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敎正典

이교도적 부정신학


I

번역에 대하여


II

닉 랜드

소멸 갈증


참조 부호


서문


1

말 되는 철학의 죽음


3

위반


4

부활절


5

죽어버린 신


6

질투하는 시간의 분노


/

11

끊나지 않는 소통


참고문헌


조르주 바타유

제쥐브


2

송과안


3

희생


4

≪도퀴망≫

꽃말


5

엄지발가락


6

자연의 일탈


8

희생제의적 신체 절단과 반 고흐의 잘린 귀


9

≪비평 사전≫

건축


10

유물론


11


12

먼지


13

도살장


14

비정형


15


17

칼리


18

≪철학 연구≫

미궁


19

≪사회학 학회≫

사회학 학회 창간사


20

범국제적 위기에 대한 선언


22

≪아세팔≫

신성 모의


23

니체와 파쇼들


24

제안


25

≪예술 연구지≫

신성


28

앙토냉 아르토

부록

ASSIMILARE

서문


여러분들께서는 마치 나보다 더 우월하시다는 확신이라도 얻고 싶으시단 양, 시도 때도 없이 내가 ‘파괴욕’을 갖고 있다고 칭하시며 그것을 꼬투리 잡아 나를 면박하였소 [TE 113].

책을 쓰는 이유는 한 사람의 존재와 동류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바꾸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할 것이다. 이 관계를 도무지 용납할 수도 없고, 해봤자 지긋지긋한 궁색에 불과하다는 판단이 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궁색을 줄줄이 늘어놓겠다는 것을 참고 단념하려고 한들 나로서는 그럴 힘도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쓰는 동안 명쾌히 의식하고 있었다. 일정한 한계 내에서 사람으로서 상투성을 벗어나 순전히 투명한 대화를 나누겠다는 욕망은 소멸에의 욕망으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II 143].

나를 땅바닥에 내리꽂아 줄 무언가를 여느 때나 무의식적으로 바랐건만, 결국 바닥마저 벽에 불과하구나.

작가에게 최고로 걸맞은 것은 바로 작품에 대한 변론으로 서문을 쓰는 것, 그 작품을 쓰게 만든 급선무라도 있었던 양 필요라는 겉치장을 입히는 것이다. 작가라면 자기가 쓴 책을 조금이라도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보이라는 것이 최소한의 요구 사항일 것 같아 보이리라. 하나 그런 요구 앞에서 나는 무너져 내린다. 제로(zero)를 힘없이 움켜쥐고서 순수 과잉에서 길어낸 것이 이 글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쓸모 있는 것,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단 한 문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아이러니로 점철된 반 불구의 아성뿐. ‘바타유’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들은 죄다 허세와 농담거리 사이에서 몸서리치고 있다. 바타유. 나는 이 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이의 집착은 나를 어지럽히고, 그이의 무지에 나는 참 멍해지고 만다. 바타유의 생각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바타유의 글에 가득한 상처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없는 나의 무능을 하릴없이 베어내고 있다. 이에 대한 나의 반응은 중얼대는 것, 불안증에 저항하기 위해 말에 미치는 것. 내가 뱉어낸 공허한 헛소리와 한 방에 갇힌 채로… 그래도 그것보다는 나을 것이고…(지금조차도 나는 거짓말하노라)…

사실 바타유에게는 학문적 범주보다는 성적인 범주나 종교적 범주가 훨씬 어울리는 것 같다. 우리가 모두 무력한 자살로 나아가는 여정에 동행하고 있지만, 바타유는 이것을 횡단하고 있으니까. 바타유가 쓴 글을 수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엉뚱하다. 우리는 비정상적으로 흥분하기도 하고 질겁하기도 하지만, 도망칠 곳은 없다. 어쩌면 구토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이 같은 멜로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금방 즐거워지곤 하노라 (한데도 우리는 여전히 죽어버릴 맹키로 토악질하고 있구나).

