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외양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서로서로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가시적 기호만 조망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인간의 눈에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들은 다양한 대상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연관관계에 대한 지식만을 결정하지 아니하고, 결정적이고 불가사의한 영혼의 어떠한 상태 또한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듯 꽃의 생김새란 진정 식물에서 명확한 한 부분의 존재를 표하고 있다. 다만 이 피상적 결과에서 멈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연 꽃의 생김새는 식생(植生)의 불가사의한 결의를 나타내는바 정신 안에서 지극히 일관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화관의 모양과 색을 드러내는 것, 화분(花粉)의 불결한 모양이나 꽃술의 생기를 누설하는 것을 언어의 도움만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말할 수 없는 현실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무용하며, 상징적 해석에 대한 시도를 덧없는 불합리성마냥 취급하여 아예 거부하는 것 또한 무용하다.
❃
대개 꽃말과 병치되는 것은 우연하고 피상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래 있는 유구한 목록을 살펴보기도 전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민들레가 성장, 수선화가 자기애, 쓴쑥이 쓰라린 고통을 상징한다면, 그 이유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1 분명 이것은 꽃의 숨겨진 의미를 점쳐서 알아내거나 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직관적으로 누구나 다 아는 속성이나 적당한 전설을 생각해 낼 수 있다. 혹자는 여기 문제에 부쳐진 사물에 대한 숨겨진 이해법을 일목요연하게 드러내는 접근법을 헛되이 찾으려 드리라. 매발톱꽃이 우수를 상징한다는 것, 금어초가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 수련이 무심함을 상징한다는 것···.2 이런 것은 별 중요하지 않다. 이런 눈대중의 산물은 언제나 마음대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장미나 유포르비아를 사랑과 연관 짓는 것 같이 지극히 단순한 해석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물론 오로지 이 두 꽃만이 인간의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만일 보다 정확한 연관관계로 표명한다면 (우리가 그리 싱그럽지도 않은 유포르비아에 “나의 마음을 잠에서 깨운 것은 당신이오”라는 꽃말을 붙인다는 것은 꽤 혼란스러운 일이다) 어떤 특정 종보다는 오히려 꽃 일반에 사랑의 현현을 드러낼 수 있는 기묘한 특권을 부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런 해석은 별로 놀랍지 않다. 애초에 사랑이란 꽃의 자연한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상징 작용은 판명한 고유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인간의 감각을 어떤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자극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 테다. 고로 상징 작용에는 완전히 주관적인 가치만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이 꽃의 찬란한 성질을 사랑과 연관 지어온 것은 꽃이 착상에 선행하는 현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정신분석학적 해석 과정에서 상징에 부여된 역할 또한 이러한 원리를 설명할 근거를 확증할 것이다. 꿈에서 일어나는 대체(substitution) 현상의 원천을 설명하는 것은 거진 우연한 연관관계이다. 게 중에서도 뾰족하게 생긴 물체나 내부가 텅 빈 물채에 부여된 의미는 잘 알려져있다.3
이렇게 하면 우리는 고혹적이건 끔찍하게 생겨먹었건 간에 모든 현상 속에서 외형이 중대한 결의를 드러내고, 인간의 결의는 이 결의를 증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쉬이 묵살하고 말게 된다. 그러므로 철학적 분석의 요소 중에서 외양을 단어로 대체할 가능성을 단념하는 것이 맞으리라. 오로지 단어만이 사물에서 상대적인 위치를 결정하는 성질, 즉 우리가 외부적 행동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성질을 허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리라. 그러나 사물의 결정적 가치를 드러내는 것은 외양일 것이다···.
꽃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꽃의 상징적인 의미가 꼭 꽃의 기능에서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만일 우리가 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면, 주로 쓸모 있는 기관보다는 화관이 욕망의 상징으로 되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이에 대해 외양의 객관적 가치를 근거로 하여 그럴싸한 반대 의견을 들 수도 있겠다. 본질적 요소가 병치된 요소로 대체(substitution)되는 것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느낌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알고 있는 것과 온전히 일치한다. 인간이 사랑하는 대상은 결코 기관이 아니다. 오히려 기관을 가진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사랑을 화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쉬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기호가 암술과 수술에서 둘러싸인 꽃잎으로 옮겨가는 것은 인간 정신이 사람과 관련하여서도 이런 전치(déplacement)를 만들어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 두 가지 대체 현상에 명백한 대응 관계가 있더라도, 인간의 광증에 응수하는 기이한 두려움을 실없는 섭리(Providence)에 돌려야만 할 것이다. 어찌 필수 기관 조직에서 꽃으로 대체되는 무의식적인 퍼레이드가 정확한 과정을 거쳐서 찬란한 모습으로 변모하였는지 설명하겠는가?
