 부딪히던 국란마저도 우리 눈앞에선 서로서로 엇비슷한 통일적 공동체의 형성에 이르렀다. 따라서 그곳에는 사회 혼란도 사회 후퇴도 없었던 것이라. 수두룩한 사회가 수두룩한 경제•역사적 요건 속에서 그 근본 존재 양태와 전시대를 이어진 구조가 형성•재형성되는 것을 수두룩하게 보았으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 법칙에 반하는 인간의 투쟁은 분명히 제한적인 의의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안정한 계급 평등 위에 안주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과도적 형태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에 장대한 해체decomposition, 부패는 없지만 옹졸한 해체는 있다.
통일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반드시 민주주의적 대의를 통해서 나는 것은 아니라. 투쟁은 옛 시대의 이름 아래서 일어날 수 없다. 오늘부로 인간 존재의 수많은 가능성은 우두머리monocéphale 사회가 형성하는 너머에 자리하리.
3. 민주주의에 내재한 분노가 미치는 범위가 얼마나 짧은지 (스탈린주의자들이 똑같이 분노라는 어휘를 쓰기 때문에 겹치는 의미는 다 제외하고서) 보라는 말은 통일적 공동체를 받아들이자는 뜻이 아니다. 상대적 안정이나 자연법에 순응하는 것이 붕괴 운동과 역사의 창발을 멈출 힘을 정치 형태에 쥐어 주는 일은 그 어떤 상황에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물며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생겨나는 수많은 욕구를 단번에 충족할 수단을 쥐어 주는 일도 없다. 반면 폐쇄적•억압적인 사회의 실존 양상은 치명적인 폭발력을 축적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한데 민주주의적 사회 내부에서는 폭발을 실현할 수 없다. 하나 폭발력이 지향하는 유일한 목표가 (즉 필연적 목표가) 곧 사회의 머리와 통일적 구조를 파괴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전 지구를 가로질러 발전해 나가며 맹위를 떨치는 새로운 구조와 ‘질서’의 구성이야말로 곧 유일하게 실제적이고 유일하게 가능한 해방 활동이다. 혁명적 파괴 행위가 지나간 뒤에는 어김없이 사회 구조와 머리가 재구축되기 때문이라.
4. 민주주의는 상대적으로 힘이 없고 독립적인 대립을 서로 상쇄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폭발적인 응축을 아예 배제하고 있다. 우두머리 사회는 인간이 입제한 자연법의 자유로운 작용에서 기인하지만, 우두머리적 사회가 부차적으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은 억압적 실존이 쇠약하고 불모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유일하게 생명과 힘으로 가득하며 유일하게 자유로운 사회는 곧 머리가 두 개 내지 여러 개인 사회이다. 이 사회는 생명의 근본적 대립에 폭발적인 압력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배출로를 뚫어주지만, 그것조차도 엄청난 부를 통한 호화로운 형태의 배출로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운동 방향 아래서 머리의 복수성은 머리가 없는acéphale 존재의 성질을 실현하는 방향을 향한다. 머리의 법칙 자체가 곧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것이고, 세상을 신께 환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무기물은 어머니의 젖가슴이라. 삶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곧 다시 전과 같이 참된 것이 된다는 뜻이요,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이 축복임을 아리라.‘*
‘인식을 무기 세계와 일치기시키. 이것은 한없이 뚜렷한 인식이요 ‘진리’의 치세로다. 불확실성과 환상은 유기 세계에서 시작된다.‘⁑
‘모든 특화가 잃어버린 것 : 종합적 자연은 우월한 자연이다. 그러나 모든 유기 생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특화이다. 유기 생물 뒤에 자리한 무기 세계는 최고로 거대한 힘의 종합을 나타내며 말미암아 지대한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무기 세계에는 오류도 관점의 한계도 전혀 없다.’⁂
전술한 세 가지 글 중에 첫 번째 글은 니체의 글을 요약하는 글이고, 다른 두 가지는 유고에서 발췌했다. 이 세 가지 글은 하나같이 존재 영광과 비참의 요건을 드러낸다. 자유로운 존재란 곧 비기능적 존재를 의미한다. 스스로가 기능 따위에 갇히게 두겠다는 것은 곧 삶이 거세당하도록 놔두겠다는 말이다. 머리의 권력과 의식의 권력과 신은 하나같이 스스로가 곧 목적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가 곧 목적이라고 간주하는 타를 섬기는 기능을 추구하는 삶을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타를 섬기는 기능을 추구하는 삶이란 몹시 혐오스러운 대상임이 틀림없다. 이 혐오가 닿는 범위를 제한하겠다는 것은 곧 혐오가 통일적 정치 체제에 반하는 투쟁의 법칙과 같다고 주장하겠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법칙의 문제일 뿐이고, 법외에서는 이러한 투쟁조차도 내적 모순에 불과하다.