그래서 조르주 바타유가 쓴 작품에 대해 그럴싸한 책을 쓰는 것이 비교적 직관적인 일이었으리라고 자기 설득을 해보려 노력했다. 바타유가 20세기 프랑스 철학과 문학에 기여한 바를 다루는 그런 책, ‘일반 경제’, ‘저열한 유물론’, ‘무신학(無神學)’ 따위 바타유의 사상을 해설하는 그런 책, 바타유가 사용하는 다양한 산문체며 그의 시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찬미하는 그런 책, 바타유의 작품이란 진지한 태도로 독해해야만 한다고, 학계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끝에는 신중한 평가가 요구된다고 말하는 그런 책 — 내가 판단하기로 이런 책은 나쁜(schlecht) 책이다. 이런 책은 하나같이 영 음울하다. 그런데 조르주 바타유의 경우에는 사태가 한참 더 심각해서, 작금의 니체 학술 연구를 아우르는 순수 외설물과 수준이 비슷하다. 바타유에 대해 어떤 책을 쓰는 데 있어 성공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 왜냐하면 접촉과 침투가, 바타유가 ‘교통’이라고 부르는 무자아의 정교(情交)가 — 한계 끝에서 — 일어나는 것은 실패라는 갈라진 틈 사이로 열린 뒤틀린 공간 속에서나 가능하니까. 바타유의 글이 갖고 있는 의미를 수복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도탄에 처박는 지름길이다. 니체에게 안락을 구하는 행위가 한심스러운 만큼, 바타유에게 교양을 구하는 행위도 참으로 한심스럽다(아무려나 바타유는 자기의 위선에 대해서 나보다도 은근히 더 직설적이다).

자본의 문화 기계가 바타유를 속 편히 소화할 수 있도록 간을 치고 양념을 한다는 것, 이것은 분명히 바타유도 넙죽 수긍했을 매음업이로다. 달콤한 추태여! 우리가 발을 넓힐 수 있게 도와주려고 했던 작가가, 다른 작가들과 함께 정보 자산 보유고에 처박혀 서구 학문의 경력 사창에 매음 당할 처지에 놓여 있다. 예컨대 이미 북아메리카에는 ‘바타유 대 마르크스’라며 옹알거리는 자들이 있다. 사실 이렇게 공허한 이념 문제가 거론되는 경우는 많이 없다만. 이런 것보다는 은근슬쩍 퍼져나가는 ‘바타유는 사서였으니까’ 식의 바타유가 더 문제다. 로고스 중심주의, 서양 형이상학, 다종다양의 존재 망각에 대하여 끝없는 주석을 쏟아내고 있는 싸구려 해체주의 팔이 산업에 이 바타유는 휘말리고 말았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바타유. 뭔가 썩 기발한 것을 말하려고 했던 바타유. 학식 측면에서 바타유는 찬송받을 만도 하고 비난받을 만도 하지만, 병증을 여행하는 방랑자 바타유의 거룩함에 비한다면 찬송과 비난 따위가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책이란 숨기에 딱 좋은 굴이고, 도서관만큼이나 소소한 도피의 향취가 묻은 곳은 없다. 소설책, 역사책, 지리책이 쌓여 있는 책장, 현실을 벗어날 구실이 된 책들이 까마득한 몽상과 어우러질 순간을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이 책이라고 해서 특별히 항변할 것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금단증자가 무릎으로 기어가듯 이 땅 위에 제일루 황량한 시궁창에서 바늘 찾아 헤매며, 학계께서는 본서를 부디 더욱더 박해하시고 사창굴 깊숙이 처넣어주시라고 애걸복걸한 것에 불과하노라. 인간으로써의 소중한 정체성마저 리비도 경제의 회로 속에서 일말의 노동력을 거래하기 위한 브랜드 라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론적으로도 확실시되었을 때부터, 저자라는 연극의 자취는 조금씩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다. ‘아무개’가 바타유에 대한 생각을 하고, 지식을 갖고 있고, 이론을 정립한다고 해서 누가 신경이나 쓰던가? 다뤄야 할 것은 글의 잿불과 함께 우리에게로 밀려오는 거센 충격파뿐인데… 그것도 여전히 무언가가 우리에게 ‘와닿을’ 수 있기나 하면 말이 되는 것이겠고. 데카르트는 동류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계해 줄 신이 필요했지만, 세속인은 텔레비전과 상품화 문명께서 사려 깊은 마음으로 내려주신 사이비 교통{communication: 소통 — 역자} 경로로 자족한다. 아무렴 이것은 다 세속인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침투라는 무시무시한 위험 요소를 걸러내기 위함이란 뜻이다. 타자성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는가 아닌가의 여부, 저열한 교통, 실험적인 호기심, 이런 것이 곧 부로 넘치는 사회의 특징이라면, 이 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진짜 척도는 성병과 허무주의 종교에 경도되어 폐망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느냐 없느냐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그 부단한 노력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침범 불가능한 원자의 형태로 경질화하겠다는 오랜 이상을 아직도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불순물은 아직껏 남아있다. 우리는 불순물 가운데서나 서로서로 만날 수 있다.

