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敎正典

sacred texts

I


이교도적 부정신학

II


번역에 대하여

닉 랜드

≪소멸 갈증≫

I

서문


1

말 되는 철학의 죽음


3

위반


/

11

끊나지 않는 소통


참고문헌


조르주 바타유

제쥐브


3

└ 송과안


희생


4

≪도퀴망≫

꽃말


5

≪비평 사전≫

≪철학 연구≫

미궁


10

≪사회학 학회≫

≪아세팔≫

니체와 파쇼들


제안


앙토냉 아르토

부록

색인


保管所

Archive

Assimilare

마법사의 제자

조르주 바타유

[각주 및 맞춤법 수정 중]

* 이 글은 사회학 연구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이 글로써 사회학 연구결과가 전문분과의 선입관에 관한 답이 아니고 참으로 정력적인 관심에 관한 답으로 보이는 관점을 정의하고자 한다. 사실 사회학 자체로써는 일종의 피편화 현상에 불과한 순수 학문을 비판하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 만일 학문은 파편적 활동에 불과하고, 사회학적 현상이 유일하게 존재의 총체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사회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은 목표 대상에 다다를 수 없다. 만일 목표 대상에 다다르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본연의 법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학적 학문에는 자연의 파편적 양상을 다루는 연구분야를 넘어서는 또다른 여건이 필요한 바, 이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회학 — 특히 프랑스 사회학 — 은 사회학적 현상과 종교학적 현상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일치성의 존재를 아는 학자들의 노력으로 발전한 듯하다. 그러나 총체성에 관한 질문을 세차게 앞다투어 제기하지 않는다면, 프랑스 사회학이 산출한 연구 결과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양 깡그리 무시당할 위험이 있다.

I. 만족의 부재보다도 불행한 욕구의 부재

인간이라면 수많은 욕구를 갖고 있어, 이 욕구를 만족시켜야 궁지를 면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고통을 마주하지조차 않는다면 불행에 엄습당할 수도 있다. 불운에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방도를 죄다 빼앗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본 욕구조차가 없는 경우에 더 불안에 떠는 법이다. 대게 정력이 없어도 고통으로도 궁지로도 끝나진 않는다. 정력이 없어 누그러진 자는 만족을 결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불행을 보고 벌벌 떨듯 정력이 없어질 것을 두고 벌벌 떨곤 한다.

즉 일단 인간에게 불행이 닥처오면 그것이 처음에는 불행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불행이란 금방 불어닥칠 칼바람을 앞서봐야 하는 이들에게나 불행인 것이다.

폐병은 환자가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데도 기관지를 망가뜨린다. 고로 폐병은 가장 악독한 병 가운데 하나라는데 아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소리 없이 의식할 새 없이 썩어들어가는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다. 아마 인간들에게 닥쳐오는 불행 증 제일루 커다란 불행은 인간의 존재를 종과 다르지 아니한 기관{organe: 부품}의 상태로 떨어뜨리는 것일 테다. 한데도 아무도 정치인, 글쟁이, 학자가 되겠다는 것을 단념하질 않는다. 고로 인간 사회 속에서 유용한 기능 따위가 되고자 전인을 단념하는 자들을 덮치고 쇠락으로 내모는 불완전성을 매꾸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II.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빼앗긴 인간

운이 없는 사람들에게나 불행이 닥친다면 불행 자체로는 그다지 커다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자기가 쓴 문학 작품의 영광이 자신의 운명을 완성한다고 착각하는 자들은, 온갖 것이 파멸하는 와중에도 제 인생은 똑같이 파멸의 길로 빠져드는 것을 피하면서 그릇된 상념을 가질 수 있었노라. 하나 마치 죽음을 섬기는 자들처럼 저마다 자기 일에만 전념하며 외로이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자들에게는 학문, 정치, 예술 너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쓸모있는 재화를 생산할 목적으로 자기가 갖고 있는 활동력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인간은 자연히 노동이라는 예속을 넘을 수 없는 한계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결정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조차가 없기 때문이다. 한데 이토록 공허한 존재의 실없음은, 예술, 정치, 학문이 종에게 어떠한 존재가 되라고 하고, 어떤 것을 믿으라고 과할 때, 충직하게 응수하여 생산을 완벽하게 끝마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종은 예술, 학문, 정치의 요구 앞에서 인간으로써의 운명을 해명해줄 것만 같은 갖은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고로 전술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인’들은 당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는 한계가 되는 것이다. 이 반송장 상태에 불안스러운 고통이란 코빼기도 없다 — 고작해야 우울증에 대한 자각이 전부다(그릇된 노력에 대한 추념으로 우울증은 오히려 썩 기분 좋게 느껴지기만 한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인간에게 한낮을 선사한 원인도 목적인도 없는 우주는 인간에게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운명을 준 적이 없다. 하나 운명이 곧 근심적정 같아 보이는 인간, 야욕의 속박을 견딜 수 없는 인간, 죄와 불행의 속박을 견딜 수 없는 인간, 이런 인간은 용감할 수 없다.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조차 외면한더라면, 고통 어린 신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녹초가 되고자 할 이유도 자연히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존재가 참으로 무엇이었던지를 잊어버리는 한에서나 닥쳐오는 존재를 버티고 설 수 있는 것이다. 예술가, 정치인, 지식인들은 이 자를 속여야 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고로 존재 위에 군림하는 자들은 거진 제 자신을 속이는 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남을 속이는 방법도 가장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런 행태 속에 정열적인 힘은 줄어만 가고,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조차 줄어만 가고 있다. 뒷꽁무니 빼고 도망갈 수 있는 구멍을 사람들이 반기는 이유는, 우리들의 운명이라는 영웅적이고도 고혹스러운 상으로부터 도망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의 욕구가 곧 결함이 되어버린 세상에는 유용한 인간의 매력 없는 얼굴을 위한 자리밖엔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한데 이 욕구의 부재라는 것이 그야말로 최악에 치닫을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욕구의 부재를 느끼고는 마치 지복이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한다. 불행이란 억척같이 ‘운명애(運命愛)’ 하여 저 멀리 떨어진 사람을 현세계로 대려올 수 있을 때에나 비로소 눈 앞에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III. 학문의 인간

