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닥쳐오는 것들을 통하여 나를 전율하게 하는 힘을 얻었도다. 아래 있는 모든 것이 전부 ‘희생’이라는 인습(因襲)적 제의와 관련 있으매, 내 곁에서는 통렬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할지언정, 황소의 멱을 가르는 사제의 힘과 비등한 힘이라고 쓰는데 거리낌이 없노라. 칼을 든 사제가 (그리고 사제와 함께 추하기 그지없는 죽음이) 황소에로 향할 적에, 풀밭에서 반추하고 있는 평범한 짐승에 불과하고 다른 소와 별다른 구분점이랄 것도 없는 이 황소는 제 다리 주위를 따라 그어진 원 덕분에 신으로 화(化)하게 된다. 고로 사제 또한 참수를 기다리고 있는 이 짐승의 멱을 갈라 찢을 어마무시한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희생제의는 폐용되고 말았으나, 옛적에는 제 보편성 덕분에 무엇보다 중대한 인간 행위였다. 수많은 원시 부족이 공복증만큼이나 불가피한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제각기 독립적으로 다른 희생제의의 형태를 만들어내었다. 고로 똑같은 욕구를 충족해야 할 필요라는 것이, 현시대에 와서는 고립된 인간을 지리멸렬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놀라운 것이 없다.
고로 나는 감각의 정련이나 결말조차 없는 지적 복잡다단으로 떨어지고 말 것 같은 공포로 말미암아 아무도 매달리고 싶어하지 않을 하찮은 일, 옹졸한 일, 헛된 일에 매달리노라. 따라서 나는 지금부로 아래 나와 있는 사물의 질서가 다른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라고 생각되는 단일성질도 일편의 성가신 이야기도 아니고 다만 혐오스러운 우회로를 통하여 조망되는 모종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강조해야만 하겠다. 의식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복잡성을 가진 구조를 강제하는 것은 좁아터질 정도로 제한적인 가치만을 갖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무의식 상태에 계속해서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도 참 꼴볼견이다만, 이미 의식된 것을 착실히 붙잡고 있는 것이 본 문제가 아닌바, 다른 분들께서는 — 외양상 정력이 훨 넘친다는 이유로 — 진절머리나겠다, 퇴폐적이다라고 생각하실 세목으로 들어가서라도 동지 여러분께서 상상조차 못 하셨을 실의(失儀)로 하여금 세차게 부추기지 않을 이유도 딱히 보이지 않는구나.
송과안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아래 후술할 송과안1으로 나타난 착상은 — 하물며 집착은 — 거진 전부 딱 내가 ≪태양 항문≫을 썼던 1927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가 안구가 투우의 이미지와 확실히 연결되어 보이기 일 년 전이다. 지극히 일반적인 질서에 대해 논하기 전에 그 연대기를 방증해 보이는 것이 맞다고 믿는다. 내 논고가 일련의 이미지만큼이나 하찮은 현상 사이사이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연관관계를 보여주고 있으니까.
송과안은 아마 본래 내가 태양에 결부하였던 항문의 개념(즉 밤의 개념)에 대응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 ‘태양을 제하고선 어떤 눈부신 것도 비교할 수 없[는] […] 순결한 항문(항문은 밤이지만).’ 나는 눈이란 것이 끔찍한 화산 폭발처럼 두개(頭蓋)의 꼭대기에 있는 것을, 엉덩이나 배변에 결부된 음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성질과 맞아 떨어지는 것을 상상했다. 광명의 정점에 있는 태양을 주시해 보니 눈이란 섬광의 극치에 이른 태양2의 상징이었고, 내 두개 꼭대기에서 작열하고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옛적에는 독수리를 태양의 동물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독수리에게 태양을 면대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던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송과안이라는 단순한 표상에 대한 극단적인 관심은 필연 스스로 태양이 되고자 하는 꺼뜨릴 수 없는 욕망으로 해석된다(눈먼 태양인가 눈부신 태양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독수리의 경우든 나 자신의 경우든 직접 응시는 동화와 등가이다. 그러나 독수리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추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기막힌 욕망이 가진 잔악하고도 파괴적인 성격이 곧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두개 한가운데서 떠지는 눈이야 상상의 산물일지언정, 징그러울 정도로 추접스럽고 아주아주 무시무시해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이 기이한 눈이 뼈로 된 벽을 뚫고 빛을 비추리라 진지하게 생각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기나긴 예속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인간이 오직 태양을 위한 눈을 갖게 되리라 생각한 탓이다(눈구멍에 들어찬 두 눈이 미련한 고집으로 태양에서 시선을 돌려야 함에 반하여서). 