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자 서문
조르주 바타유는 1933년 여름에 ≪희생≫을 썼다. ≪희생≫은 1934년(?) 잔 부셰 갤러리에서 앙드레 마송의 동판화와 함께 전시되었고, 두 차례 출판이 불발된 후 G.L.M. 사에서 1936년에 150권 한정으로 발간되었다. 이 간행본은 앙드레 마송이 그린 판화 5점을 동봉하고 있다.
연구자들은 이 산문의 첫 문장이 데카르트의 패러디라고 이르고 있다(Je pense, donc j’existe). 이는 이 산문이 일종의 성찰, 즉 명상(méditation)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볼드채로 처리된 부분은 1936년 간행물에는 없는 것으로 전집 편집자가 원고에서 참고하여 달아놓았다.
김도윤
I
나(Moi), 나는 존재한다 — 체현된 공허 속에 그친 채 — 나 자신의 불안에서 떨어져 그친 채 — 다른 모든 존재와 다르므로, 다른 모든 것들에게 닿지만 나에게는 닿지 못하는 수많은 사건들이 잔악하게도 이 나를 총체적 존재 바깥으로 던져버린다. 다만 동시에 나는 — 한 남성과 한 여성의 탄생과 결합에 의지하였고, 그 뒤에는 그 둘이 결합하는 순간에 의지하여 — 내가 세상으로 현현하였던 것을 떠올려 본다. 자아(moi)의 가능성과 관련하여서 실로 독별한 순간이 존재한다 — 고로 이렇게도 내가 세상으로 현현하였던 것이 한없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나로 귀결하는 연속적 사건의 경과 중에 작은 차이 하나라도 생겨났다면, 이 나의 위치에 완전히 내가 되기를 갈구하는, ‘타인’이 존재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체현된 장대한 공허는 이 무한한 불가능성이요, 이 공허를 통하여 나의 존재, 즉 절대적인 존재가 자행한다. 왜냐하면 이 장대한 공허 위에 그친 단순한 존재마저 주권의 행사에 비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공허 자체가 내가 존재하기를, 나와 이 나의 불안이 존재하기를 주문(注文)하듯. 고로 무(無)의 직접적 주문이란 분화되지 않은 존재가 아니라, 독별한 나의 고통스러운 불가능성을 수반할 것이다.
바로 이 나의 구조와 다른 나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점에 대한 경험론적 지식은 이미 내가 주권을 행사하는 이 공허 속에서 불합리한 것으로 바뀌어버렸다. 내가 나로서 존재함인 나의 본질 자체가 그 어떤 존재로도 대체할 수 없음으로써 성립하기 때문이다. 세상으로의 내 현현이 갖는 완전한 불가능성은 명령법으로 완전한 이질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더구나 (지식의 모든 대상 중 일부로 가정된1) 나의 형성에 대한 연대기적 표상과 이 표상의 절대적, 객관적 양태는 사라진다. 그리고 내가 그 위에 떠 있는 이 공허에 대하여 나의 주권이 갖는 폭력적인 힘과 야욕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서 존재함인 나는, 옥에 떨어져서도, 선재하는 것, 내 주변을 에워싸는 모든 것을, 그것이 생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든 단순한 존재로 있는 것이든 간에 관계없이, 제 의지대로 현현하노라. 마치 공허가 불안에 찬 자기 주권에 굴복하듯.
이 계시가 부정확하라 요구하는 가능한, 필연한 관점을 가정한다고 해도 (이 가정이란 표상을 향한 호소가 수반하는 것이다) 세계 속에서 나의 절대적 현존이 실제로 체험한 무매개적인 현실을 조금도 까뭉개지 못한다. 이 실제 체험은 불가피한 시점을 이루는 것 만큼이나 존재 운동의 야욕이 주문하는 존재의 방향을 이루는 것이다.
II
대극적인 표상 사이 선택은 존재하는 것의 문제에 관한 불가사의한 해결책과 연관 지어져야만 한다. 그 문제란 “무엇이 겉모습의 형태로부터 자유로운 근본 존재로써 존재하는가?” 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경우 마치 “무엇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절대적인 위치에서 명령하는가?” (도덕적인 가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 것처럼, 깊은 생각 없이 성급한 답변이 나오고 만다. 다른 경우 — 철학이 대상을 잃어버릴 때 — 나타나는 답변도 이것만큼이나 성급하고, 몰이해한 채 문제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만일 물체가2 근본 존재로 표상되는 것이라면 말이다.