‘공포로 인하여 인간이 되고픈 욕구를 박탈당한 인간’은 더욱더 커다랗고 더욱더 헛된 희망을 학문에 기대어 놓았다. 이 인간은 운명을 따라 행하며 살기를 바랐을 적에는 갖고 있었던 총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학문이 하는 일은 독자적이어야 하며, 지식인은 알고자 하는 욕망 바깥에 있는 갖은 인간적 욕구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문이라는 책무를 짊어진 인간은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는 인간 운명의 고심을 진리를 발견해내야만 한다는 걱정거리와 바꿔쳤다. 학문의 인간은 총체를 버리고 부분을 취하며, 부분을 섬기는 일은 곧 그 부분 외 다른 것은 모두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않을 것을 주문한다. 학문이란 곧 기능이며, 한때 섬겨야만 했던 운명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발전하기 시작하는 것아다. 운명의 종노릇이나 할 적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하나의 기능이 오로지 독립적 목표를 자처함으로써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은 모순적이다.

인간이 소유한 지식의 총체는 필연 기만이고 속임수이기 마련이다. 한데도 인간이 차지하는 영역이 지식으로 점점 더 넓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바스라질 듯 가녀린 존재의 덕이다.*

* 학문을 부정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 학문의 도덕 파괴를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중간에 개입하여 학문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회학의 경우 지식의 법칙이라는 이름 아래 학문의 도덕 파괴를 막아야 할 것이다(머릿글 참조).

IV. 허구의 인간

예술에 귀착된 기능은 더욱더 모호하다. 작가와 예술가들이 죄다 만년 존재를 버리기로 한 것 같아 뵈지는 않는데다가, 예술가들이 존재를 단념하는지 여부를 간파하기란 학문의 인간이 같은 짓을 하는지 간파하기보다 한참 더 어렵다. 예술, 문학 표현물에는 학자들의 법칙에 골이 파먹힌 얼라들의 모습은 없다. 예술과 문학으로 지어낸 거슴츠레한 형상은 학문의 질서정연한 현실과 반대로 거추장스러운 유혹의 망토를 걸친 듯 보일 뿐이다. 헌데 이 현란한 귀신들은 당췌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우리가 아침마다 눈을 쳐뜨고 바라보는 이 세상이 하릴없는 우리들의 존재에 귀신들려도 좀 덜 비천하게나 해줄 목적으로 창작된 귀신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다는 말인가? 허구로 된 상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가짜다. 하물며 주저함도 부끄럼도 모르는 거짓도 다 허위이고 가짜인 것이다. 삶에 필수불가결인 두 가지 요소{주저함과 부끄럼}가 이렇게 완전히 분열하였다. 학문이 추구하는 진리란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나 진리이며, 허구인 한 그 어떠한 것도 의미를 갖고 있지 아니하다.

학문을 섬기는 자들은 진리의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을 배제하였고, 예술을 섬기는 자들은 불안을 자아내는 운명께서 이들에게로 강청한 것을 참된 세계로 하지 아니하였다. 하나 가공의 삶이 아닌 참된 삶을 얻으려는 욕구에서 벗어나기도 쉽지 않은 것이다. 예술을 섬기는 자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덧없는 존재조차도 떳떳한 창작물로 받아들인다. 헌데도 이들은 진실의 왕국, 돈의 왕국, 영광의 왕국, 사회적 지위의 왕국으로 살아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고로 이들에게는 절뚝이며 사는 것 밖애는 다른 방도가 없다. 이들은 이따금씩 자기들이 창착해낸 물건들에 신들렸다고 믿곤 하지만, 참된 존재를 지니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신들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자들은 실상 자신의 업(業)에 신들린 것에 불과하다. 낭만주의는 저 너머에서 인간을 신들리는 신을 불행한 시인의 운명으로 바꾸어 놓지만, 절뚝거리는 삶을 벗어나기에는 아직 한참이 부족하다. 낭만주의는 고작 불행에 직업이라는1 새 모습을 지어주는 데 그쳤고, 낭만주의로 인하여 사라지지 않은 자들의 거짓말은 더욱더 듣기 괴롭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V. 투쟁의 시종이 되어버린 허구