새벽 3시 30분. 일단은 내가 ‘취했다’고 해두겠다 — 이 말은 한밤중에 사람이 자기 신경계를 두고 범하는 끔찍한 짓들을 지칭하는 부실한 암호가 아닌가 — 그리고 철학을 하기는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질겁할 정도로, 신물이 나올 정도로 끝없이 사유하고 있지만) 그냥 그렇게 해두자는 말이다. 참다운 정신의 역사 속 한 편의 이야기에서, 흔적 없이 죽어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디로 가버렸다는 말인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노라. 내가 상상하기에 죽음이란 목적지도 두지 않은 채로 정처 없이 걷는 것과 비슷했다(하나 죽음 속으로 걸어가는 자는 아무 이유도 없이 — “영원히” — 이 길을 걸어갈 터“)’ [III 286].

정신이 이상하도록 맑고, 암흑 속에 차갑고도 바싹한데, 마비된 듯하다. 올가미처럼 얽매어오는 우주의 한 변두리에 거처한 채 있노라. 마치 생각 자체가 일말의 기탄도 없이 고통과 몸을 섞기라도 하는 듯, 이상하리만치 심한 두통이 스며오며 구토감이 함께 밀려온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안개와 같은 습한 냉기가 스멀스멀 들어온다. 파충으로 변해버린 이 운명에 환희하며 웃는다. 지성은 금속만큼 견고하여 내 손에 들려서는 마치 절단 도구 같아 보인다 — 궁극적 의미를 끊임없이 부정당했으나, 이제는 그것을 찾으려 분투하는, 모종의 기계 내지 도살장에서 떨어져 나온 편린.

사유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곧 철학의 성격이라고 말하는 한에서, 철학의 목표란 그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는 추론이라고 사람들은 독단적으로 규정하곤 한다(정신병리학, 정신의학, 이상심리학 같은 경우 또한 이 엄격한 규정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데, 그 자체가 정신 장애를 겪는 사유에 대한 연구임에도 불구하고 — 원칙에 따라 — 정작 그 구성 요소에는 {정신적} 혼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이 사유를 이해하는 방식을 독점하는 것은 {환경에} 잘 적응한 이성, 평온한 이성, 절제된 이성, 생산적 이성이다. 질서 정연한 노동이라는 기계화가 온 세간에 만연해서는 강력한 운동의 조짐이라면 죄다 사회에서 몰아내는 것과 똑같다. 내가 바타유에게 비정상적 헌신을 바치는 것은 고요한 망각을 향해 날아가는 시끄러운 공포탄의 궤도를 막기 위해서, 이성의 지하고에 잠들어 있는 괴물을 깨우기 위해서 바타유보다 더 많이 노력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억압된 것은 지하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미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면서, 비밀스러운 연속성을 매개로 햇빛이 화창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얽히고설킨 혼란은 마치 문 같아 보이기 시작하고, 미로는 장벽 같아 보인다. 누군가 ‘나’라는 말을 내뱉지만, 내부는 방이 아니라 통로요, 상실이라는 무른 돌을 깎아 만든 길이로다. 내적 체험은 어두침침한 구멍을 꿰뚫고, 미노타우로스의 신음은 미궁의 동맥을 따라 울려 퍼져나가, 쉬이 뭐라고 부를 수 없는, 가까이에 있는 무언가를 넌지시 가리키고 있다. 잠을 청하기는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아무려나, 나도 수많은 방법으로 환락에 빠지곤 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뇌까린다. 이번엔 인칭대명사가 주석가의 반중립적 위치를 전혀 가리키지 못하고 있다고. 되려 바타유가 끊임없이 되풀이한 ‘(je)’를 질질 끌고 늘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추상적 자아(ego)를 강박적으로 되뇌며 사변이 어찌나 추하게 망가지는지는 놀라울 정도니까. 그 결과로 나타나는 푸념이란 —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인이 뱉어대는 타락한 반향과도 엇비슷하며 — 참을 수 없는 치욕이 되어버린 인류의 아집과 같은 것이다. ‘나’는 (홀로써) 존재한다. 속에서 몸부림치는 격통에 대한 비속한 전시로써, 교통의 배반으로써, 단자론(單子論)으로 봉합놓은 살갗이 고름과 딱지에 뒤덮여 곪아가는 상흔으로써, 이 따위 것들 등등으로써… (여러분께선 당연히 하품하시겠지만, 나는 계속하겠다). 그렇다, 나는 — 본래 정의대로 — 더러운 거렁뱅이다(마치 신처럼). 거북한 친절, 마지못한 친절의 외투 자락 부여잡는 거렁뱅이, 그렁성저렁성한 위험 요소와 초라함을 뒤섞는 수작질에 빠져든 거렁뱅이. 점잖은 비인간성으로 기우는 경향을 타파하는 것은 고작 나태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도리어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조르주 바타유 작품론이란 것들의 가장자리를 긁죽거리고 있다 — 추하게 그것의 비겁과 절제를 확언하며, 훌쩍이는 소리의 비참한 맨몸 위에 울려 퍼지는 쌕쌕거리는 웃음을 패러디하며. 그러나 동시에 내가 바타유에 대해서 글을 쓰든 나에 대해서 쓰든 별 상관 자체가 없다. 우리 둘 사이에 어떤 경계가 있다면, 그것은 바타유가 자기 글의 진실이 가리키는 길을 가는 도중에서 잠시 좌절한 적 있다는 것 정도뿐이다.