한편에는 이로부터 근본 존재에 대한 모든 긍정 판단의 의미를 근본적인 가치 판단과 구분할 수 없다고 — 그 너머에선 의심 자체가 다른 가능성과 함께 사라지는, 상대적으로 명징한, 주어진 한계 내에서 — 이해하는 수도 있겠다. 반면 생각은 나(가치)를 근본 존재와 헷갈리지 않고서도, 더구나 이미 도처에 깔렸으나 한눈엔 잘 보이지 않는 현실의 구조 내에 이것을 끼워 맞추지 않고서도, 나를 모든 가치의 기반으로 구성해낼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 구성 원리의 불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이질적인 나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탐구 과정 속에서 비존재의 독단적이나 뛰어난 이미지로써 거부되었다. 마치 삶의 극단적인 주문에 응답하는 환영처럼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존재하는 것’ 바깥에 놓인 궁지로, 이 바깥에서 내가 어디도 내뺄 곳 없이 삶의 온 극단적인 가치와 재결합하고, 내가 현실에 있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현실을 초월하므로, 그 어떤 차원에서도 이 현실의 것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현실에의 현현으로 실현된 불가능성에 대한 지각을 버리는 한, 그리고 이 현실과의 근본적인 관계 부재를 버리는 한, 나는 쇠락하게 되는 것이다(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이다)(내가 명징하게 알려지는 한 — 물체의 상관성과 선후관계에 따른 계기(繼起)로 나타나는 한 — 세상은, 존재하는 것의 완전한 개발이요 전개와 같이 참으로 필연적이거나 가능하도록 보여야만 한다).
자각의 개별적 요소가 (전율하는 나의 영상에 흡수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자의적 질서 속에서, 철학이 논리적인 구조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림으로써 마침내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되어 있는 (그러나 동시에 궁극적 불가능성에 대한 매개념에 불과한) 관계의 표상에 도달하는 한, 눈물 흘리는 나, 내지 불안에 찬 나를 표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표상은 고통스럽고 음란한 결의의 경우, 자기와도 다르고 모든 타자와도 유별한 나를 향하여도 똑같이 투사될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나는 세상 바깥으로 내가 떨어져 나감에 대한 고통스러운 지각을 한없이 증대하노라. 하나 무한히 자유로우며 ‘존재하는 것’을 초월하는 나의 본질 자체를 이루는 파열은 오로지 죽음의 한계에서야 폭력적인 힘과 함께 드러나니라.
죽음의 당도에 앞서 ‘추상적인 나’ 와는 완전히 다른 나의 구조가 나타난다(앞선 것은 뒤의 것이 그러하듯 모든 이분법적 한계에 반발하는 능동적 사고를 통해서가 아니라, 미리 자신의 대상에 형태를 부여하는 논리적 탐구를 통해 구해진다). 동일하게 나의 고유한 구조는, 현실에 종속된 활동으로 말미암아 유폐되었으며, ‘존재하는 것’의 논리적인 외면 속에 약화되어버린 개인적 존재의 순간과는 다르다. 나는 오로지 ‘죽는 나’의 형태 하에서야 절대적 초월과 특수성에 이른다.
하나 이 죽는 나의 계시는 단순한 죽음이 불안3 속에서 드러나듯 매 순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시는 내가 비현실적인 죽음의 시간에 투사될 때 나타나는 절대적인 실현과 존재의 주권을 주문한다. 동시에 계시는 순수한 유혹과 나의 영웅적 형태의 결과인, 절대적인 삶의 끝없는 파괴에 대한 주문을 전제한다. 따라서 계시는 죽는 신으로부터 비롯하는 고통스러운 전복에 이른다.
신죽음은 (존재의 공통 척도를 지탱하는) 형이상학적인 변화가 아니라 절대적인 환희의 격정적 생명이 죽음의 육중한 동물성으로4 흡수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찢겨나간 몸의 비천한 외관이 삶이 그리로 침강하는5 추의 절대성에 화답한다.