직업에 관한 위선, 이것보다 더 널리 퍼진 예술가와 작가의 자아에 관한 위선, 이런 위선이 허구를 더 견고한 현실의 시종 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만일 예술과 문학이 자족한 세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이 참이라면, 예술과 문학은 교회나 국가의 영광에 한 몸 바치는 현실 세계의 종노릇 할 수 있을 것이고, 세상에 온갖 의견이 분분할 적에는 정치 투쟁과 포교활동, 정치 선전에 몸바치리라. 한데 이런 형편에서야 미사여구와 타자를 위한 종노릇 밖에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섬기는 거대 기관조차가 운명의 모순적인 운동에 동요했더라면, 예술은 오묘한 존재를 섬기고 오묘한 존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마주하는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당장의 동태와 특정 {이익} 집단에게 제 이익의 추구가 매어있는 기관에 대해서야말로, 예술은 오묘한 존재와 정치 투쟁 사이에 혼란을 불어넣고, 때로 그 혼란은 정치 신봉자들마저를 덮치기도 하는 것이다.

좌우간 인간의 운명은 허구 속에서나 느낄 수 있기가 보통이다. 허구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운명을 완수하지는 못했기에 괴롭다. 업에 열중할 때나 허구를 벗어날 수 있기에 괴롭다. 고로 허구의 인간은 자기를 신들리는 영(靈)을 현실 세계로 들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투쟁을 통하여 허구를 벗은 세계로 영이 나타나는 순간, 글쟁이가 개개의 진리에 영을 엮어내는 그 순간, 영은 인간 존재를 완성할 수 있는 특권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인제 영(靈)은 조각조각 갈라진 세상을 권태로이 반영할 뿐이로다.

VI. 투쟁의 인간

학문으로 밝혀낸 진리에 인간을 위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靈)이라는 허구가 고작 인간의 기이한 소망에 응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소망을 성취한다는 것은 이런 허구가 다 진짜로 변할 것을 요하리라. 창작욕에 신들린 자는 우리에게 인간이 되고픈 욕구를 느끼게 해줄 뿐이다. 그러나 허구와 거짓 이상을 창작하겠다는 의지를 버리는 순간, 인간이 되고픈 욕구조차를 저버리고 만다. 글쟁이는 현실이 생각을 따르게 만들고자 할 때나 정력적인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글쟁이의 내면에 존재하는 힘 하나하나가 자기가 테어난 어설픈 세계를 꿈의 장난에 갖다 바치라고 주문하고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욕구는 대게 난삽한 모양새로 나타나곤 한다. 학문을 따라 현실을 반성하는 일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도 허망하고, 허구를 따라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도 허망한 일이다. 오로지 투쟁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습이 꿈을 닮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투쟁 뿐인 것이다. ‘행동하라‘는 말이 마치 여리고의 나팔처럼 귓속에 울린다. 그보다 더 크게 울려퍼지는 명령이 없으매, 듣는 자에게는 유예도 조건도 없이 행동에의 촉구가 닥쳐오는 것이다. 그러나 투쟁을 통하여 이 동력과도 같은 희망을 재빨리 실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자들은 갑작스레 이상야릇한 대답을 되돌려 받는다. 투쟁에 입문한 사람은 강력한 투쟁 의지가 황량한 꿈에 그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로 그는 투쟁이 끝난 뒤에도 행동을 취하긴 했다는 소득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바를 뒤늦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꿈의 모습의 맞추어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건만, 오히려 제일루 빈한한 현실의 기준에 맞추어 꿈을 제단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면의 의지를 억누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VII. 바뀔 수 없는 세상에 의하여 바뀌어 버린 투쟁

행동하고자 하는 자에게 투쟁은 가장 먼저 학문이 말하는 바대로 꿈의 크기를 조절할 것을 주문한다. 인간의 운명에 허구와 달리 진실한 바탕을 선사하고자 근심한다면, 정치 공론가들의 멸시를 한몸에 받게 된다. 하물며 인생을 통째로 노름할 것을 주문하는 극단주의 정당의 행동으로도 이들의 멸시를 피할 수 없다. 한데 한 사람의 운명이란 갓은 투쟁에 몸바칠 때나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법이다. 한데도 이 운명이, 동류 집단 속에 존재하는 지위간에 작용하는 힘과 혼동됨이 틀림없다. 사람은 생명을 잃을 것도 무릅쓰고 이 동류 집단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정치 공론가들은 이러한 운명을 마음대로 놀려 고작 만인평등한 안락과 바꿔먹었다{민주주의 혁명을 가리킨다 — 옮긴이}. 투쟁의 언어는 단 하나의 방책을 옳다고 간주한다. 이 방책은 이성의 법칙에 순응하며, 이성의 법칙이 학문을 지배하고 인간의 삶에서 운명을 유리한다. 정치 투쟁이 전설 속 영웅에 필적하는 위인의 모습을 갖출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물질자산과 문화자산을 수복하는 행위는 인간의 안면과, 인간의 안면이 표출하는 열렬한 욕망, 죽음 앞의 환희로운 반항을 똑닮은 모든 것들을 다 저 멀리 떨어뜨려 놓고자 자산을 취하려고 하는 근심을 반영할 뿐이다. 정치 공론가들은 써로 치받는 군중에 대고 다 죽어가는 영웅을 섬기는 민중이라도 되는 양 호소하는 것이 영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 자들은 — 말하자면 — 제 몸에 난 상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들의 관심사를 겨냥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2