바타유의 글은 일인칭 대명사에 대해 눈에 띄게 집착을 보이며, 특히 ‘문학적’ 성격이 강한 작품에서는 고백적 태도가 도드라진다. 이러한 태도가 문학 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 작품에 퍼져있다. 이 장치로 인하여 세속적 자아는 글 속으로 침지하고, 목소리와 사변은 일의성의 장 속에서 혼합하며, 독자성은 끊임없이 노름 속으로 (en jeu) {jeu: 운동과 힘의 작용, 유희 — 역자} 빠져든다. 바타유 생전에 출간된 소설 대부분이 — 눈 이야기, 마담 에드와르다, 불가능, C 신부, 하늘의 푸른 빛 포함 —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데다가, 고해하는 자의 목소리는 빠짐없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 대사로 등장하는 수많은 자아를 모두 제거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작가’ 서문 때문인지, 중층적 서사구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표적으로 C 신부에는 각자 다른 일인칭 서술자가 무려 세 명이나 등장하며, 서사의 순서에 시간적 파열이 발생하여 상황이 더욱더 복잡스럽다. 여기에는 당할 수 없는 마력이 있고, 고독의 역경이 있고, 모든 한계에 저항하는 목소리와 침투가 있는지라, 바타유 독서는 명료성에 기여하는 행위가 아니고 애원하는 행위인 것이다.

거렁뱅이들이 중립성이라는 자랑스러운 예복을 걸친다는 것은 맞지 않다. 실상은 정반대다. 거렁뱅이들만큼 인간성의 무게를 많이 짊어진 사람은 없다. 거렁뱅이들이 숱하게 종교를 찾는 까닭은, 거렁뱅이들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행위 자체가 도저히 이성적 사고방식에서는 나올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거렁뱅이들은 사원 수도실에 잠긴 괴성의 전통을, 아무도 답을 돌려주지 않는 괴성의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 이 탁발승들은 신죽음의 메아리 속에서 곤궁에 빠졌으되, 세속에 이들을 받아 줄 공간조차 없기에 불가능한 필연 속에서 헤매듯 끝없는 궁핍을 헤매며 살아가야만 한다. 나에게는 (바타유에게도) 이런 상황이 다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나에게 연민이란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를.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곤궁한 자들이 우거진 이 수풀은 어기적어기적 뚫고 지나가기에도 참으로 불쾌하다. 대충 엉클어진 인간성이 있다는 작고 앙상한 표식 따위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악화의 길이다. 여러분께서는 자기 자신을 감옥에 가둬버렸다는 사실을 비로소 여기서 다시금 상기할 것이다. 문장이 끊임없이 ‘나’에게 들볶여야 한다는 상념은 문체의 허물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망상인데, 이것을 벗어날 유일한 길조차 위선뿐이구나. 사람의 살빛이 글에 생경한데, 그것을 은폐하는 수갑 자국조차 감추려고 든다면 {인간의} 자율에 대한 결정론적 찬미에 불과할 것이고, 그렇다면 글의 근간은 더 멀리 흩어지고 말 것이며, 글이라는 것 자체가 종노릇이라는 확증이 서게 될 것이다(그리고 자아는 글에서 초월로 도망쳐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글에서 작가 본인을 빼버린다는 것은 숱하게 많은 것을 뜻할 수가 있다. 글쓰기라는 것이 애당초 가식이고 치레라고 믿는 자의 딜레탕티슴{dilettantisme: 예술이나 학문 따위를 직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취미 삼아 하는 태도나 경향 — 표준국어대사전}, 익명 아래 책을 쓰는 경향이 있는 자들의 전문가 의식(이 자들은 책이 바로 상품으로 팔리는 경우가 아니면 값을 낮게 쳐서 겅력 자본으로 매도하려고 한다), 유아론에 가까운 독백증(獨白症)적 정신 이상에 빠져버린 자의 권위주의, 숨어서 조종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너무나도 과시적인 겸손이 그것이다. 진실한 수줍음일 수도, 거만한 태도일 수도, 관성적인 무기력증일 수도, 일종의 실험일 수도 있지만, {사람의} 고의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한, 절대로 탈출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일인칭 치레는 버리고 싶기만 하다. 일인칭의 능력은 부식되어 가고 있어서 안일한 객관론이나 가짜 공동성으로 빠져버릴 위험은 줄어들고 있지만, 그래도 버리고 싶다. 인간성, 허위 자율성, 책임, 별스러운 가식 따위 사치는 영 꺼림칙한 것이어서, 전략적 무관심을 단단히 갖춰야 한다. 어떤 사람은 불쾌감에 젖어 난잡한 효용성의 차원 자체를 마비시키다, 이 방법을 따라서 바타유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것 이상으로 어처구니없는데, 방법이 방법이듯 간단히 비인간성을 성취할 수 있다고 넌지시 주장하기 때문이다. 좌우간 ‘나’라는 것은 저 멀리 내쫓아 버려야 말 것이 아니라, 희생 바쳐야 할 대상이니깐. 바타유가 쓴 글 속에 이리저리 뒤섞인 ‘나’는 작가가 아니고 공허에 손짓하는 권태를 지칭하게 된다. 그리고 공허란 비극적 공동체의 부재 징후다.

