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敎正典

sacred texts

I


이교도적 부정신학

II


번역에 대하여

닉 랜드

≪소멸 갈증≫

I

서문


1

말 되는 철학의 죽음


3

위반


/

11

끊나지 않는 소통


참고문헌


조르주 바타유

제쥐브


3

└ 송과안


희생


4

≪도퀴망≫

꽃말


5

≪비평 사전≫

≪철학 연구≫

미궁


10

≪사회학 학회≫

≪아세팔≫

니체와 파쇼들


제안


앙토냉 아르토

부록

색인


保管所

Archive

ASSIMILARE

태양의 저주

닉 랜드
참조 부호

[로마 숫자, 아라비아 숫자] 형식으로 되어 있는 참조는 갈리마르 출판사의 바타유 전집(Œuvres complètes)의 권 번호와 페이지 수를 가리킨다.

작품 모음집을 가리키는 참조 부호는 머리글자 이하 같은 형식으로 되어있다. 목록은 아래와 같다.

A
B
H
K
L
N
S
Sch

아퀴나스
볼츠만
헤겔
칸트
루카치
니체
사드
쇼펜하우어

모음집이 아닌 개별 작품을 가리키는 부호는 아래와 같다.

자본
CG
Ch
DH
Gr
Hay

마르크스, 자본론 1권
Augustine, The City of God
Gleick, Chaos
DH Walker, The Decline of Hell
Marx, Grundrisse
Hayman, De Sade

PES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Pol
R
SD
Spu
TC
TE

Aristotle, Politics
Rimbaud, Collected Poems
Ragon, The Space of Death
Derrida, Spurs
Miller, The Tropic of Cancer
Cioran, La Tentation d’Exister

저자가 인용한 작품 중 번역본이 있는 경우에는 역자 임의로 번역하는 대신 출판된 책을 이용했다. 저자가 인용한 모음집은 똑같이 편집된 국역본이 없으므로 개별 작품 번역본을 사용했다. 저자가 인용한 내용과 번역서의 내용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 저자에 의도에 맞게 번역을 수정했다. 목록과 부호는 아래와 같다.

국가
순이비
저주
정신

플라톤, 국가
칸트, 순수이성비판
바타유, 저주받은 몫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니체, 힘에의 의지


식물에서 초록빛을 띠는 부분이 지표와 해양에서 휘황찬란한 태양 에너지의 상당한 부분을 끝없이 가용한다. 이 가도를 통하여 빛이 — 즉 태양이 — 우리를 낳고,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우리에게 잉여를 불러온다. 이 잉여, 이 생명이란 곧 햇빛의 결과인 것이다(사실상 우리는 태양의 결과에 불과하다) [VII 10]. 태양빛이란 곧 우리 자신이며, 끝에나마 그 본질과 태양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태양빛은 스스로를 내놓아야만 한다, 즉 아낌없이 소멸해야만 한다 [VII 10].

고대 멕시코 사람들은 인간을 우주의 영광과 하나로 결합했다. 태양은 희생제의적 광기의 과실이었다 […] [VII 192].

철학에 플라톤의 ≪국가≫ 7권에 등장하는 설화보다 더 유명한 설화는 없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기이한 꿈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이야기는 ‘지하의 동굴 모양을 한 거처에서’ [국가 448] 시작한다. 이곳에는 수인〔囚人〕들이 목을 결박당한 상태로 볕이 들지 않는 곳에 갇혀 있다. 따라서 이들은 불로 인해서 동굴 벽면에 투영되는 그림자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여러 단계의 환영을 지나 올라서 태양의 불빛을 향해 나간다는 이야기야말로 온 철학이 기획한 신화중에 중에 제일 강력한 신화이고, 정치적 투쟁이기도 하다. 하물며 소크라테스는 이 정치 투쟁에서 죽음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동굴에 갇힌 수인들이 제 우둔함을 그렇게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소크라테스는 ‘그래서 자기들을 풀어 주고서는 위로 인도해 가려고 꾀하는 자를, 자신들의 손으로 어떻게든 붙잡아서 죽일 수만 있다면, 그를 죽여 버리려 하지 않겠는가?’ [국가 453] 하고 묻는다. 글라우콘은 두말하지 않고 이 주장에 생각을 같이한다. 그러나 폭력이 꼭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필경 철학자란 태양에 대해 순수 지적인 관심뿐만 아니고 다른 관심도 두고 있는 법인 게다. 태양을 직접 보았다는 것은 쟁취이고 또 자격이요, (사람들이 언짢게 받아들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지구 밖에서 날아온 권좌로의 초대장인 것이다.