나는 미치지는 않았으나 우리 인간 경험을 어떻게든 해서 비집고 나가야 한다는 주장에 과한 중요성을 결부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또 나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방법론에 적응하여서 한없이 세상에 있음 직하지 않은 것조차도(입에 묻은 거품같이 한없이 압도적인 것조차도) 내게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물을 규칙적으로 들어올리는 조수의 수직 운동과 흡사한 식물의 일률적 수직 운동을 상상했고, 다른 편으로는 자전하는 지축의 수평 운동과 흡사한 동물의 수평 운동을 상상했다. 이리하여 나는 지극히 단순하고 기하학적이면서도 동시에 엄청나게 우스꽝스러운 환원에 도달하였던 것이다(예컨대 나는 지표에서 일어나는 교미의 주기 운동이 기차의 피스톤과 흡사하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피스톤이 바퀴의 회전과 연동하듯 지표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교미가 지구의 자전과 깊은 관련이 있으리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날것에 가까운 체계 안에서 인간은 식물을 위로 자라게 만드는 수직 조영(造營) 운동, 즉 발기 운동에 유난스레 고취된 동물로 보였고, 이 수직 운동이란 것조차 암컷을 덮칠 적에 뒷다리로 몸을 치세우는 수컷 포유류와 흡사해 보였으나, 인간이란 분명히 우뚝 선, 남성기처럼 우뚝 선 동물로 보였던 것이다.
✷
오늘에 와서도 이 범행성적 체계 속에서 식물이 차지하는 자리, 동물이 차지하는 자리, 인간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일차적 착상이란 것이 나에게 말도 안 되는 것으로 보이기는커녕, 모든 인간 본성의 기초로 제시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기초로부터 내가 예비적인 설명에 착수할 수 있을진대, 이렇게 꼼꼼한 설명은 새로운 것이다. 아직은 거의 수평에 가까운 보잘것없는 여우원숭이부터, 간신히 바로크적이라고 할 수 있을 고릴라까지, 사족 보행에서 호모 에렉투스로 일어서는 단계적인 과정 중에 외양의 추함이 공포스러운 비율을 갖게 된다는 점을 확인한다는 것이 내 견해로는 지극히 신기한 일이다. 반면 영장류의 진화는 조영이 아직은 완성되지 않았던 원시종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거치며 외양이 더욱더 고귀해지는 미의 방향성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해서 호모 사피엔스까지 올라오는데, 모든 동물 중에서 군사 훈련 수준의 극단적인 경직성과 곧은 자세에 이르게 된 유일한 동물이다. 만일 인간종 같은 종이 곧장 고귀한 외양과 고귀한 태생을 가진 동물 종에서 태어날 수 없었고, 포유류 집단과의 관계를 통해 오물처럼 메스꺼운 것으로 바뀌어 버린 종에서 났더라면, 추접스럽고 똥 발린 원숭이들의 엉덩이를 일상적인 경쾌한 태도로 바라보는 것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한 번쯤이라도 동물원에 가서 이 외설스러운 돌출부 — 찬란한 색깔을 입은 데다, 발랄한 분홍색부터 자개빛 보라색까지 괴기할 정도로 끔찍하고 알록달록하기까지 한 가지각색의 분변 두개 — 에 탄복해 보지 않은 아이는 없다. 동물의 본질에 고유하며, 일반적으로는 머리(구강구)를 향해 표출되는 섬광, 난란(爛爛)함이, 원숭이에게 있어서는 정반대 극, 즉 항문구(肛門口)를 향해서 표출되었음 직한데, 하물며 인간에게 있어서도 여타 동물에게 있어서도 물론인 것이다. 충분히 논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이 끔찍한 괴기를 불균형한 자연의 징후로써 (균형 상태는 시시한 수평적 위치로 나타나므로) 나타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새들이 중간 위치에서 균형을 찾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새들의 균형은 다른 동물의 균형과는 완전히 상이하며, 비상이라는 조건을 통한, 즉 사족보행 동물의 이동 운동만큼이나 연속적인 이동 운동을 통한 새로운 균형이라는 것이 참으로 자명하다. 반면 원숭이의 반(半)수직 자세의 조건이 되었던 나뭇가지 사이를 타고 다니는 행위는 불연속 이동 운동을 초래했다. 이 불연속 이동 운동은 새로운 균형을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서서히 존재 방식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무시무시한 외양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원숭이들은 숲에서, 때로는 동굴 속 어둠에서, 나뭇가지 사이에서 어설프게 균형을 잡고 뙤약볕을 피하며 살면서, 이러한 생존 방식 때문에 제대로 된 구조랄 것이 없는 몸부림과 보기만 해도 영 역겨운 기이한 불안에 귀착하게 되었다. 