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敎正典

sacred texts

I


이교도적 부정신학

II


번역에 대하여

닉 랜드

≪소멸 갈증≫

I

서문


1

말 되는 철학의 죽음


3

위반


/

11

끊나지 않는 소통


참고문헌


조르주 바타유

제쥐브


3

└ 송과안


희생


4

≪도퀴망≫

꽃말


5

≪비평 사전≫

≪철학 연구≫

미궁


10

≪사회학 학회≫

≪아세팔≫

니체와 파쇼들


제안


앙토냉 아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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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의 환희 수행

조르주 바타유

역자 서문

본 번역은 1939년 ≪아세팔≫ 5호에 출간된 텍스트를 기본으로 했다. 드니 올리에가 편집한 갈리마르사의 전집은 베르나르 노엘이 1968년에 Mercure de France 사에서 편집하여 출판한 판본에 달린 55개의 각주 중 중요한 6개를 명시하고 있다. 이는 베르나르 노엘이 아세팔의 간행본에는 등장하지 않는 표현상의 차이를 바타유의 원고에서 발췌하여 일일이 달아놓은 것이다. 본 번역은 갈리마르사의 조르주 바타유 전집에 포함된 각주만 참고하여 추가하였다.

김도윤


Mercure de France 판 서문

다음 글은 1939년 6월 아세팔 5호에 처음 출판되었다. 총 24 페이지인 아세팔 5호는 <니체의 광증(La folie de Nietzsche)>, <전쟁의 징조(La menace de guerre)>, <죽음 앞의 환희 수행>을 포함하고 있다. 세 글 중 저자가 명시된 작품은 없지만 전부 조르주 바타유가 작성한 것이다. <죽음 앞의 환희 수행>이 이중 가장 중요한데, 이는 이 글이 조르주 바타유가 체계가 아닌 접근법으로 기술되는 범위 내에서 자기 자신에게 제기하는 근본적인 명상법(méthode de méditation)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신중성에도 불구하고 <죽음 앞의 환희 수행>은 그야말로 조르주 바타유의 내적 체험이 출발하는 지점이고, 아무리 낮게 평가하더도 명확하고 엄밀히 방법론을 개진함에 있어 첫 번째 진전을 보여주는 글이다. 따라서 이 글은 조르주 바타유의 ‘전기(histoire)’에 있어 불가결할 뿐 아니라 체험의 ‘이야기(histoire)’를 쓰는데에도 그러한데, 왜냐하면 이 글이 종교적 체험의 분명한 세속화에 대해 예리한 표현방식으로 단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 앞의 환희’는 오로지 배후 세계에 속하지 아니한 것들과만 관련이 있다··· ‘죽음 앞의 환희’는 근본부터 정점까지 칭송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한다. 죽음 앞의 환희는 배후 세계에 속한 지식과 윤리, 기체(基體), 신, 영속적 구원의 교리가 가진 견해와 의의를 배격한다. 죽음 앞의 환희는 필멸하는 것들의 예찬이요, 살갗, 알코올, 신비주의의 황홀경 상태에 대한 예찬이다.’

B. N.


 