투쟁인은 존재하는 것을 따르고 섬긴다. 만일 그의 투쟁이 하나의 반항이라면, 존재하는 것을 파괴하기 위해 제 한 목숨 바칠 때조차도 존재하는 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파괴 작태에 몸담을 때조차도 인간의 운명은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투쟁인이 정체불명한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의지 바깥의 다른 것을 모두 잃어버리노라면, 그 즉시 인간의 운명은 그를 떠나버리고 만다. 투쟁하는 인간은 파괴 행위가 끝나자마자 자기 뒤를 따르는 사람의 수에 따라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자기는 자기가 파괴한 사물에 좌우된다는 상념에 빠지는데, 투쟁인이 파괴한 사물은 곧 다시 체계와 구조를 이루기 시작한다. 학문과 이성이 공허한 허례허식 따위로 만들어 버린 꿈, 이 무형의 꿈조차도 고작 투쟁의 길에 버석하게 쌓여만 가는 먼지 따위가 되어버린다. 투쟁인은, 한때 자기가 타자의 면전에서 버텨내던 강요의 힘에 억눌리지 않은 것, 예속당하지 않은 것은 죄다 산산조각을 내면서, 자기를 인도하는 시류, 제 무력감이 박차를 가할 뿐인 시류에 몸을 던지고 마는 것이다.

VIII. 파편난 존재

이렇듯 존재는 세 덩어리로 갈라져 존재로써 존재하기를 그치고 말았다. 존재란 예술, 학문, 정치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미개한 단순무식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이곳에는 지식인, 정치인, 예술가에 지나지 않는 자들밖에 없다. 이 자들은 기능을 취득하기 위하여 존재를 단념하겠다는 사항에 하나하나 찬동한 것이다. 어떤 지식인들은 예술과 정치에 관심을 둔다. 한편으로는 정치인과 예술가가 지식인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하나 결국 이 자들 모두가 참된 인간을 구성하지 못하는 세 가지의 결함을 덧보탤 뿐이다. 존재의 총체성은 능력이나 지식의 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존재의 총체성은 스스로가 살아 움직이는 개인, 단체, 기관으로 쉽사리 조각나게 내버려두지 아니한다. 삶이란 곧 삶을 이루는 개별 요소들의 정력적 합일이다. 삶에는 마치 도끼질 같은 단순무식함이 있는 것이다.

IX. 충만한 존재와 연인의 상

아직 채 {부품과도 같은} 기능적 종노릇으로 인하여 파괴당하지 아니한 단순하지만서도 충만한 존재란, 투쟁, 기술적 묘사, 측정 따위 특수 기획에 제 몸 바치지 아니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충만한 존재란 곧 운명의 상에, 매혹적이고도 위험한 신화에 달려 있어,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는 유용한 노동에 제 몸 바칠 적에면 파편나버리는 법이다. 유용한 노동 그 자체로써는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총체적 존재라는 고혹스러운 충만을 찾을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정력이라 함은 바로 이 법칙을 나타낼 뿐이다 — 즉 욕망을 일으키는 나신의 상을 보고도 아무런 힘도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정력적 완전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인 것이다. 마치 정력이 나신의 유혹과 엮여있듯, 충만한 존재는 희망과 공포를 자아내는 갖은 상들과 엮여있노라. 이 조각나고 조각난 세상 속에서, 연인이란 생의 불길에3 몸을 맡기는 용기를 간직한 유일한 힘이 된 것이렸다. 만일에 이 조각난 세상이 서로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존재들이 빚어내는 격동으로 끊임없이 울리지 않았더라면, 만일에 ‘텅빈 모냥이 참으로 음울한’ 얼굴로 인하여 이 세상이 변용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제가 낳은 것들에 보내는 하찮은 조소 따위로 보였으리라. 그런 세상에서 인간의 존재는 고작 ‘미개‘ 촌락을 추념하면서 필름에 담는 짓 따위나 하고 있었으리라. 우리는 분개하는 마음으로 허구를 저리 제쳐두어야 한다. 한 존재가 저변에, 광인의 저변에, 비극의 저변에 지니고 있는 것, ‘눈부신 경이’는 이제 고작 침대 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간의 자족한 잔해와 조각난 관심거리들이 침실에도 몰아닥친다. 빗장을 지른 침실은 마치 삶을 이루는 형상들이 재조립되는 쪽방과도 같이 끝없는 정신의 공허를 발끝만큼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X. 연인의 허망한 성질

최초에 연인의 상은 느닷없는 폭발로 나타난다. 이 상은 연인을 쳐다보는 자들의 눈을 부시는 한편 이 자들을 겁 질리기도 한다. 연인이 기능을 최우선 관심사로 놓기라도 할 적에는, 저들의 치기어린 야단법석을 저버리고 조소하고 만다. ‘진지‘해진 사람은 자기가 이 유혹에 반응하지 아니하고서도 존재를 찾아내리라 쉽사리 믿어버린다. 하나 만일 이 사람보다는 조금 덜 진지한 다른 아무개가, 공포스러운 유혹의 화염이 자기를 덮쳐 번지게 둔다더라도, 여전히 연인상(戀人賞)의 허망함을 깨달아야만 하느니라.