자유로운 신성의 본질에 대한 계시 앞에서, (이를테면 꿈이나 놀이의 특수한 형태로 주어지는) 생명의 야욕이 죽음을 향해 갖는 끈덕진 방향성은 더 이상 소멸을 향한 욕구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나의 존재가 갖는 순수한 야욕으로 나타난다. 죽음이나 공허는 — 죽음과 공허의 파멸 자체를 통해 — 혼미감으로 표상되어야만 하는 나의 주권이 제자신을 무한히 일으켜 세우는 영역에 불과하므로. 이 나와 주권은 나와 주권이 가진 절망적인 본질의 순수성에 이르므로 죽는 나의 순수한 희망을 현현한다. 이는 꿈의 경계를 모든 이해 가능한 한계 너머로 밀어붙이는 술취한6 인간의 희망이다.
동시에 신의 사랑으로 가득 찬 그늘이, 헛된 징후이듯 아니라, 세상 부분 부분의 상호 의존 위에 이루어진, 부정된 세상에 대한 의존이듯, 사라지노라.
이것이 바로, 신의 무조건적인 존재를 마치 자아를 비집고 나오는 황홀경인양 지고한 대상인양 상정하였던, 사랑에서 모든 전제조건을 지워버리고자 하는 의지이다. 하지만 신권 — 정치적 권위의 본원 — 의 반대 조건은 정동적인 움직임을 탄압당한 존재들의 속박과 도덕 법칙으로 귀결한다. 신권에 의해 정동의 움직임은 다시 현실에 종속된 삶의 비굴함으로 내던져지고, 바로 이곳에서 나로서의 내가 쇠퇴한다.
신인(神人)이, 삶이란 오로지 죽는 나의 양태로 이 세상에 현현하는 존재일 적에만 야욕에 회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지고한 인간의 부패이고 또 그에 대한 속죄이듯 현현하고 죽을 적에, 신인은 이 나의 순수한 절대성을 저버린다. 신인은 현실에 종속된 신의 (도덕)명령에 나를 바치고, 따라서 나를 마치 타자를 위한, 신을 위한, 도덕을 위한 존재로, 또 이러한 존재만을 대자적 존재(pour soi)로 표명하는 것이다.
혼돈은, 이상적으로 찬란하고도 공허한 무한 속에, 혼돈의 부재를 탄로낼 정도로 초조하고 두려운 생명의 상실을 열어젖힌다. 하나 생명은 —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끄트머리에서7 — 이 공허한 무한을 위해 자멸할 뿐이구나. 나는 나를 순수 절대성으로 일으켜 세우고, 벽도 바닥도 없는 심연을 위해 살고 또 죽는다. 이러한 절대성이 존재의 가장 기이한 갈래서 ‘개처럼 죽는 것’ 마냥 생겨나고. 절대성이란 온 세상에 예속됨을 여의는 것일지다.
삶과 죽음이 맹렬히 공허의 침하에 바쳐졌다는 이 사실에 비롯하여, 이제 노예와 주인의 예속적인 관계가 현상하지 않고, 종말의 전율하는 움직임 속에서 삶과 공허가 마치 몸을 섞는 연인처럼 서로를 섞고 뒤얽는다. 불타는 정열은 더이상 무(無)의 수응도 체현도 아니다. 무라 부르는 것은 송장이요, 빛이라 부르는 것은 흐르다 응고하는 혈(血)이다.
자유를 얻은 기관들의 음란한 본질이8 서로를 껴안는 연인들을 욕정으로 더욱더 끈끈하게 연결하듯, 마치 그렇듯 곁에 뉘인 송장에 대한 공포, 또 낭자한 혈흔에 대한 공포가, 죽는 나를 무한한 공허와 더욱더 불가사의하게 엮어간다. 그리고 이 공허한 무한 자체가 송장이듯 피이듯 투영되노라.
III
철학이 인간의 다른 공통 결의처럼 결의를 무릅쓰고야만 (처박힌 송장9 마냥) 다다를 수 있는, 존재의 궁극적인 영역에 대한, 이 성급하고 아직은 혼란으로 가득한 계시 속에서, 나의 야욕적인 전복이 환영을 자기 본질에 대한 적법한 설명으로 받아들였을 때마저 존재의 근본 문제는 보류되었다. 종교심이 그 형태를 지어주었을 모든 신비주의가, 즉 모든 고유한 계시가 이런 식으로 거부당했다. 이처럼 생명의 절대적인 야욕은, 자신의 영역으로는 논리적으로 직조된 외양이라는 비좁은 공간을 받아들이길 거부하면서, 야욕적인 승천의 정상에서 일어나는 무명의 죽음밖에는, 대상으로써는 황량한 암야를 누비는 이 죽음의 반영밖에는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십자가 앞 기독교인의 묵상은 더이상 단순한 적대성으로 거부된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의 백병전 치르듯 한 포옹을 주문하였던 완전한 적대성으로 수용되었다. 따라서 묵상은 나의 죽음으로, 경건한 숭배가 아닌 잔인한 황홀경의 야욕으로, 홀로 순수한 절대성의 야욕에 이르는 맹목적인 광기의10 폭발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이고 또 체험되어야만 한다.