이 모든 것이 나요, 한시에 나는
비둘기, 뱀, 돼지가 되고 싶어라
니체

사람이란 — 마치 아름다운 봄날의 아침처럼 — 온 세상에 파멸도 고통도 없고 기쁨으로 가득차 보이는 곳에 있을 때라면, 솟아나는 지복과 단순한 기쁨에다 스스로를 던져둘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사람은 이런 지복이 뜻하는 무게도, 허망한 안식을 구하고자 하는 헛된 근심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사람 안에서 잔악하게 눈을 쳐뜨는 것은 평화롭고도 청명한 푸른 하늘에서 자기보다 작은 새를 도살하는 맹금과도 같다. 사람은 거침없는 운동에 제 자신을 내던지지 않고는 삶을 다할1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께 이 힘이 두려워 마지않는 냉혹함을 갖추고 당인의 맨 안쪽까지 와닿는다는 것을 느낀다. 사람이 만일 지복을 넘어 나아가지 못하는 다른 존재들을 향해 고개를 뒤돌린다면 사람은 증오를 느끼지는 않는다만, 긴한 행복을 찬의하는 마음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삶을 다했다는 양 자만하고, 삶을 다했다는 양 보이기 위해 위험조차 없는 극을 벌이는 자들을 맞닥뜨릴 뿐이다 — 다함에 대해서라면 입만 나불거릴 뿐인 이 자들을. 하지만 혼미한 느낌에는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혼미한 느낌은 급속도로 피로를 일으켜 행복한 휴식을 얻으려 하게 되거나, 휴식의 외착 끝에 무통의 공허로 향하기 때문이다. 혹 사람이 이에 짓눌리지 않고 겁에 질린 채 다급하게 제 자신을 발끝까지 찢어발긴다면, 그렇게 더 무서운 것도 없는 죽음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밑으로 떨어지고도 온몸의 뼈가 벌벌 떨리는 극치까지 혼미한 느낌을 겪어낸 자 복되었노라. 사람은 갑작스레 상상치도 못했던 힘을 발견해낸다. 이 힘은 사람의 고통을 환희로 바꾸어버리매 환희로 말미암아 마주하는 것들을 얼리고 현영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야심으로는 냉혈하리만치 찢기는 고통 속에 삶이 다하는 것을 지켜보는 이 사람을 사로잡을 순 있어도, 극한의 운만이 놀릴 수 있는 그런 권능을 바랄 수는 없다. 사람을 휴식 바깥으로 내쳐버리는 이 파괴적 결의가 필연 혼미한 느낌이나 죽음 속으로의 때없는 추락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결의는 사람 안에서 행위와 힘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고, 이에 비롯하여 사람은 스스로에 가혹하게 헌신하매, 그 움직임이 마치 맹금의 부리만큼 날선 채 사람에게로 끊임없이 닥쳐온다. 명상이란 때로 잔잔하면서도 때로 폭풍같이 격렬한 바탕에 불과할지니, 명상을 통해 언젠가는 사람의 발악이 내비치는 졸속한 힘을 시험에 붙여야만 한다. ‘죽음 앞의 환희’가 내면의 난폭한 힘으로 변모한 자의 비의적 존재는, 영원의 기운을 선사한다는 기독교인들의 지복에 비적할 자족한 지복을 맞닥뜨릴 리 만무하다. 죽음 앞 환희의 비교도는 인간으로서 매 순간 참으로 경쾌한 웃음의 상태에 있으며, 얻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아는바 근심에 가득 찬 자라고 할 수 없도다. 그러나 삶의 총체성은 — 이는 위해로 바뀌지 않을 수 없는 행위로 말미암아 다하는, 황홀경에 다다르는 명상이요 맑은 지각이니 — 쌀쌀하게도 사형수의 죽음만큼이나 사람의 운명이로다.

뒤따르는 글은 자체로썬 ‘죽음 앞의 환희’의 비교적 수행에 대한 입문 의례가 아니다. 입문의 길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글은 단 한 부분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한다. 구승(口承) 입문은 자체로도 어렵고, 단 몇 쪽 만으로 대단히 모호하고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그 표상 밖 다른 것을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체로써 아랫글은 수행이라기 보다는 관조적인 황홀경 상태에 대한 간단한 설명에 불과하다. 이 설명은 주어진 것 외로, 다시 말해 자유로운 것 외로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 단지 첫 번째 글만이 수행이라고 부름 직할 것이다.2

여기서 ‘죽음 앞의 환희’라는 주제와 그 수행에 대해 신비주의의 말을 빌지만, 이는 이 수행과 아시아 및 유럽의 종교 사이의 정동적 유사성을 상징할 뿐이다. 심오한 진실로 가장된 전제와 지금 이곳의 삶밖에는 다른 대상이 없는 환희를 연결할 이유가 없다. ‘죽음 앞의 환희’는 오로지 배후 세계에 속하지 아니한 것들과만 관련이 있다. 이는 황홀경의 탐구를 추구할 수 있는 지적 양심의 유일한 길이다.

더군다나 어떻게 한결같이 배후 세계와 관련 있는 것 내지 신이나 신과 닮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자기를 살해하는 시간과 함께 춤추는’ 자의 복된 멸시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자명한 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유의 — 재빨리 도색적인 방종으로 도망가야만 했던 — 겁 많은 신성은 이제 온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난봉질의 ‘신성한’ 공포와 하나된 성스런 도취의 웃음밖에는 남지 않았도다. 고상한 체하는 것이 삐뚤어진 이들을 구원하리라도, 벌거벗은 여자애들과 위스키에 무섬증을 느끼는 이들은 ‘죽음 앞의 환희’와는 별 관련이 없으리라.