또한 이렇게 해서 우리와 여러분의 이 나라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경영될 것이니, 결코 꿈속에서 경영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오늘날 많은 나라가 통치(지배)하는 것과 관련해서, 마치 그것이 굉장히 좋은 것이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들 암투를 하며 반목하는 자들에 의해서 경영되듯 말이오. 그러나 아마도 진실은 이런 것일 것이오. 한 나라에 있어서 장차 통치하게 될 사람들이 통치하기를 가장 덜 열망하는 그런 나라가 가장 잘 그리고 제일 반목하는 일이 없이 경영될 게 필연적인 것이지만, 이와 반대되는 자들을 지배자들로 갖는 나라는 역시 반대로 다스려질 게 필연적이오 [국가 459-460].

마치 깜깜한 어둠 속에 묶인 매듭처럼 이 이야기 속에는 빛, 욕망, 정치가 서로 얼기설기 얽혀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태양으로부터 힘을 얻으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면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바타유 가로되, ‘독수리는 제우스의 동물인 동시에 프로메테우스의 동물이매 고로 프로메테우스가 하늘에서 불을 훔치려는 독수리(아테우스〔Atheus, 무신론자〕–프로메테우스)라’ [II 40].)

차양, 반사, 은유를 통하지 아니하고 해를 곧바로 응시하는 것 — ‘해를 물그림자나 다른 자리에 있는 해의 투영으로서가 아니라 제자리에 있는 해를 그 자체로서 보고, 그 본질을 관찰[하는 것]’ [국가 451] — 이야말로 진실에 높은 가치를 쳐주던 태도와 억척스레 아우러지던 유럽의 야망이었다. 야망이든 소망이든 결국 욕망(욕동)을 표상의 수준에서 재구축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태양을 향해 탁 트인 시야를 뜨고 싶어 하는 것, 여기에는 무언가 더한 것이 있다. 목적론을 통하여 표상 본디를 통합하는 것, 바로 그것이 있는 것이다. 태양이란 진리와 등가인 순수한 빛이요, 실재와 지 사이 완전무결한 일치, 외재성의 이름이자 현현이다. 태양을 관조한다는 것은 계몽주의1를 완전히 긍정하는 것이리라.

태양의 황금빛 분노를 쳐다본다면 시각은 빛 어둠 쪼가리로 갈기갈기 찢기고 마리. 백색 태양은 빛의 조각보처럼 설켜서는 실명의 윤곽에 걸쳐 아스라이 둥둥 떠다닐 뿐이요, 이것이 빛나는 태양인 것이라, 우리가 가질 것을 주시고, 쏟아내신 것은 몸에 자양이 되고, 눈에 (동화하여 느낄 수 있는) 감각이 된다. 플라톤의 태양이 바로 이런 태양이다. 정제된 태양, 순수의 정수, 미〔美〕와 선〔善〕의 은유, 그런 태양. 온 자연이 시들고 쇠퇴하는 동기〔冬期〕가 되면 인간은 태양께서 빛의 만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에 돌아오시기를 기다린다. 옛사람들이 그러했듯 가을 추수 너그러우심이 이것을 알아보고 경배를 드리는 듯 하다. 자양의 광휘, 그 심장 속에 묻힌 또 다른 태양이 있으니, 오묘한 태양, 어두운 태양, 전염병의 태양이다. ‘태양은 검다’ [III 75] 고 바타유를 이렇게 울부짖게 만드시는구나. 우리 이 두 번쩨 태양 — 저주의 태양 — 에서는 빛이 아니라 역병을 선사 받으매 뭐든 간에 이 태양이 우리에게 끼얹는 것은 꼭 다시 다른 곳에 끼얹어버려야 한다. 우리가 검은 태양에서 기운을 퍼마시면 파멸적인 정념이 생겨나고, 자기를 불살라 소모해 버려야만 할 것 같은 욕동에 오감이 꽂혀버린다. 만일 ‘다 찾아봐도 태양이 문학의 유일 대상[인]’ [II 140] 것이라면 이는 빛나는 광휘보다는 병독 때문이고, ‘태양이란 죽음일 뿐’ [III 81]이라는 ‘사실’ 때문이라. 소크라테스 — 그이와 축적을 향한 그이의 희망 — [으]로부터 바타유의 말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가. ‘존재의 병마가 검은 태양을 줄줄 토하네’ [IV 15].