이유인즉 연인의 상에 모순되는 짓을 하기 위함이라면 고작 사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고로 — 먹고, 자고, 말하고, 연인이 가진 의미를 다 빼내어 텅 비게 만드는 것으로 충분한고로다. 만일 한 남자가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바로 운명 그 자체라는 명증이 떨어진다면, 마치 소리없는 비극처럼 당장에 이 남자에게로 휘몰아치는 모든 것은, 여자가 삶을 살아내려고 우왕자왕하던 것과는 하등 관계 없으리라. 즉 일순간 운명이 살아 숨쉬는 상은 일상이라는 야단법석을 알지 못하는 세계로 투사하여 있는 것이다. 남자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여 사람의 모습을 입고 난 인간 운명에 이끌리듯 여자에게 이끌리매, 여자는 돈의 질서를 따르는 곳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하노라. 여자의 포근함은 현실 세계를 떠나가고, 이제 꿈의 한계에 가로막히지도 아니하노라. 여자라는 포근함 따위 무시하고픈 욕구에 넘어간 자들의 혼은 불행에 집어삼켜지리라. 달콤한 여자의 현실이란 희미하게 떨리는 빛처럼 불안할 뿐이나, 빛은 밤4으로 매섭게 불타오른다.5

XI. 연인들의 참된 세계

한데 운명이라는 밤 속에서 서로를 다시 만나는 두 연인의 희미한 첫모습이라도 극이나 책 속 환상 따위 같은 성질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극이나 문학만으로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그런 세계를 창조해낼 수 없으니까. 예술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 애통한 관경을 창작해도, 하물며 그것을 보고 감명을 받은 자들에게조차도, 금세 달아나버리는 끄나풀 같은 동질감이나 유발할 뿐이다. 만일에 그 애통한 관경을 관람한 이들이 서로 만난다고 해도 자기가 느낀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자족해야 하는데, 말이란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반향을 비교 분석 따위로 바꿔친 것에 불과하다. 한데도 연인들은 저들끼리 깊을 수 있을 만큼 깊은 침묵에 잠겨서도 주거니 받거니를 한다. 그 침묵 속에는 서로에게 황홀경을 선물할 수 있는 힘으로 불타오르는 정열로 가득찬 몸짓이 가지가지 있는 것이다. 이리두 타올르는 아궁이가 참된 세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한때 서로의 눈에 비쳤던 그때 그 모습을 하고, 상대방의 운명이라는 감동적인 모습을 입고 다시 만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헛된 말이리라. 고로 사랑의 격렬한 몸짓이란 첫날 환영에 불과했던 것을 참된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라.

따라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두 존재가 몸을 결합할 때면, 타자를 경시한 불완전한 행동으로 인하여 — 꿈이라는 무지한 활동으로 인하여 — 마주했던 장애물이 다 극복된다. 여성의 현현은 뒤집힌 꿈 세계 속에서 느닷없이 일어나는 듯 하다. 그러나 벌거벗은 꿈 속 형상, 기쁨에 젖은 꿈 속 형상은 침실이라는 비좁은 현실에 불과한 세계로 내던져진다.

성행위란 삶의 비밀이 지를 향해 형체를 드러내 보이는, 침대 위에 자리한 ‘꿈의 자매’. 학문이 — 예술이나 실천적 행위나 마찬가지로 — 존재에 파편적인 의미라도 부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린 이 수호받는 공간 속에서, 지란 황홀경에 어린 인간 운명의 발견이어라.*

* 이 글에 나타난 ‘연인들의 세계’에 대한 묘사는 지시적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다. 연인들의 세계는 실제 삶을 살며 마주치는 흔치 않은 기회를 구성하고, 그러한 기회가 실현되어 예술 세계, 정치 세계, 학문 세계보다 훨씬 가까이 존재의 총체성을 현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도 인간의 생(生)을 완성할 수 없다. 여하튼 연인들의 세계가 사회를 형성하는 기본 형태라고 생각하는 태도에는 오류가 있으리라. 사회 현상에 근간에 연인들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필시 결정적인 이유로 버려야 했다.