참으로 행복한 자아의 상실을 낳는 것은 추잡하고 파렴치한 신성이다. ‘죽음 앞의 환희’는 근본부터 정점까지 칭송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한다.3 죽음 앞의 환희는 배후 세계에 속한 지식과 윤리, 기체(基體), 신, 영속적 구원의 교리가 가진 견해와 의의를 배격한다. 죽음 앞의 환희는 필멸하는 것들의 예찬이요, 살갗, 알코올, 신비주의의 황홀경 상태에 대한 예찬이다. 죽음 앞의 환희가 취하는 종교적인 형태들은 굴종의 도덕이 끼어들기 이전의 소박한 형태를 갖춘 것들이다. 죽음 앞의 환희는 인간이 불구자 행세를4 그만둘 적에, 즉 의무 노동에 영광을 바치고 다음날에 대한 두려움에 스스로 거세되도록 방기하길 그만둘 적에 인간’인(est)’ 비극적인 환희를 소생해낸다.

1

« 소멸에 다 이르기까지 나 자신을 평화에 바치노라.

» 강이 바다로 흘러가듯, 별이 암야로 폭발하듯,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잡소리가 죽음으로 유실된다.
» 온 작용의 침묵 속에 투쟁을 향한 기력이 다하고 있다.

» 어둠의 미지에 들듯 나는 평온에 든다.
» 나는 어둠의 미지 속에 쓰러진다.
» 나 자신이 이 어둠의 미지가 된다. »

2

« 나는 죽음 앞의 환희다.5

» 죽음 앞의 환희가 나를 움직인다.
» 죽음 앞의 환희가 나를 무너뜨린다.
» 죽음 앞의 환희가 나를 소멸시킨다.

» 나는 이 소멸에6 머무르며, 이곳을 기점으로 자연을 복수(複數)적이고 끊임없는 고통으로 나타나는 힘들의 유희로 표상하노라.

» 알 수도 없고 밑바닥도 없는 이 공간 속에 나는 이렇게 제 자신을 천천히 잃어버리고 있다.
» 나는7 세상의 근본점에 도달한다.
» 나는 죽음에 침식당한다.
» 나는 열병에 침식당한다.
» 나는 어두침침한 공간에 흡수당한다.
» 나는 죽음 앞의 환희 속에 소멸한다. »

3

« 나는 죽음 앞의 환희다.

» 창공의 깊이와 파멸한 우주란 죽음 앞의 환희다 — 만물은 근본적으로 분열(分裂)하였다.

» 창공에서 어지럽게 돌아가는 지구를 상상하노라.
» 홀로 미끄러지고, 돌아가고, 자멸하는 하늘을 상상하노라.
» 호흡을 잃어가며 자전하고 발광하는 알코올과 같은 태양.
» 자멸하는 차디찬 빛의 난봉질과 같은 창공의 깊이.
» 스스로를 파괴하고 소진하고 살해하고 매 순간 이전 것을 소멸하고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입고서야만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들.
» 스스로조차를 내 안에서 벌어지는 장대한 피의 축제 속에 끊임없이 허물고 태워버리는 나 자신.

» 내가 죽는 그 차가운 순간을 상상하노라(1).»

(1) 어느 날 밤 꿈에서 X는 벼락이 자기를 꿰뚫는 것을 느낀다. 그는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놀라리 만치 무너지고 현영된다. 그 순간 그는 상상치도 못했던 것을 획득하지만 깨어나고 만다.

4

« 내 앞에 놓인 한 점에 정신을 집중하고 이 점을 모든 존재, 모든 합일, 모든 단절과 모든 고통, 모든 충족되지 않는 욕망, 모든 죽음이 있는 기하학적인 지점으로 상상한다.

» 나는 이 점에 더욱더 집중하고, 사랑하는 이의 삶과 죽음 둘 모두가 하나됨이요, 폭포수 같은 폭발력인 이 점 안에 없는 다른 어떤 이유로든 내가 삶을 지속하길 거부할 정도로 이 점 안 존재의 근본적인 사랑이 나를 불태운다.