오래전에 바타유가 쓴 시 ‘Rire’ (’웃음’)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적 있다.

웃고 또 웃어라
태양에다 대고 웃어라
쐐기풀에다 대고 웃어라
자갈돌에다 대고 웃어라
오리 떼에다 대고 웃어라

비에다 대고 웃어라
교황님의 꼬추에다 대고 웃어라
엄마에다 대고 웃어라
똥으로 꽉 찬 관짝에다 대고 웃어라 [IV 13].

이 시는 바타유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 중 제일 중요한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주제는 웃음, 분변, 죽음이다. 이 ‘주제’는 철학적 가해성(可解性)의 입술 위에 잠시 앉았다가, 불타는 문학의 핵 위에서 벌어지는 환희로운 희생제의에 뜯어먹히고, 어처구니없는 이질적 덩어리로 분해되어 버린다. 부패한 시체는 분변적이고, 죽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은 웃음밖에 없다고 바타유는 집착적으로 쓰고 또 썼다. 사체는 유독한 저열물(低劣物)로 분해된다. 하물며 사체는 사실 분변과 마찬가지로 생물종의 노폐물{waste: 낭비 — 역자}로써 배변되는 것이다. 사체야말로 생물학적 개체의 진실이요, 완전한 과잉이므로. 개인에게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낭비의 가도가 가냘픈 잉여의 흔적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생명이란 순수 잉여이므로 ‘웃음’ 속의 아이는 — 조용히 흐느끼는 어머니 옆에 선 채,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아버지의 주검을 보고 얼어붙은 채 — 막자한 소성으로, 오르가즘 맹키로 가차 없이 터져 나오는 공포의 전율에 사로잡혔다. ‘웃음’에는 애도에 대한 이론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웃음이란 망자와의 교감이다. 죽음은 웃음의 대상이 아니다. 되려 우리가 웃을 때 비로소 죽음이 목청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웃음이란 곧 사변이 상실한 무언가이며, 흥분과 추로 터져 나가는 화용론의 출혈이다.

바타유는 우주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에너지의 자연적 운명은 순수한 낭비뿐이라고 말한다. 태양으로부터 온 에너지는 일방향적으로, 설계도 의도도 없이 방출된다. 지구를 강타하는 태양 복사의 일부분이 지구상 모든 생고생의 자원이 되고,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격렬한 추악(醜惡)을 야기하는 것이다.

생명은 에너지 가도 상의 정지로 나타나고, 태양 부패의 위태로운 안정화이자 복잡화로 나타난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이를 소진/소모 문제에 대한 일반해결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태양경제학적·일반경제학적 관점은 생산이라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소진/소모 지엽화(枝葉化)의 추상화를 실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오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보여준다. 생산이란 낭비되는 에너지의 일부를 가용하는 일에 불과하다.