XII. 우연의 총합

고로 꿈을 단념하고 투쟁인의 실천 의지를 단념하는 것은 참된 세계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다. 연인들의 세계가 정치의 세계보다 참답지 못한 것이 아니다. 연인들의 세계는 존재의 총체성을 흡수하매, 이것은 정치가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실천 행위의 세계가 갖는 파편적이고 공허한 성격을 연인들의 세계는 갖지 않는다. 다만 실천 행위가 꼴랑 종노릇 따위로 어러지기 전에나 인생에 들어가 있던 그런 성격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연인들의 세계란 (生)을 따라 야욕으로 힘으로 넘쳐흐르자는 의지에 호응하는 우연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나름의 논리가 있어도, 그저 섬뜩하기 그지없도록 — 어떤 사람을 연인으로 취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 우연의 총합이다. 단순 우연이 만남의 기회를 이루고 운명의 여성상을 이룬다. 남성도 이 운명의 여성상과 자신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때로 그 마음이란 죽어버릴만치 깊다. 여성상(像)의 의미는 먼 옛적부터 욕구에 속하여 있었다. 그 욕구란 채우기가 아주 힘든 것이어서, 연인들은 극도의 우연이 갖는 성격{couleur: 트럼프 카드의 4색을 의미하기도 한다 —역자}을 갖고 있다고도 한다. 노름판 속으로 굴러 들어온 돈의 운명은 패(牌)의 조합이 결정한다. 요외로 귀한 패가 손에 들어와 판돈의 운명을 결정하듯, 여성과 요외로 마주치는 일이 존재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러나 제일루 높은 패랍시고 그 패의 힘으로 판돈을 다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을 딴 패조차도 요행에 불과하다. 돈을 따고자 하는 야욕과 승리가 그 패를 비로소 진실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인간이 변덕스레 택하지 않았더라면 하등 의미조차 전무하였을 우연의 총합에 참다운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결과다. 여성을 소유하고자 하는 의지와 여성의 눈 앞에 나타나며 암시한 것을 참으로 만드려는 의지가 없다면, 여성과의 만남은 그저 아름다운 정서에 그치고 말 것이다. 이기던 지던, 일단 결과를 맞닥뜨리고 나면, 운명의 상은 우연의 형상{figure: 트럼프 카드의 그림패(킹, 퀸, 잭)를 의미하기도 한다 — 역자}이었던 것을 그치고 운수를 결정하는 현실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야욕적이고도 강력한 존재 의지’란 곧 진리의 조건이다. 허나 고독한 개인은 결코 세계를 창조할 힘을 가질 수 없다(자신을 미치광이, 광인으로 만드는 힘의 권능을 빌려 비로소 세계를 창조할 시도를 하노라). 복수(複數)의 의지의 묘한 일치는, 우연상의 묘한 일치 만큼이나 인간 세계의 생성에 불가결이다. 노름꾼들이 한데 모이어 노름판에서 교합하는 듯한 연인들의 교합만이 비정형의 교감으로 이루어져 살아 숨쉬는 현실을 창초해내노라(만일에 교합이 없다면 그리어 불행이야말로 최초의 관계가 으레 낳는 결과요, 불행 속에 사랑은 진실이로다). 더구나 두 연인의 교합, 연인 몇 사람의 교합은 뭇사람의 믿음에 옮겨붙어, 먼 옛적부터 민중의 마음 속에 있던 인물들에 의미를 더한다. 만인의 마음 속에 연인들의 운명을 그려내는 전설 속에서 사랑의 의미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 이 ‘야욕적 존재 의지’는 보통에 만연하며, 의도를 갖고 작용하는 의지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도다. ‘야욕적 존재 의지’란 곧 죽음 앞의 눈먼 용기이며, 목숨을 앗아가는 포화를 보고도 몸을 쳐드는 자를 따라 우연(hasard)에 몸을 맡겨야만 한다. ‘합’{ensemble: 패의 ‘조합’을 가리키기도 한다 — 역자}의 우연 발생에 대한 막연한 정열의 주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은 무모한(hasardé) 행위뿐이다. 패를 잘 섞고 뽑지 않는다면, 하물며 사전에 짜인 계획대로 섞여 고작 속임수가 되는 꼴이노라면, 좋은 패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노름꾼{joueur: 유희하는 자 — 역자}의 판단과 결정은 꼭 상대의 패를 모르고서 저지른 무모한 짓이어야 하는 것이다. 연인들의 비밀스런 힘과 교합이 갖는 의미란 사전 결의, 사전 계획의 결과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매춘과 결혼을 벗어나도, 연인들의 세계에는 노름판처럼 속임수가 만연하다. 뚜렷한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쉴세없이 속임수와 암계를 짜내는 속셈이며, 방자한 교태 따위는 생각조차 못 하는 사람들의 천진난만한 만남 사이에 오가는 미묘함, 섬세함이 수도없이 있는 것이다. 하나 순진한 무지야말로 유일하게 연인들이 있는 기적의 세계를 쟁취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노라.6

목적론적 경향, 방법과 목적이라는 규정, 이것들과 삶을 놓고 다투는 우연과 운, 마침내 숭고한 정열로 쳐일어나며, 삶을 차지하는도다. 지성이 이성의 예측력 속에 있는 우주를 느끼지 못한지가 한참 오래도 되었다. 존재 자체가 별로 수놓인 하늘과도 죽음과도 다름없는 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우연 속에 놓여 있는 제 모습도 바라다본다. 세속적 가치와 세속적 목표, 세속적 계획으로 때묻지 않은 우주의 상으로 된 황홀 속에 있는 제 모습을 바라다보는 것이다.