광윤(光輪)으로 뒤덮인, 종기처럼 터져버릴 듯한, 털 없는 항문의 추저분한 개화란, 모든 구심점을 잃어버린 데다 아무런 내성도 없는 체계 속에서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어쩌면 예서도 그러하고 딴 곳에서도 그러하듯 가장 조그마한 규모로 평형의 붕괴가 일어나도 자연의 추가 제일 남사스러운 외설을 해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인류학자들은 인간의 조상들이 숲을 나왔던 순간부로 직립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한다(예컨대 요 흉몰스러운 짐승들이 커다란 화재가 일어났을 중에 겁을 집어먹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조상들께서는 나무라는 바침목을 잃어서 거의 직립하여 움직여버릇하였으므로 우스꽝스러운 모냥으로 사족보행과 직립보행 사이를 푼수처럼 오가야만 했으리라. 하나 조상들께서는 오로지 점점 균형을 되찾아감으로 하여금, 다시 말해 움직이는 방식에 모종의 연속성과 균형을 부여하여금 직립 자세를 지탱할 수 있었으리라. 직립이라는 거대한 난관을 고려해 보면, 이동 운동의 원시적 균형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불안정했으리라고 가정해 봄 직하다. 즉 지금 우리가 길들어 있는 완전한 균형 상태 — 남근적 조영과 반듯한 미(美) — 로 점차 나아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인간의 형태에 이르기까지의 진화란 원숭이와 여우원숭이의 공통조상들이 이미 수평적으로 발전시킨 조형적 균형으로의 회귀, 역학적으로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 회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들은 문헌 증거를 찾기가 아주 어려운 상황을 무릅쓰고 상기한 진화의 존재 양상을 유독 머리뼈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재구성해놨다. 두개 맨 꼭대기에 있는 부위의 개화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부터 시작하여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까지 계속되며, 어쨌든 오늘날 존재하는 수많은 인종으로 적이 완결한다. 심리학적으로 두(頭)의 정점은 새로운 군형의 중심 귀착점으로 거듭난다. 뼈에 있는 갖은 것 중에 안와와 턱뼈와 돌출과 같이 (이것인즉 아직껏 어중간하게 수평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질서와 원숭이 적의 충동에 관한 추억이겠고) 인간 존재의 수직적 충동과 반대로 향하는 것은 거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하나 진실을 담아 말하건데 항문구 돌출부의 축소는3 훨씬 더 의미심장한 것이다.
내게는 위 분석이 이미 여러 난점을 제기한다는 사실을 확언해야 할 커다란 의무가 있다. 또한 이 난점을 명확하거나 적절하게 해결할 의향이 당장에는 없다는 사실을 재빠르게 알려드려야겠다. 지면에 몇 가지 견해를 진술한즉, 거진 오로지 심리학적이든 아니든 우연한 일들, 즉 이 우연이 초래하였던지 나타내던지 아니면 야기하였던 거진 자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문란과 광란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고로 내 설명 속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균형의 개념이 허황된 개념도 추상 개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겠다. 보행하는 동안이나 갖가지 동물이 달릴 때 일어나는 무게중심의 규칙 이동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갖은 형상에서 미(美)라고 명명하는 것은 단지 운동하는 신체가 이루는 균형이 지대한 힘의 경제를 지탱하도록 해주는 연속 이동 방식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기란 아마 쉬운 일일 테다. 따라서 미(美)가 그 단어상의 학문적 의미에서는 선을 통한 기하학적 단순화로 환원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합성 사진으로 몇 가지 들쑥날쑥한 얼굴을 갖고도 일종의 그리스적 인간상을 얻을 수 있다 — 안면부의 특징을 중첩해서 섞이게 만들면 균형 잡힌 율(率)이 더 잘 보이게 된다). 이런 인유(引喩)가 짧디짧고 충분하지 않다고 한들, 내가 짐작하기에 그래도 이 정도면 시조 인류의 뒷다리에 일어난 근본적 변화를 역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항문의 음란함은 가장 대표적인 원숭이들마저 다른 포유동물의 항문을 가려주던 꼬리를 없애버렸을 정도로 내쫓겼으며, 인간의 진화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인간의 항문은 살갗 깊숙한 곳으로, 엉덩이골 깊은 깊숙한 곳으로 은둔하였고, 웅크린 자세를 하거나 배변을 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더는 돌출하지 않게 되었다.4 이제 일반 조건 아래 개화의 온 잠재력, 에너지를 해방시킬 온 가능성에게 열린 길은 오로지 구강구 상부에 이웃하는 국부, 즉 목, 두개, 눈밖에 없었던 것이다. 목소리를, 수많은 표정의 유희를, 그리고 시선을 부여받은 인간 안면의 개화는, 폭소, 눈물, 오열의 형태로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방출할 능력을 지닌 작열만 같아라. 이제껏 항문구에서 움터 타올랐던 모든 폭발력을 가용하여, 볼썽사납고 텅 빈 원숭이의 얼굴에 잇따른 것이어라.