죽음, 낭비, 소진/소모 —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결말이요, 유일한 종착지다. ‘효용’이란 기능적 정의에 불과할 수밖에 없고, 효용을 완전히 벗어나는 소진/소모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를 ‘상대적 효용’이라고 한다. 서양사의 흐름은 효용이란 것이 이 상대적 의미에서 점점 벗어나며 모순적 절대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고질적 증상이 있다. 노예 도덕이 아무도 모르게 살금살금 조금씩 가치를 식민지화하고, ‘봉사하는 것’이라는 의미 아래 가치를 종속한다. ‘선’은 효용, 매개, 수단, 무조건적 의존과 똑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

진정한 상실의 궤적은 곧 ‘내재성’, 연속성, 저열한 물질, 흐름이다. 태양의 흐름에서 추상되어 나온 해체 운동을 연기하고, 지연하고, 잠시 중단하는 국소적 저항은 일종의 초탈{transcendence: 초월 — 역자}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상실에 대한 추상적 저항은 자율성, 균질성, 관념성의 성격을 띠며, 바타유는 이것을 ‘(절대적) 효용’으로 개괄한다.

제약된 에너지가 (필연적으로) 내재성으로 귀환하는 것이 곧 종교이고, 그 핵은 희생제의(sacrifice)이며, 이는 성(聖, sacred)의 파생어이다. 희생제의란 예속을 벗어던지고 풀려나오는 드센 운동이요, 초탈의 붕괴다. 고립적 존재가 다시는 희생제의로 빠지지 못하게 억제하는 것은 바로 인류의 고질적인 범의적 공리주의다. 이것이 사나운 자연을 차단하는 세속적 분계와도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분계의 정식(正式)은 신학에 있다. 종교란 그 세속적 측면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지속되는 존재를 최종적으로 보장하는 자이자 이성 아래 (파멸하는) 시간의 예속인 자, 고로 궁극적 효용의 법칙인 신의 관념 아래 치안을 관리받는 처지다.

인류는 저들이 섬기는 신들의 그림자 아래 숨었다. 인류란 곧 최종적 소진/소모 폐기 계획이며, 고로 곧 하나의 불가능성이다. 인간화 계획은 지속 불가능한 법의 형태를 띤다. 금제를 아무리 강하게 세워도, 불가능은 인류를 에로티슴 속으로 처넣고 부식한다. 에로티슴이란 감할 수 없는 잉여의 분출이며, 성과 죽음의 근본적{base: 저열한 — 역자} 통일이다. 악(순수한 상실)의 필연적 승리인 에로티슴은 우리를 물어뜯는다.

무신론적 시학 작품의 극치 문학과 악을 예시로 삼자면, 이 작품에서 바타유가 적용한 독해법의 길잡이는 바로 운명(=죽음)에의 정열적인 항복이다. 문학과 악은 문학예술과 위반이 겹치는 영역을 보여주는 글쓰기에 대한 논평 모음집이다. 바타유가 고집스레 주장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비공리주의적 작가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거나 재산 축적을 증진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얼마나 순수하고 섬세하고 영적인지조차도 상관없다. 도리어 비공리주의적 적가들은 — 바타유가 글에서 사용하는 예시는 에밀리 브론테, 보들레르, 미슐레, 블레이크, 사드, 프루스트, 카프카, 주네 — 교통에 관심을 둔다. 교통이란 곧 개체성, 자율성, 고립성의 위반이요, 상처를 가하는 것이며, 이 상처를 통해 존재가 맹목적 낭비의 공동체 속으로 터져나간다. 문학이란 초탈을 위반하는 것, 음흉하고 불경스러운 희생제의의 상흔을 찢어버리는 것이다. 이로써 문학은 도구적 사변의 사이비 교통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인 교통을 가능케 한다. 문학의 심장은 신죽음이고 선의 강력한 부재이며, 고로 개개인적 인간성의 이익을 보호하고 공고히 하고 보장하는 모든 것들의 부재다. 신죽음이란 궁극의 위반이며, 지옥으로 흐르는 태양의 맹목적 낭비를 향해 인류로부터 인류를 해방함이로다.

철학이 죽어버렸다는 상상은 마음 약한 자를 위한 위안에 불과하다. 사실 이 문제의 실상은 정반대다. 철학은 인간성의 최후 보루가 될 것이다. 어쩌면 다 저물어가는 효율성의 충동일지도 모르련다. 인류가 끝날 운명이라는 상념은 한없이 단순한 생각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철학에 있어서는 기초적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종의 이익을 대신하여 사유한다는 것 자체가 애처로운 지역주의에 불과하니까.