XIII. 운명과 신화

‘무시무시한’ 우연의 왕국에서 눈 돌리는 사람들을 떠올리노라면 기나긴 번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실상 사람들은 삶이 확고부동하여 오로지 적당한 계산과 결정에 달려있기를 요구하고 든다. 히나 이 ‘죽음에 대고 헤아린’ 생마저, ‘희망과 공포의 화염’ 속에서 연인과 노름꾼과 함께 불타오르고자 하는 욕구를 잊어버린 자들을 떠나버린다. 인간의 운명은 변덕스러운 우연이 기도(企圖)하기를 바라노라. 이성은 우연이라는 충만한 생명과 삶의 모험을 치우고, 실존의 난점에 대한 적당하고 공허한 해결법을 들여놓는다. 이성적 목표를 갖고서 하는 행위란 곧 필요에 따라 비굴하게 어찌할 수 없이 하는 일에 불과하고, 운의 상을 좇아서 하는 행위야말로 곧 화염처럼 살겠다는 욕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카라 테이블 앞에 앉아 자살할 맹키로 불타오르고 탕진함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니까. 패가 하녀의 추래한 모습이며 불운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조차도, 돈을 따고 잃게 만드는 그 모습은 운명을 효시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다(간혹 스페이드 퀸은 죽음을 의미한다). 존재를 유용한 행위의 속박에 버려두는 것이 도리어 비인간적이다. 인간 용력(勇力)의 일부분은 필연 허기, 추위, 사회적 구속처럼 사람으로써 가라앉여야만 하는 고통에 대해 걱정근심하느라 쓰기 마련이다. 종노릇을 헤어나는, 생(生), 노름하고 유희하는도다. 즉 생은 서로 맞물리는 우연 위에 자리하노라.

생은 생으로 노름하고 생으로 유희한다. 운명이 계획은 제출물로 실현되는 것이다. 한때 꿈 속 형상에 불과했던 것이 신화가 된다. 그리어 죽음밖에 모르는 지성의 유해가 애상적인 무지의 오류 따위로 간주하였던 살아 숨쉬는 신화, 신화적 허구(mythe-mensonge)는, 운명을 형상하고 존재로 화(化)한다. 합리주의 철학이 불변하는 속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비틀어버린 존재가 아닌, 성(姓)과 부칭(父稱)을 천명하는 존재. 끝없는 구속 속에서 지워져가는 이중의 존재. ‘고문하고, 사지를 자르고, 전쟁하는’ 중심지의 존재….

예술, 학문, 정치 따위로 만족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아직 신화가 남아있다. 사랑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세계이지만, 주변에 간섭하고, 참견하지는 않는다. 사랑 경험은 명철함도 고통도 불어나게 한다. 부패하는 사회와의 접촉 때문에 생겨나는 불행과 기진맨직한 공허의 인상을 불러오는 것이다. 하나하나의 고난으로 무너져내린 자에게, 신화는 유일하게 사람들이 집성하는 공동체로 퍼져 나가는 충만의 상을 되찾아주노라. 유일하게 신화야말로 신화를 통하여 서로서로 엮여 있는 사람들의 몸 속으로 입성하고, 사람들에게 똑같은 축원(祝願)을 주문하는 것이다. 신화는 춤동작 하나하나의 날날램이고, 존재를 ‘정열의 끓는점’으로 이끄매, 존재의 성스런 막역함을 면전에 비추는 비극의 감정을 교통한다. 신화란 운명의 성스런 형상에 불과하지도, 성상(聖像)이 찾아드는 세상에 불과하지도 않으니까. 신화는 공동체애서 유리될 수 없다. 신화란 그야말로 공동체의 요건이고, 공동체가 의례를 통하여 신화의 왕국을 지배한다. 만일 민중한마음이 축제의 광분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 현실을 신화로써 지어내지 아니한다면 신화는 허구에 불과하리라. 신화가 사람들이 지어낸 전설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 전설을 춤추고 전설을 행하며, 이 사람들에게 전설이 곧 살아 숨쉬는 진리라는 사실을 보노라면, 신화는 허구의 정반대인 것이다. 의례를 통하여 신화를 소유하지 못한 공동체는 무너져가는 진리를 갖고 있을 뿐이다. 막역한 존재를 공동체 속에 그려내는 신화적 우연의 총합, 그 우연의 총합을 생동하게 하는 존재 욕구를 가질 때, 공동체는 비로소 살아서 약동할 수 있다. 신화는 조각난 전체의 편린 따위에 동화될 수 없다. 신화는 총체적 존재와 단단히 메어져 있으며, 총체적 존재의 가지적 표현이다.

의례를 통하여 몸소 체험한 신화는 참된 존재를 효시한다. 그 속에서 존재는 나신으로 침대 위에 뉜 사랑해 마지않는 여인보다 덜 무섭게도, 덜 아름답게도 보이지 읺는 것이다. 참된 존재(presence)를 아우르는 성소의 어스름은 연인들이 틀어박힌 침실 속 어스름보다도 더 숨막힌다. 침소로부터 지(知)로 현상하는 것이 연구실의 학문과 저 멀리 떨어져 있듯, 성소로부터 지(知)로 현상하는 것도 연구실의 학문과 한참을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성소에 입성한 인간 존재는 우연의 장난으로 결정된 운명의 형상을 마주하노라. 학문을 정의하는 단정적 법칙들은 삶을 이루는 변덕스런 유희에 작용하는 법칙과 정반대다. 변덕스런 유희는 학문을 떠나 예술 속 형상을 만들어내는 광증과 우연의 일치를 이룬다. 예술이 인간을 얽매는 궁극적 현실과 참된 세상의 고등한 성격을 바라볼 때, 신화는 열등한 현실이 신화의 왕국에 몸 바칠 것을 주문(注文)하는 힘의 모습으로 인간 존재로 들어오는 것이다.