* 샤를 안들러Charles Andler, 《니체의 인생과 사유Nietzsche, sa vie et sa pensée》, 7권, N.R.F., 1931, 307쪽 및 《유고집》, 《즐거운 학문》 집필 시기, 1881-1882년, §497 및 §498 (전집, 라이프치히, 1901, 12권, 228쪽) 참조.
⁑ 《유고집》, 1883-1888년 (전집, 라이프치히, 1903, 13권, 228쪽) / 불어본, 《유고집》, 메르퀴르Mercure, 1934, 140쪽, §332.
⁂ 같은 책, 같은 쪽 / 불어본, §333.

II. 신의 죽음에 대한 제안
6. 무두인acéphale은 파괴에 봉헌하는 주권과 신의 죽음을 신화적 방식으로 나타내노라. 이 신화적 표현 속에서 머리가 없는 인간과의 동일시가 생겨나며, 그 자체 온전히 ‘신의 죽음’인 초인과의 동일시와 뒤섞인다.
7. 시간이 절대적 대상이자 삶의 폭발적 자유로써 차지하는 위치는 폭발과 유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초인과 무두인도 폭발과 불가분이다. 시간은 경우를 무관하고 황홀경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니체가 실스마리아에서 예지했던 ‘영원 회귀’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 ‘파멸’(《희생》), ’시간 폭발‘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 따위는 부차적 문제일 뿐이다. 에로티즘을 추구했던 성자들의 예수 그리스도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상정한 신과는 다르듯, {황홀경의 대상으로써} 시간은 철학자들의 시간과는 다르다. (하물며 하이데거적 시간과도 다르다.) 시간의 방향을 향한 운동은 단숨에 실재적 존재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신을 향한 운동은 이미 초엽에 실재적 존재에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8. 황홀경적 시간은 순진무구한 우연을 통하여 불현듯 돌발하는 것들, 주검, 나신, 폭발, 쏟아진 피, 심연, 태양의 섬광, 천둥의 광경1 속에나 존재할 수 있다.
9. 전쟁이 한 국가의 영속을 보장하기 위한 의지에 불과하고 국가란 곧 주권이자 불변성에의 요구라고 한다면, 신권의 권위와 신은 넘쳐흐르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고 친숙하며 변하지도 아니하는 잠의 건축을 세우려 분투하는 인간의 절박한 기승을 나타낼 뿐이라. 국가의 존재와 군대의 존재는 죽음을 일말의 불안조차 없는 긍지 속 하나의 요소 따위로 환원함으로써 무화하고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 쓸데없는 낭비로 가득하며 조각조각 맹목적인 폭발로 가득한 우주와 인간 사이를 국가와 군대가 근본적으로 갈라놓는다. 하나 이 근본적인 단절도 인간의 탐욕이 그저 한 찰나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
10. 혁명이란 그저 혁명 옹호자와 온 대중이 다 알고서 의식하고 있는 결과로써 바라보아선 안 된다. 청교도 혁명이든 백과사전파 혁명이든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든2 아나키즘 혁명이든 간에 혁명이란 그 모양 날것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혁명은 소요가 끝없이 폭발하는 모습으로3 겁을 지레 먹고 벙어리가 된 이 세간 사람들의 눈에, 현대 문명마저 지배하는 뜻깊은 역사적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혁명으로 말미암아 신권은 더 이상 권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제 권력이란 신께 고유한 힘이 아니라 오늘 이날에 민중의 폭발적인 궐기로 부활한 시간에 고유한 힘이며 그 자유로운 충만함은 수두룩한 왕을 시해하노라. 파시즘에서 권력은 고작 사이비 혁명 따위에 근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그 장대함과 권위가 유일무이한 권력에, 억지로 바치는 위선적 치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권력은 파멸적인 변화에서 나오노라.
11. 신과 수두룩한 왕과 이들의 일당이 인간과 대지 사이에 놓여 있다. 아이 앞에 선 아버지란 곧 어머니를 쟁취하려는 근친상간의 길에 놓인 장애물과 같으며 신과 왕도 이와 같다. 근대 경제는 악착스럽게 대지의 부를 훔치려다 미수에 그친 사람들에 관한 시금털털한 영웅담으로 가득하다. 대지는 개복당했다. 대지의 태내에서 인간은 철과 불을 가져갔다. 인간은 철과 불을 갖고서 끊임없이 서로의 배를 째고 가르고 있다. 대지 속에서 작열하는 백열은 그저 화산 분하구로 터져 나오고 다하지 않으되, 시뻘겋게 발광하며 온 나라에 수두룩한 제련소에서 스멀스멀 나는 연기로 죽음을 토하는도다.