인간은 ‘무한’이라는 단어를 더듬거리는 법을 배운 작고 가련한 존재에 불과하다. 그렇게 말로써 무한을 더듬으며 모든 것을 조그맣게 만들고, 자기 자신조차도 조그맣게 만든다. 인간이 말하는 ‘무한’이란 것이 한없이 경상적인 자연의 장대함과 비교해서 얼마나 처연한지는 일신론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무언가가 우리와 통하는 바가 있기 위해선, ‘인간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움츠려야 하는 것이다.

만일 자연이 인간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불쾌를 느낀다면, 그것은 고작 표면, 피상, 예민한 피부에 불과하다. 심오한 자연 — 물질 — 은 다르다. 끄떡하지도 않으며, 범할 수도 없다(고로 자연은 신보다도 깊다). 심오한 자연은 어떤 공격에도 아무런 고통을 받지 아니하고, 조금도 불유쾌해하지 않으며, 겉껍질 따위 만들지 않는다. 변명이 들어설 공간은 얕은 곳에나 있는 것이다.

철학에서 {고급} 취향 유무를 결정하는 척도는 단 하나뿐이다. 바로 범속한 의인주의{擬人主義: 인간 이외의 존재인 신이나 자연에 대하여, 인간의 정신적 특색을 부여하는 경향 — 표준국어대사전}를 피하냐, 아니면 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면 사람은 철창 속 처지도 수긍해버린다. 따라서 직관적으로 이하의 결론이 따라 나온다.

1

자연을 철저히 비인간화하기. 자연에서 작용하는 물리적 힘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극단적 비인간주의를 취하기. 기도의 흔적 따위는 남기지 않기. 인간성의 흔적에 대하여 본능적 예민함을 발휘하고, 인간성의 흔적 따위는 물질의 분변으로, 물질에서 가장 추악한 부분으로, 하수구로 간주하기…

2

가차 없는 운명론. 결정, 책임, 행동, 의도 따위가 들어갈 공간을 남겨두지 않기. 철학자가 인간의 자유에 호소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불명예를 남긴다.

3

도덕적 해석의 부재.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도덕조차의 부재. 교정이나 앙갚음을 바라는 것은 사람을 피상에 처박는다.

4

범속한 가치 판단에 대한 경멸. 혹여나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옳은 일을 저지르는 법이 없도록 조심을 가해야 한다. 적이 되겠다는 것조차도 안락에 겨워 있겠다는 것이다. 이방인, 짐승이 되어야 한다. 철학자라는 자가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싶어 한다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없다.

이 철학의 이름은 리비도적 유물론이다. 그러나 철학보다는 하나의 범죄에 더 가깝다. 역사적으로 리비도적 유물론은 니체, 프로이트, 바타유의 글을 가로지르는 의미심장한 의미에 따라서 염세주의적이다. 주재로써는 (이젠 더 이상 정신이나 분석을 믿진 않지만) 정신분석학적이며, (더 이상 물리주의적이지도, 수리논리학적이지도 않지만) 열역학·에너지론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살짝 병적인 부분이 있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계보학적, 진단적이며, 무자아(無自我)의 광증으로 빠져드는 폭동을 헤쳐 나가도록 도와줄 강도의 시현에 열렬하다. 문체론에 있어서는 공격적이며, 아주 약한 과장법을 사용하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는 대단히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전술한 사유에 있어서는 무언가를 제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꿰뚫는 것이 문제가 된다. 비인간적 에너지의 쇄도로부터 문명을 보호하고 있는 수문을 난도질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제한이 없는 글쓰기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말하더라도 설명 자체가 교화적인 것을 피할 순 없다. 리비도적 유물론은 결코 아버지도 어머니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리비도적 유물론에는 시조 자체가 없다. 니체가 시작한 것도, 쇼펜하우어의 범주론적·병리학적 열정에서 시작한 것도 아니며, 칸트가 쓴 글의 무의식에서 시작한 것도 아니고, 한참도 더 전에 기원이 있을 테니까. 아득한 고대에 — 니체가 주장하기로는 한참 전 아낙시만드로스부터 — 등장한 철학조차 경찰력의 협박에 대비했었던 일이 있다.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다. 리비도적 유물론이란 인류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이 글로써 귀환한 것이다.