황홀경의 한가운데서, 십자가 위의 죽음과 맹목적으로 체험된 라마 사박다니의 한계서, 빛과 그림자의 혼돈 속에서, 비로소 대상이 파멸의 얼굴을 드리운다. 하나 신도 아니요 무(無)도 아니요 자기 밖으로 아니고서야 제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사랑이, 찢겨나가는 존재의 비명을 내지르기 위해 요구하는 대상이라.
대상이 파멸이 되는 이 영역에서 생각은 생각을 혼미하고도 무한한 추락으로 만들어버리는 소멸을 경험한다. 따라서 생각이 파멸을 대상으로 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생각의 구조 자체가 파멸이 된다. 생각 자체가 무로의 흡수이다. 생각 자체가 무로의 흡수를 견뎌내고 또 한시에 달아난다. 엄청나게 거대한 무언가가 폭포수의 힘과 규모로 모든 부분으로부터 벗어나고, 무한의 비현실적 영역에서 솟아오르나, 게서 이해할 수 없는 힘의 약동 속으로 침몰한다. 포개어지는 대열의 굉음 속에 돌연 목을 베는 거울은 — 가차 없으나 — 앞서 다 소멸한 이 절대적 경험의 표현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시간은 영원속에 존재하는 매 순간 속에, 영원성마냥 움켜질 수 있는 매 연쇄작용 속에 유폐된 것으로 보인다 — 실질적으로 무화(無化)된 것으로 보인다. 구조 내부에 새길 수 있는 매 운동이 측정과 균등한 체계로 흡수된 시간을 무화한다. 따라서 시간은 잠재적으로 역행할 수 있는 것이 되었으므로 쇠약해져 가고, 시간과 함께 모든 존재가 쇠약해져 간다.
하지만 — 거대한 비명과 함께 내쉬어진 모든 존재를 흡수하는 — 격렬한 사랑에게, 시간을 결박하던 사슬을 끊는 전율의 장인 파멸 아닌 다른 지평이 없다.
파멸 — 체험된 시간 — 은 마치 황홀경처럼, 늙은이의 형태가 아닌 낫을 든 해골의 모습으로, 이빨에 참수된 머리의 입술이 붙은 빛나는 유리 해골로 표상되어야만 한다. 파멸은 완전한 붕괴이긴 하나 절대적 순수성으로 이루어지는 창칼에 비롯한 붕괴이다.
파멸은 근본까지도 파고들고 침식하므로 주권 자체를 정화한다. 시간의 절대적 순수성은 황금 보자기 뒤에, 삼중관 뒤에, 가면 뒤에 해골을 숨긴 신을 배격한다. 신성의 가면과 신성의 우아함은 섭리라고 앞세우는 정치 억압의 지배처럼 현실에의 종속을 명령형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다만 신의 사랑 속에 잔인한 해골의 차가운 미광을 무한히 감출 뿐이다.
혁명 — 사랑의 황홀경으로 말미암아 부패한 얼굴 — 은 신의 순진한 가면을 벗겨내고, 따라서 시간의 붕괴 속에 억압이 함께 붕괴한다. 파멸로 말미암아 밤하늘의 지평선이 불타고, 찢겨나간 존재가 황홀경에 든다 — 이야말로 혁명이다. 파멸은 모든 사슬로부터 해방된 시간이요, 순수 변화이며, 번데기를 비집고 나오듯 송장을 비집고 나오고, 잔인하게 죽음의 비현실적 존재를 체험하는 해골이다.
IV
고로 황홀경의 대상으로써 시간의 본질은 죽는 나의 황홀한 본질과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양쪽이 순수한 변화요 환영의 존재 위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다만 만일 야욕적이고 끈질긴 “무엇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직도 생명으로 약동하는 생각의 거대한 무질서를, 죽는 나의 양태를, 시간의 파멸을 관통한다면, 그때 “시간은 무한한 공허일 뿐이 아닌가?” 하는 대답의 의미란 무엇이겠는가? 아니면 시간 속에 있는 존재를 거부하는 다른 모든 대답의 의미란 무엇이겠는가?