옛적부터 남자와 여자 간 사랑의 감정을 일깨웠던 꽃의 향기와 외양이 가진 최음 효능을 상기하기는 더욱 쉬울테다. 사람들 사이 웃음이 전염되듯 봄이 되면 자연에선 무언가가 폭발적으로 증식하는 바 있으며, 각각 서로를 야기하고 배가하여 이렇게 일어난다. 인간 사회 안에서 많은 것들이 변화하지만 아리따운 소녀나 장미가 사랑을 상징한다는 자연의 진리에 앞서진 못하리라.
❃
설명할 수 없는 만큼 확고부동한 반향이 소녀와 장미에 서로 아주 다른 성질을 부여하는데, 그것인즉 이상적 미의 성질이다. 아름다운 꽃은 지천으로 널려있고, 아름다운 꽃보다는 아름다운 소녀가 한참 더 귀하며 바로 이것이 식물에 달린 꽃이란 기관의 성질인 것이다. 꽃에 이 늘비하고 보편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추상적인 방법론으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는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가 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꽃이 당위적으로 그러해야만 하는 것에 부합한다는 것, 즉 꽃이 인간적 이상향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므로 이는 흥미로운 일이다.
적어도 언뜻, 전반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사실은 대부분의 꽃은 발달 상태가 보잘것없이 초라하기에 짝이 없으며, 잎사귀와 별 구분할 지점이랄 것도 없다. 게다가 어떤 꽃은 망측하고 추한 모냥이고 이도 저도 아니면 아주 불쾌하게 생겨먹었다. 따라서 장미꽃 안쪽에 있는 것은 외적 아름다움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장미 꽃잎을 다 떼어내면 남는 것은 추하고 더러운 터럭밖에는 없다. 다른 꽃이라면 썩 그럴듯한 모양으로 발달한 수술을 자랑하긴 하지만, 그리고 이 수술이 썩 우아하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다시 일반적인 의미를 상기하면 이 고상하고 우아한 성질이란 실은 악마의 성질이란 것이 드러난다. 이처럼 어떤 난초는 어찌나 추하게 생겼던지 제일로 끔찍한 인간의 성도착을 갖다붙이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꽃을 까발리는 것은 기관 조직의 추한 외양보다는 화관의 연약한 성질이다. 즉 꽃은 인간적 이상향에 대응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 실패를 나타내는 기호에 불과하다. 과연 짧디짧은 광명의 시절이 다 지나고 나면 휘황찬란한 화관은 햇볕 아래 외설스럽게 썩어버리므로 식물이 요란하게 시드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된다. 구린 똥거름에서 돋아, 천사같이 아름답고 시적인 순수로 도약하며 잠깐은 똥거름 처지를 벗어난 듯했으나, 난데없이 원래 있던 진창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 꽃이다. 지고의 이상이 바람에 풍기는 일말의 분변 냄새로 추락한다. 솔직히 말해 꽃은 다 죽어도 미(美)를 잃지 않는 이파리처럼 시들지 않고, 구름 위로 날려 보내줄 듯 했던 줄기 위에서 분을 덕지덕지 칠한 값싼 여자처럼, 우스꽝스런 모냥으로 썩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상연하고 있는 무한한 죽음의 연극에서 드러나는 비희극의 대극 관계란 과장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 추접스러운 투쟁이란 문장을 써서는 나타내보일 수 없고, 잉크 자국으로나 나타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하다. 즉 사랑에선 죽음의 향수가 풍긴다는 이 신물 나리만치 판명한 사실 말이다. 확실히 욕망은 이상적인 미(美)와는 오히려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고, 정확하게 따지면 오로지 음울하고 반듯한 영혼에는 한계요 정언명령에 불과한 이 미(美)를 더럽히고 시들고 퇴색시키기 위해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연유로 가장 아름다운 꽃이란 옛 시인들의 말버릇대로 천사같이 찬란한 이상향을 나타내는 다소 진부한 표현 따위 아니라, 추잡스럽고 요란한 신성모독으로 표상할 것이다.