12. 대지의 태내 속에서 끓는 백열은 그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의 손에 닿지 아니할 것이며 그 자들의 것으로 되지도 아니하니라. 대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가 사는 천체의 정체를 알지 못하며 자연에 흘러넘치는 부를 알지도 못하며 즉 천체 속에 지각으로 둘러싸인 백열을 알지 아니하므로 인간은 그저 스스로 창조한 상업의 뜻에 따라 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나 정작 상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몫은 죽음에 봉헌한 몫이라. 대지에서 숨 쉬는 생명이 본유한 참된 본질nature, 자연을 인간이 알지 못하고, 참자연께서 황홀경에 도취하고 폭발할 것을 주문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참된 본질은 다시 회계사들과 각 파 경제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하리며, 이 자들은 본질의 문제 따위는 그저 저들의 회계와 저들의 경제가 산출한 대단하신 성과로 덧칠되어 잊혀지게 두리.
13. 사람들은 대지를 자유롭게 즐기고 대지께서 만드신 것을 후하게 쓰는 법을 알지 못한다. 대지께서 끝없이 만들며 후하게 낭비하며 자유로이 풀어헤치는 것은 그저 헐고 부수기 위함이라. 근대 경제가 만든 생기 없는 전쟁은 대지의 뜻을 일깨우려 하나, 고작 머리가 얕은 계산과 얕은 계획으로 들어찬 배교자들이나 일깨움에 그친다. 그래서 열은 없고 우울한 분노로 가득한 대지의 뜻이라고 일깨우려 드는 것이라. 하나 목적도 목표도 없는 현대전의 참화가 지닌 과도성이며 온갖 것들을 다 찢어발기는 성질을 보고서도 폭발적인 시간이 어찌나 장대한지를4 깨달을 수 있으라. 어머니이신 대지께서는 태곳적부터 오늘까지 지하의 노신으로 계셨으라. 하물며 수많은 사람들을 일으키사 야단법석 속에 하늘신을 몰락시키기까지 하는도다.
15.5 신을 구하는 것, 모든 것이 정지한 상태를 구하는 것, 적막을 구하는 것, 이것이 보편 공동체를 향한 갖은 시도를 죄다 도탄에 빠뜨렸다. 인간의 마음은 신 안에서 안식을 구하는 순간에나 불안을 그치고 평화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신의 보편성이란 곧 불안의 근원일지며, 신께서 그저 고독 속에 스스로를 가두시고, 한 집단의 배타적 태도로써 아무것도 변하지 아니하는 영원 속에 스스로를 가두신다면 평정이란 없다. 무릇 보편 존재는 무한하며 고로 멈추는 법이 없기 때문이라. 보편 존재는 생명을 그저 삶에 가두지 않으며 삶을 열어젖히고 무한이라는 불안 속에 던져넣노라. 영원히 끝에 달하는 법이 없고, 머리도 없으며, 피를 흘리는 상처와도 같은 세상이며6, 유한한 개별 존재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파괴하노니, 그러므로 진정한 보편성이란 곧 신의 죽음이라.
{17.7 우리에게 종교란 공통과 만인이 골몰한 웃음 어린 수행(눈물 어린 수행, 에로틱한 각성 수행)을 의미할 수 없다. 영원성으로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던 모든 것을 웃음(눈물, 에로틱한 각성 수행)이 소멸한다는 의미에서.}
- 원고 : 이 단락은 5번 문단의 내용을 다시 재시하고 있다.
- 원고(삭제) : 신죽음의 계시 속에서 생명의 야욕이 지닌 죽음을 향한 끈덕진 방향성은 (저마다 다른 놀이와 꿈의 형태로 주어지며) 더 이상 소멸에의 욕구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나의 존재가 갖는 순수한 야욕으로 나타난다. 죽음과 공허는 — 죽음과 공허의 파멸 자체를 통해 — 혼미감으로 표상되어야 하는 나의 주권이 스스로를 무한히 일으켜 세우는 영역에 불과하노라.
- 원고(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 및 돌연히 수준 차이를 유발하는 갖은 것들 속에나 대개
- 원고(삭제) : 러시아 마르크스주의혁명이든 스페인 바쿠닌주의 혁명이든
- 원고(삭제) : 왕을 시해하는 자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입성하는 모습으로
- 원고(삭제) : 사람들의 어머니로 계셨으며 전례없는 굉음과 함께 파멸하는 혼돈 속에 끝없이 신을 소멸하며 사슬이 풀린 시간이 어찌나 장대한지
- 원고(삭제) : 피를 흘리며, 유한한 개별 존재를 배격하노니, 그러므로 보편성이란 곧 신의 죽음이며, 필경 신의 죽음이란 한정된 주권이자 변하지 않는 주권이라.
- 14번 문단은 없다. (역주)
- 17번 문단은 《아세팔》 출판본에 없고 원고에 있다.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