» 또한 동시에 이 점에 존재하는 것에서 오로지 순수한 난폭한 힘, 내재성, 무한한 심연 속 내재성으로의 추락만이 남아있을 때까지 모든 외부 표상을 벗겨내야만 한다 — 점 속에서는 무(無)인 것, 즉 사라진 것, ‘지나간 것’의 폭포를 끊임없이 흡수하고는, 똑같은 움직임 아래 곧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을 움켜쥐려 부질없이 열망하는, 급작스런 사랑의 현현을, 끊임없이 매음하는 이 점으로부터.

» 자족적 사랑의 불가능성이란 다함으로의 도약을 향한 지표임에 동시에 모든 환상을 무(無)로 만드는 것이다. »

5

« 만일 내가 현영하는 환영과 후광 속에서 황홀경에 취한 채 기진맥진하여 죽어가는 자의 얼굴을 상상한다면, 이 얼굴로부터 사방으로 퍼져 나오는 빛은 자연히 하늘의 구름을 비추고, 그 옅은 미광은 태양볕만큼이나 강렬해진다. 이 상상 속에서 빛이 광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광채를 잃어버리는 한 죽음은 밝은 빛과 같은 본질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생명의 섬광이 미약한 존재를 꿰뚫고 현영하기 위해서야 죽음 아닌 유실 따위가 불필요하다. 오직 죽음이야말로 미약한 존재를 뿌리 뽑음으로써 안에서 생명과 시간의 힘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따라서 나는 마치 우주가 빛의 거울에 불과한 것처럼 죽음의 거울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길 그치노라. »

6. 헤라클레이토스적 명상

« 나는 전쟁이다.

» 그 가능성에 한계라곤 없는 인간의 몸부림과 흥분을 상상하노라. 이 몸부림과 이 흥분이란 오직 전쟁을 통해서만이 진정될 수 있다.
» 교란할 대상을 무너뜨리고 구역질로 들어차 탈진할 정도로 학대하는 무한한 고통과, 피와 쩍 벌어진 시체가, 사정(射精)의 상(像)에 베푸는 선물을 상상하노라.
» 머리가 불에 붙은 채 소리 지르는 여자를 닮은, 우주에 투사된 지구를 상상하노라.
» 도를 넘어 저 스스로를 파괴하고 소진해 버리는, 여름과 겨울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고통과 죽음을 만들어내는 지상의 세계 앞에서,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회전 성체(星體)로 이루어진 우주 앞에서, 나는 우주의 운행 자체가 내가 죽기를 요하는 이 잔인한 영광의 지속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이 죽음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눈부신 사멸이요, 이 세상 속에 사는 모든 것들의 존재함의 환희로다. 마치 나 자신의 생명이 모든 곳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스스로를 소멸에 바치기 요하듯이.
» 때부서졌으나 현영되어 세상과 하나된 피로 뒤덮인 나 자신을, 한시에 끊임없이 죽이고 죽임당하는 시간의 먹이이자 시간의 턱인 나 자신을 상상하노라.
» 도처에 곧 내 눈을 멀어버릴 폭탄이 널려있다. 내 두 눈이 내파(內破)하지 않는 사물들이 계속하여 존재하라고 요구하리라 생각할 적에 나 웃노라. »


  1. ACCOMPLIR
    프랑스어 동사 ‘accomplir’는 ‘이행하다’, ‘끝마치다’, ‘행하다’, ‘완성하다’ 등 여러 뜻을 가지고 있다. ‘accomplir’에 대한 번역어로 ‘다하다’를 택함은 이 한국어 동사가 ‘수명이 끝나다’, 즉 ‘죽음 앞에 삶이 다하다’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어떤 일을 완수하다’, ‘어떤 일을 위해 힘을 모두 들이다’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원고에는 이 행이 괄호 안에 들어있다. (전집 주)
  3. 원고(삭제) : 이는 필멸하는 살갗의 예찬이다.
  4. 원고(삭제) : 불구자 행새를 하며 다음날에 대한 두려움에 거세당하길
  5. 원고(삭제) : « 나는 죽음 앞의 환희다.
    « 나는 취해 있다.
    « 나를 죽음 앞의 환희 속에 잃어버린다.
    « 죽음 앞의 환희가 나를 움직인다.
  6. 원고(삭제) : 혼미감에 내 몸을 풀고 소멸 속에 가능한 한 오래 흡수된 채
  7. 원고 : « 나는 세상의 근본점에 도달한다
    « 죽음에 침삭당하고
    « 열병에 침식당하고
    « 어두침침한 공간에 흡수당하고
    « 죽음 앞의 환희 속에 소멸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