❃
지금까지 꽃에 적용한 관점을 이파리에 적용하는 것 또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위에서 사용한 해석 방법론을 일관적으로 적용한다면 꽃의 외부 기관은 모호한 부분 하나 없는 상징을 드러낼 것이다. 일반적으로 잎사귀 달린 줄기의 외양은 힘과 위엄을 나타낸다. 덩굴손이 미친 듯 배배 꼬이는 것, 이파리가 찢기는 것은 식생의 반듯하고 고운 성장속에 한결같이 올바른 것이란 없다는 사실을 훤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따금 일반적 인상에 일조하고, 또 진정한 건축적 질서를 드러내는 들판과 삼림의 경관이나 식물에서 제일로 조밀한 부분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 가슴속 고양, 정신의 고양에, 그리고 정의나 올바름 따위 장황한 개념에 일조하는 것은 없다. 그 어떤 불협화음도 – 어떤 멍청한 혹자는 ‘어떤 개소리도(couac)’라고 이르리라 – 식생의 본질이 이루는 결정적인 화음을 방해할 수 없는 것 같다. 꽃 자체가 지상에서 하늘로 향하는 거대한 운동 속에 상실된 채 부차적인 역할로 추락한 데다, 십중팔구는 이해하지 못할 연막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오로지 이 단조로움을 깨부숴버려야만 꽃이 아래서 위로 향하는 일반적인 충동이 만들어내는 불가항력적인 유혹에 일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썩 유쾌한 인상을 깨부수는 데는 지표 아래서 벌레처럼 득실거리고 토 쏠리게 생겨먹은 벌거숭이 뿌리가 나타내는 환상적이고도 불가능한 심상이면 충분하다.
참으로 뿌리는 식물의 가시적인 부분과는 완전히 정반대 것을 나타낸다. 가시적인 부분이 고귀한 모습으로 자라날 때, 추잡스레 생겨먹은 데다 끈적한 뿌리는 흙먼지 속에서 뒹굴고, 마치 이파리가 빛을 사랑하듯 썩은 것들을 흠모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열하다(bas)’라는 단어에 부여된, 반론의 여지 없는 도덕적 가치가 (뿌리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한 체계적인 해석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도 좋다. 악한 것은 필연적으로 고귀한 것에서 저열한 것으로 떨어지는 운동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 현상에 도덕적인 상징을 부여하지 않고서야 진상은 설명할 수 없다. 자연 현상의 가치는 바로 자연의 결정적인 운동을 나타내는 기호인 외양의 경이로운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군다나 줄기와 뿌리의 대극적 관계만큼이나 명명백백한 것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특히 어떤 전설은 땅을 파고드는 기관조직이 항상 표하였던 병적인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만드라고라가 가진 음란한 성질이 개별 상징 해석 대부분처럼 운에 따랐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이 부각되는 성질이 완전히 우연한 것은 아니다. 확연히 음란한 형태에 착안하여 악마적인 성질에 대한 전설을 부여받은 것이다. 당근이나 순무의 상징적 가치 또한 잘 알려져 있다.4
특별히 극적인 의미를 가진 식물의 예외적 부분인 꽃에서 이와 같은 대극 관계를 보여주기가 힘들었을 뿐이다.
❃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 철학자들이 자연에서 비롯하는 형상을 대체하여 통용하는 것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불합리한 수준으로 보일 것이다. 철학자들이 저열함에 대해 말할 때처럼, 본인들이 반감을 품으면서도 자연에서 일어나는 형체 형성에서 빌어온 가치에 시도때도 없이 의지해야만 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리라. 추상화의 전제를 방어하려 드는 것은 맹목일 따름이다. 게다가 이런 대체(substitution)는 너무 지나칠 수가 있다. 일단 자유롭다는 인상, 즉 자기 자신이 어떤 의미로든 간에 해석되도록 놔두어도 된다는 생각을 낳을 것이고, 이런 생각은 절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며, 그다음엔 아직껏 비참한 외면 행위 덕분으로 고결한 것, 고상한 것, 신성한 것···. 이런 것을 낳지 않겠는가. 이 갖은 아름다운 것은, 신성모독을 더 불결하게 만든 운명에 처한 채 기이한 허위 허식으로 추락할 위험에 처해있진 않은가? 그리고 미치광이들과 같은 방에 갇힌 사드 후작의 혼란스러운 행동, 즉 사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미꽃 다발을 대령하라 명하고는 꽃잎을 다 떼버리고 똥물이 넘치는 구덩이로 던져버린 것, 이 여건에선 엄청난 중요성이 있지 않은가?