아니면 “존재는 시간이다.” 하는 반대되는 대답의 의미란 무엇이겠는가?
시간의 존재에 관한 문제는 구조의 협의적 체현에 한계 지어진 구조보다는 지각 가능한 모든 형태의 총체를 아우르는 무질서 속에서 더 자명히 구명될 수 있는 것이다. 맨 먼저, 대극적 관계의 변증법적 전개를 향한 노력은, 그것이 곧 모든 문제의 촌열하는 결과를 피하는 허영심인 한 제외해야 한다.
만일 존재와 무가 시간 속에서 구해지는 것, 자의적으로 분리된 개념에 불과하다면, 시간은 존재와 무의 정반합이 아니다. 사실상 완전히 개별적인 존재도 없고 완전히 개별적인 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시간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시간의 존재를 증언한다는 것은 텅 빈 주장이다. 그런 주장이란 시간의 본질을 존재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존재의 성질을 시간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그런 주장이란 존재의 개념에서 애매모호하고 한계 없는 내용물을 비워내는 동시에 모든 내용물을 끊임없이 비워내고 마는 것이다.
시간의 존재는 시간의 객관적인 위치조차도 요하지 않는다. 황홀경 속에 주어진 이 존재는, 오로지 오성이 가치이자 정지 대상으로 간주하려 하였던 대상의 실종과 붕괴를 의미할 뿐이다. 대상의 영역 내부로 자의적으로 투영된 시간의 존재는, 오로지 이 영역 안에 세워진 것을 무너뜨리는 대파멸의 황홀한 영상일 뿐이다. 대상의 영역이, 마치 시간 자체에 의해 무한히 파멸하는 내가 그러하듯,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이루어진 존재가 갑자기 거기에 때부서진 채 불쑥 나타나니까, 그리고 사물들의 존재가 나의 존재와 비교해서야 한없이 빈곤한 것으로 보이니까.
사물의 존재는, 사형을 받아들일 준비에 — 가당찮은 그림자를 투영하며11 — 사형을 받아들일 준비가 나에게 갖는 가치를 떠멘다. 사물의 존재는 사형이 갖고오는 죽음을 덮을 수 없으나, 그 자체 자기를 뒤덮는 죽음 속으로 투영된다.
따라서 (나의 구조일 뿐 아니고 음란 황홀경의 대상에 해당하는) 나와 시간의 환영적인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은, 환영이 근본 존재하는 사물에 따른 판단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 존재가 그것을 뒤덮는 환영으로 투영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이름하에 나인 존재, 그리고 이 존재가 세상으로 — 온통 별로12 가득 찬 우주를 가로질러 — 현현함이란 무한히 불가능한 것이었으나, 바로 이 근본적인 불가능성 덕분에 (이 불가능성은 현실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현실의 구조를 배격하는 것이다) 사물 총체의 세계를 뒤덮는다. 나를 살해하고 이 세상으로부터 나를 해방하는 죽음이 죽는 나의 비현실성으로 이 현실 세계를 뒤덮고 말았노라.13
- 원고 : ‘가정된’ 으로 번역된 ‘considéré’가 여성형 과거분사인 ‘considérée’ 로 되어 있다. 형성(la formation)을 수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 MATIÈRE
불어 단어 ‘matière’ 는 ‘물질’, ‘질료’, ‘육체’, ‘재료’, ‘원인’, ‘이유’, ‘동기’, ‘사실’ 등 여러 뜻을 갖고 있다. - 원고 : 최후의 불안
- 원고 : 육중한 동물성과 피의 진창으로
- 원고 : 끈적한 구덩이 밑바닥으로 억눌리듯 침강하는
- 원고 : 이상에(idéalement) 취한
- 원고 : 마지막 헐떡임을 내뱉는 그 끄트머리에서
- 원고 : 천박한 본질이
- 원고 : 진창에 처박힌 송장
- 원고 : 추잡스럽고 또 눈물흘리는 맹목적인 광기의
- 원고 : 우울한 공허를 투영하며
- 원고 : 거성으로
- 원고 : ‘1933년 여름’이라고 쓰여있다.
▲1936년 출판본에 포함된 앙드레 마송의 드라이포인트 판화 (왼쪽 위부터)
1. 미노타우르스 . 2. 오르페우스 . 3. 십자가형 . 4. 미노타우르스 . 5. 오시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