XIV. 마법사의 제자

사람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삶의 처량한 한순간을 기만적인 허구를 이어가는 일에 허비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는 수도 있다. 신화라는 인간의 옛 고향에 기이한 걸음 닥쳐오노라면, 그곳은 ’생경한‘ 신전 터보다도 황량하고, 사람 손길 닿지 않은듯 보이노라. 존재의 총체성을 나타내는 신화의 형상은 실제 경험의 결과는 아니니까. 과거야말로, ‘옛 사람들’이 창조한 문명이야말로, 고릿적 이래 도무지 닿을 수 없는 세상의 지식을 가져다주고 있으나, 그 세상 자체는 가져다준 바가 없다. 우리에게는 총체적 존재라는 것이 역사 속 내용과 희미한 정열의 빛을 먹고 자라난 일편 꿈에 불과할지도 모르련다. 금시대 사람들에게는 존재의 파편을 나타내는 무리떼의 주인 밖에는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없다. 하나 이 자명한 진리조차 생의 욕구를 지배하는 본정신에 좌우된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부정론자가 부정으로 통하여 에 이르고자 하는데 합당성을 취하기 위해서는 일차 시도에 실패가 따라와야 하리라. 하물며 {우리가} 도모하는 시도의 내용을 자세히 열거하고 보면 실현 가능한 요건밖에 필요하지 않다는 바를 알 것이다. ‘마법사의 제자’는 고난한 예술의 길에서 마주하였을 수많은 자들의 수많은 요구를 대면하지 않는다. 앞뒤가 맞지 않는 허구 속 인물이라고 신화 속의 상상력 부족한 인물보다 창작자의 의사와 의도가 덜 들어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화 창작의 요건이 더 엄정하다. 신화 창작 요건은 — 사람들이 멋모르고 생각하듯 — 집단 창작이라는 막연한 능력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성의 감성이 가진 준엄함으로, 사람들의 염원으로 지어진 부분을 도려내지 않은 인물의 의미를 다 부정할 것이다. 하물며 ‘마법사의 제자’는 (저이의 제일루 내밀한 요구에 사람들이 응해주지 않는다면) 시종여일 이런 준엄함에 익숙해져야 한다. 저이가 나아가는 곳에서는 비밀이 저이의 불가사의한 활동에 꼭 필요한 만큼 에로티슴의 격정에도 꼭 필요하다(을 구분하는 경계가 신화의 총체적 세계, 존재의 세계와 파편의 세계 사이를 가르고 있다). ‘비밀 결사‘ — 이는 바로 그의 활약으로 이루어지는 사회 현실의 이름이노라. 그러나 이 소설적 표현을 ‘간첩 단체‘라는 상투적인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비밀이란 국가 안보에 반한 모종의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유혹적인 존재로 이루어진 현실을 다루는 것이니까. 신화는 범속을 답보하는 파편 사회를 벗어난 의례 행위에서 탄생한다. 하나 제의에 현상하는 강력한 역동으로썬 (당의 정치 투쟁이 서로 모순되는 말이 넘실거리는 사막에서 죄다 끝나 사라지는 마당에) 잃어버린 총체성에의 귀환 외 다른 목표가 없는 것이다. 설사 치명적 반향이 세상의 모습을 바꾸어버린다고 하더라도, 신화 역동의 정치적 반향마저도 존재의 결실임에 틀림없다. 전술한 계획이 난삽하게 들린다면, 역설적인 절망의 순간 필수불가결인 노선의 가히 아찔한 독창성을 나타낼 뿐이노라7.


  1. 원고 : 개발해야 하는 직업이라는
  2. 원고에는 있는 아래 항(項)이 출판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외로 반동(反動) 의지는 유일하게 국가와 이념을 이루는 운명의 영웅을 이용한다. 신화 없이는 존재에 총채성이 있지 않으며, 모순적인 양상을 상관하는 한 신화를 행위 목적으로 간주할 수도 없다. 여지껏 반동 신화라는 것들은 죄다 해묵은 신화, 초라한 내용에 불과하며, 총체성을 취하려고 해도 단연 총체성이 없다. 반동이란 혁명 투쟁에 지나지 않으며, 세상을 바꾸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요구를 세상이 받아주게 하겠다는 의지와도 같다. 투쟁인은 투쟁을 감행하기 이전에 꼭 꿈을 잊어야 하는 것이다.
  3. 원고(삭제) : 이라는 완전한 백열의 불길에
  4. 원고 : 빛이 스며든
  5. 원고(삭제) : 자신이 부름받은 것을 아는 자들은 애끓는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에, 캄캄한 허구의 왕국에서 희미한 흔적을 좇으며 자멸해야 하느니라.
  6. 원고 : 몇 번이나 불가피하게 의도를 가졌던 기억이 충만한 생명의 활기로 지워져도, 맹목으로 삼켜낸 무지와 자명의 몫이 행복한 연인을 피살자와 살인자만치 묶어주는 강력한 마력을 담고 있다.
  7. 원고 : 잠정적으로 나타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