- 각각 일반적인 시각적 심상, 나르키소스 신화, 화학적 성질로 미루어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꽃말의 예시이다.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나르키소스가 우물에 비친 자기 반영과 사랑에 빠져 익사했으며, 그 자리에 수선화가 자라났다고 전한다. 쓴쑥은 향쑥, 웜우드라고도 불리며, 떫은맛이 있다. 압생트 술의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역주)
- 앞의 예시처럼 일반적인 성질에서 비롯한 꽃말이 아닌 추상적인 꽃말에 해당한다. (역주)
- 이 부분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중 7장에서 간접 인용했다. ‘All elongated objects, such as sticks, tree-trunks and umbrellas (the opening of these last being comparable to an erection) may stand for the male organ [1909]—as well as all long, sharp weapons, such as knives, daggers and pikes [1911]. Another frequent though not entirely intelligible symbol of the same thing is a nail-file—possibly on account of the rubbing up and down. [1909.]—Boxes, cases, chests, cupboards and ovens represent the uterus [1909], and also hollow objects, ships, and vessels of all kinds [1919].—Rooms in dreams are usually women (‘Frauenzimmer’ [see p. 235 n.]); if the various ways in and out of them are represented, this interpretation is scarcely open to doubt [1909].’ Sigmund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Basic Books, 2010), p. 367. (역주)
- 당근과 순무는 모두 남성기를 상징하며, 스페인 사람들은 남성기를 순무에 빗대어 이르고는 한다. (역주)
역자 해제
바타유와 정신분석학의 관계는 액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차지연 선생님께서는 바타유가 정신분석을 ‘의식 저편을 ‘무의식’으로 지시하고, 인간의 정신이 포착할 수 없는 무언가가 현전으로든 부재로든 존재한다는 것과 거기에 닿아보려 하는 방법적 시도’인 (차지연 2018, 231) 한에서 수용하였으며, 정신분석이 학문의 내부, ‘로고스’의 내부로 들어오는 한에서는 거부하였다고 정리하고 있다. 우리는 <꽃말>에서 같은 경향을 찾을 수 있다. 바타유가 <꽃말>에서 찾으려고 들었던 것은 전문 학자가 펜으로 쓴 ‘문장’이 아니라 ‘잉크 자국’이다. 이것인즉 판명하고 합리적인 설명을 거부하는 신비한 체험이다. <꽃말>에서 바타유는 정신분석학의 용어인 전치(deplacement)나 대체(substitution) 등을 활용한다. 또한 ≪꿈의 해석≫을 간접적으로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바타유의 목표는 정신분석학적 상징 해석 방법을 통해 꽃의 상징을 의식에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바타유는 이런 전치나 대체가 분명히 일어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현상 뒤에 있는 원리는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꽃말>에서 바타유에게 유일한 권위가 되는 것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외양이지 단어나 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눈 이야기≫에서 계란-고환-눈으로 이어지는 사물의 연결고리는 그 음성기호에 (œufs-yeux) 관련있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희고 말랑한 사물의 외형인 것이다.
「꽃말」에서 바타유가 반박하는 주장은 주로 다음 세 가지에 해당한다.
- 꽃말은 꽃의 결정적 의미를 나타낸다.
- 꽃은 이상적 미와 사랑을 나타낸다.
- 도덕 가치의 원천은 말과 논리이다.
여기서 1번은 상징 작용의 정태적 이성적 원리를 거부하는 신비주의적 태도로, 2번과 3번은 정언명령의 거부라는 동일한 맥락으로 요약된다. 반면 바타유가 주장하는 바는 궁극적으로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랑에서는 죽음의 향수가 풍긴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꽃말>은 정신분석학에 대한 태도에 한해서 <파시즘의 심리구조>나 <유물론>보다는 <태양 항문>의 신비주의에 가까운 저작이다. 그리고 바타유가 어느 지점에서 정신분석학을 거부하는지 미리 예고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랑이란 꽃의 자연한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상징 작용은 판명한 고유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지 인간의 감각을 어떤 불가사의한 방식으로 자극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고로 상징 작용에는 완전히 주관적인 가치만이 있을 것이다.
정리하면 이 대목에서 바타유는 사랑이 꽃의 자연(自然)한 기능이라고 한다면 상징 작용(꽃말)은 사랑의 부차적 의미, 즉 주관적인 의미만 지닌다고 이르고 있다. 이는 정신분석학이 환자의 상징에 부여하는 의미와 상동하다고 할 수 있다.
Often enough a symbol has to be interpreted in its propermeaning and not symbolically; while on other occasions a dreamer may derive from his private memories the power to employ as sexual symbols all kinds of things which are not ordinarily employed as such. If a dreamer has a choice open to him between a number of symbols, he will decide in favour of the one which is connected in its subject-matter with the rest of the material of his thoughts—which, that is to say, has individual grounds for its acceptance in addition to the typical ones. [1909; last sentence 1914.]
Sigmund Freud, The Interpretation of Dreams (Basic Books, 2010), p. 366.