그 누구도 리비도적 유물론자가 ‘될’ 순 없다. 리비도적 유물론이란 혐오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고, 신경을 절그렁절그렁 울리는 것, 또렷한 이성의 연소, 구역질 나는 사고의 소요니까. 또 신체의 적응 기제를 망가뜨리고, 나머지 그나마 멀쩡한 신경은 허무하고도 충격적인 경련 속으로 집어삼키는 중추신경계의 극초뇌전증{極超腦電症, hyperlepsy — 랜드가 뇌전증을 뜻하는 영어 단어 epilepsy 의 접두사 epi- 를 hyper- 로 바꾸어 만들어 낸 조어 — 역자}이다. 쇼펜하우어는 사유 행위가 의학적으로 처참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니체는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나이 든 철학자란 체력이 넘치는 괴물 아니면 사기꾼인 것이다. 화염 폭풍에 전소되는 데는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가? 지구에 드리운 인공 태양에 전소되는 데는? 니체의 뇌간 속에 있던 화염이 튜린에 있는 광장 위에 떠오른 화염에 융화되었던 순간 유물론은 비로소 실현에 이르게 되었노라.

온갖 ‘—주의’들이나 마찬가지로 리비도적 유물론조차도 잘해봐야 패러디 정도에 불과하며, 여차 잘못하면 속박 따위에 불과하다. 진짜로 중요한 것은 이 책의 제목이 되는 거센 탈출 의지, 소멸 갈증이다. 이 말은 내장을 파고드는 궤양처럼 내 안에서 자라고 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욕망인가, 아니면 욕망의 부정인가? 의지의 극복, 허무주의, 죽음욕동인가? 이런 것조차 그저 추상화 강박에 불과한 것 같다. 역사적·인류학적으로 생각해 보겠다. 소멸 갈증이란 논리적 기능에서 찢겨 나와 애착의 비목적론적 종착지가 되어버린 부정이며, 맹렬한 리비도 집중(investment), 즉 점령(besetzt)에 형식과 구조를 난도질당하고, 해체의 동력원에 연결되어 버린 부정이다. 대상을 논리적으로 해부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자기도 모르게 지니고 있던 무시무시한 물질성을 마침내 깨달을 수 있도록 — {신경} 자극으로써의 부정.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기보다는 차라리 무를 의욕하기’ [N II 839, GM 3.1]. 이것은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차이다. 마치 예민한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녹슨 못 같다. 현실의 철폐를 바라는 원초적 갈망은 철학적 탐구의 대상인가, 아니면 철학을 통하여 완성되는 하나의 욕동인가? 여기에서 이 미묘한 차이를 사용하는 것은 당최 무엇인가?

미묘한 차이가 신경을 긁어대는데도 모든 것은 대단히 조잡하게 돌아간다. 죽음이 우리를 흥분시킨다. 죽음의 강을 건너기 전에도 나는 죽음 갈증에 시달렸다. 내 사정이 다소간 도를 넘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내가 제로(zero)에 꽂히게 만든 일탈은 진리에서 유리될 수 없다. 죽음에 대해 사랑을 아끼는 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지옥이 나를 따스하게 대해주었던 것이 결국 숱한 골칫거리의 주재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고고한 신성에서 나보다 멀리 떨어진 자는 아직껏 지구에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천사 같은 겉모습을 지닌 방랑자와 함께, 나는 역병과 해충으로 뒤덮인 똥개처럼 지옥으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간다. 시크교 경전에는 인간은 천사와 악마의 가면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나의 지옥 같은 생김새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는 고민할 여지조차 없을 터(내가 가는 그곳에는 음영이 자욱해진다). 바타유의 사진을 지긋이 쳐다보노라면 아궁이 같은 공동체 속에 있는 그의 무존재와 연결되고는 한다. 웃음이 지어진다.

나의 날개는 해져서
태양의 혀를 느낀 적이 없다
쇠 막대에 꽂혀서는
독 있는 죽음의 꽃처럼 검으며
밤이 찾아올 때만 펼쳐지노라

나는 궤짝 밖을 다녀와 봤다고 아무리 말해도, 궤짝 속에서는 그 말에 수긍한들 부정한들 하는 것이 그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인 양 보이리라. 플라톤에게도 그러하였듯 나에게도 앎이란 곧 기억이다. 그러나 플라톤과 다르게 나는 철학과 염원이 죽을 때까지 살아남았노라. 나는 생명 자체가 죽어버릴 때까지도 살아남았으므로. 죽음에게는 대변해 줄 자가 없는 법이지만, 적어도 나는 몸소 죽음에서 돌아왔다 (나는 이 특징을 나사렛과 마지못하게 공유하고 있다). 내가 죽음 속을 떠다닌 이래로 세상은 나를 진지하게 만들려는 유혹을 모두 단념하였다. 갈보년이 산울타리에 앉아 쉬듯 나 삶 속에서 쉬며, 이 말들을 중얼거리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