이제 나는 이 모든 설명을 내놓은즉, 송과안이라는 엄청난 가능성을 생각해냈을 적에, 두개의 정점에서 일어나는 — 어떤 원숭이들의 항문 돌출을 바라보는 것을 아주 끔찍하게 만드는 에너지 방출만큼이나 거세고도 격정적인 — 에너지 방출을 설명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말하기에 이르렀다. 당초에는 알지 못하였으나 내 상상은 격렬한 충만감을 동반하는 소름 끼치는 뇌충혈을 낳고 말았다. 내 두개 꼭대기에 올려놓고 싶었던 이 눈이 (이유인즉 안구의 맹아가 마치 나무 씨앗처럼 두개 내부에 있다고 읽은 적이 있었으므로) 나더러는 참혹한 비명을 내지르게 만들면서 저 자신은 덜덜 떨어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감도를 지닌 성기 외 다른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참혹한 비명인즉 어마어마하면서도 악취가 고약한 사정의 비명 말이다. 이 시기적 나의 반응과 착란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번쩍이는 섬광의 표상에 대한 보통 상징적 의미는, 오늘날 송과안에 대한 이 공상을 배변에 대한 환상으로 규정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더군다나 1927년도 초에5 그토록 격정적으로 느꼈던 (그리고 아직껏 나를 날카롭게 찌르는 듯하게만 느껴지는) 것에 대해 여실하게 말하고 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은, 같은 해 칠월의 어느날 런던 동물원에서 보았던 원숭이의 항문 돌출, 그것의 치부, 황홀에 취해 진이 싹 빠져버린 상태로 빠뜨릴 정도로 날 어지럽혔던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글을 쓰면서도, 모종의 불안이 일어나면서, 송과안에 대해 상상하는 것들이 장밋빛 날고기로 되먹은 항문 열매, 만개한, 똥 처발린, 거대한 항문 열매(런던에서 내게 과격한 인상을 남긴 그 항문)을, 내가 목 끝까지 숨차서 악소리를 내지르며 도끼질로 깨부수는 외설스러운 두개, 그 두개가 아닌 모습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섬뜩한 발기, 흥분에 이르고 있다. 도끼날은 도마를 강격하여 가죽이 벗겨진 토끼의 머리를 둘로 쪼개는 백정의 칼처럼 단칼에 상상속 두개에 파고들리라. 인간 존재의 고귀한 부분(인간의 품위, 인간 얼굴의 특징인 고결함)마저 깊이 요동치는 충동의 숭고하고도 규칙적인 조류만이 지나게 두는 대신, 원숭이의 항문 돌출부를 부풀리는 폭발처럼 저속하고도 유혹적으로 작열하는 급폭발을 막아주던 추호의 방벽을 느닷없이 허무리라는 것이, 확실하지 않으니까 :||
- 원고(삭제) :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섬광의 극치에 이른 태양
- OEIL PINÉAL, 松果眼
데카르트가 1649년에 출판한 ≪정념론(Les Passions de l’âme)≫과 사후 1662년에 라틴어, 1664년에 프랑스어로 출판된 미완성작 ≪인간론(L’Homme)≫에 도입된 송과선(glande pinéale) 개념의 패러디. 데카르트의 이분적 체계 속에서 송과선은 이성적 학문의 원리를 매개하지만, 바타유의 송과안은 반(反)이성적 계시 속에서 종교적 엑스터시를 매개하고 있다. - 원고(삭제) : 특히 송과안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 원고(삭제) : 이 기이한 배변으로부터 송과안의 기상천외함을 전망할 수 있을지다.
- 원고(삭제) : 3년 전 1927년도 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