즉 꽃과 사랑의 관계가 ‘[상징의] 착상에 선행하는 현상’이라면, 정신분석학의 견해대로 ‘대체 현상의 원천을 설명하는 것은 거진 우연한 연관관계’에 한정될 것이다. 그런데 바타유에게 꽃의 가치란 불가사의하면서도 결정적인 것이므로 이 우연성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외형이 중대한 결의를 드러내고, 인간의 결의는 이 결의를 증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은 묵살되고 만다.
물론 사람의 정신은 언제나 이런 대체와 전치 현상을 일으킬 수 있고, 따라서 꽃말을 만드는 다소 짧은 전통이 그러하듯 ‘사랑을 화관으로 대체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법칙으로] 쉬이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이 두 가지 대체 현상에 명백한 대응관계가 있더라도, 인간의 광증에 응수하는 기이한 두려움을 실없는 섭리에 돌려야만 할 것이다.
여기 대문자 P로 기재된 섭리(Providence)는 바타유가 끝까지 거부하였던 이성적 학문의 원리가 아닌가. <꽃말>은 욕망의 언어로 쓰여있다. 즉 표본을 관찰하는데 만족하는 박물학자의 언어가 아니라 이성의 옷을 벗겨 진창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색정자의 탐미적 언어로 쓰여있다는 말이다.
끝으로 번역 교정에 큰 도움을 주신 한국외대 박찬빈 군에게 감사의 말을 올린다.
김도윤
도퀴망 잡지에 딸린 영어 보충문
The principle that natural forms provide us with certain data is established. Therefore flowers signify love, in accordance with the explanation given by the language of flowers, as for example, in the case of the rose or the euphorbia. This means that the phenomenon suggested by the aspect of the flower is similar to the one we have in our minds, when speaking of loving passions, just as one burst of laughter is similar to another burst of laughter; it is true that the sight and perfume of flowers awaken love, just as a burst of laughter calls forth or renders more prolonged another. In neither of these cases is it possible to give a real explanation; all that can be done is to suggest a vague word like contagion.
We might argue that a sufficient explanatio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flowers and love is that the former are destined to procreate. However it is not the organs of generation, but the useless corolla, which is the living symbol of this relationship. There is therefore no reason to consider this interpretation as subjective.
The general opinion that there is an indefectible relationship between flowers and beauty is also inexplicable and yet of objective value. Flowers therefore would have an ideal value, they would be strictly in harmony with what should be, if no other elements but the corolla had to be taken into consideration. The pistil and the stamens often form within the flower a villous and sordid spot or, in cases where they are exceptionally developed, give to it an equivocal appearance, which is suggestive of human vices. The rapid fading of flowers, which in so blatant a manner is exposed at the end of their stems, is equivalent to a striking failure; we might speak of the sacrilege of the corolla, which in a provoking fashion, changes into a fragment of aerial dung.
This is all the more surprising as, generally speaking, the upper part of the plant (if we always adhere to resemblances in keeping with common sense) may be considered as the sign of peace of the heart and the nobleness of the mind; it may be said the sight of fields and forests actively contributes to the development of ideas of justice and rectitude. The roots, on the contrary, the lower parts of the plant, are of a low character; they wallow basely beneath the soil, for they love that which is rotten as much as leaves love the light. The legend of the mandrake, the symbolic meaning of the carrot and of the turnip corroborate the interpretation, according to which the roots are symbolical of an obscure inclination towards chaos and crime. In this way a definition is given of the opposition between the blossoming and the fading of a flower, as exemplified by its evolution.
Although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the value of such interpretation (which can be methodically established) attention is drawn to the interest there would be in substituting aspects for abstractions, when submitting moral values to a philosophical analysis. (It may be said that only aspects are concrete.) The necessity of such a substitution has already been illustrated by the fact that philosophers (moreover in spite of themselves) have always had recourse to terms expressing aspects such as high, low, pure etc. without mentioning the value they have unconsciously been obliged to give to the general opposition between night and day.
According to the article of Georges BATAILLE
▲(1)아소르스 지방에서 자라는 아조리나 (CAMPANULA VIDALII). 6배 확대. 꽃잎이 떼어진 상태다.
(2)악마적인 순무의 덩굴손 (BRYONIA ALBA). 5배 확대.
(3)말총머리 (EQUISETUM HIEMALE). 겨울생. 20배 확대.
(4)보리 이삭 (HORDEUM DISTICHUM). 3배 확대.
(5)청나래고사리 (BLECHNUM SPICANTE). 12배 확대.
사진 — 카를 블라스펠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