백열광은 계몽적이지 않다.2 그런데 ‘현전’이라는 영 섬세하지 못한 철학의 도구가 우리들의 눈을 퇴화시켜서, 빛의 짙은 물질성마저 지성에 닿지 못할 정도다. 플라톤조차도 ‘눈부심 때문에’ [국가 450] 빛이 주는 충격이 (처음에는) 고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현상학은 이런 일말의 실토마저 체계적으로 지워버렸다. 그러나 도대체 왜 부재/현전〔absence/presence〕이라는 대립이 강렬한 빛의 작용을 측정하는데 가장 적합한 기준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는 도무지 자명하지가 않다. 마치 우리 아직도 고대 헬레네 사람들인 것 같지 않은가. 지각의 외향성 운동을 시각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외인성 에너지로 생긴, 달아오른 망막의 상흔이 아니라.

우리 기원은 태양이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앞으로 보게 될 것이다) 동굴조차도, 미궁조차도 태양이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말하면 기원이란 곧 빛이지만, 이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눈을 뜨기 한참 전부터 우리 몸은 태양의 젖을 빨았다. 우리 눈이 아직 태양에서 분출한 것과 교접하지 않은 태양의 감로인 것처럼 말이다. 인과의 흐름은 어지간히 ‘자명하다’ (치명적이다). ‘결과값의 임계점에 놓인 태양 에너지 폭발이 바로 인류다’ [VII 14]. 눈은 기원이 아니라 낭비다.

전집 맨 앞에 있는 텍스트는 바로 바타유가 맨 처음 출판한 책 ≪눈 이야기≫다. 이 책은 1928년에 로드 오슈〔Lord Auch〕라는 가명을 달고 세상에 등장했다. 따라서 ≪태양 항문≫ (1931), ≪부패한 태양≫ (1930, 위에 인용), 사후에 출판된 ≪송과안≫ (1927년에서 1931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원고 묶음) 등 초기 작품과 함께 묶을 수 있겠다. 위에 명시한 작품들의 공통 주제는 시각이라는 한계를 벗어나는 태양의 궤적에 시각을 바쳐, 표상 담론을 가져다가 그 {표상 담론} 역사의 야망과 불가분한 어둠 속에 처박는 것이다.

≪송과안≫이 허구면서도 역사이듯 ≪눈 이야기〔Histoire, 역사〕≫는 눈의 이야기이자 눈의 역사이다. 모든 역사는 이야기다. 이야기가 역사를 벗어난다거나, 참된 표상의 자리를 차지하는 실명 속에서 완성되는 역사가 곧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말이 아니다. ≪눈 이야기≫는 사제의 눈을 적출하는 대목에서 절정을 맞는다. 이 눈은 ‘여주인공’ 시몬의 음문〔陰門〕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glisser〕’. 한 번은 자기 손으로 밀어 넣고 나중에는 에드먼드 경(영국 출신 탕자)이 넣는다. 어둑한 갈증이요 지하를 흐르는 태양의 욕동이 시각을 찢어발기고, 살갗이라는 암야의 미궁 속으로 집어삼킨다.

유사하게 ≪송과안≫에서는 ‘오로지 태양을 행한 눈’이 — 정오에 다다른 태양의 맹렬한 정점을 향해 — 열림으로써 파열을, 실명이라는 파괴적 몰락을 불러온다. 낭비의 영광이라는 정점에 이른 태양, 그 진리란 효용이 없는 낭비의 필연성이다. 이 정점에 이르러 이성적 절제가 일식을 일으키는 속에서 천상의 고귀한 것과 땅의 저열한 것이 공모한다. 송과안은 인간과 동의〔同意〕인 상승 운동을 끝장내고, 안구에 수직성을 되찾아줌으로 하여 이성 시대의 정점에 군림하고, 천상을 향하여 열린다(그리고 정점에 군림하는 동시에 태양의 진리, 즉 작열하는 추의 쇄도에 적출당한다).

나는 눈이란 것이 끔찍한 화산 폭발처럼 두개〔頭蓋〕의 꼭대기에 있는 것을, 엉덩이나 배변에 결부된 음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성질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상상했다. 광명의 정점에 있는 태양을 주시해 보니 눈이란 섬광〔eclat〕의 극치에 이른 태양의 상징이었고, 내 두개 꼭대기에서 작열하고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II 14].

이처럼 태양의 대변안〔大便眼〕이 화산 내장에서 뜯기면서도 터져 나오고, 손가락으로 제 두 눈을 뜯어내는 인간의 고통마저 태양이 제 항문으로 분만해 대는 것보다 기이하지도 않도다 [II 28].

이 초기 작품에서는 표상과 객체의 완전한 일치 — ‘눈먼 태양인가 눈부신 태양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II 14] — 가 직접 응시로, 즉 포착〔apprehension〕3을 가지고 감당 불가능한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기로 만들어 완전화〔化〕하는 태양으로의 이카로스적 추락으로 사유된다. — 표상보다는 차라리 충만에 가까운 — 태양과의 교접 속에서 지각 주체와 지각 대상이 수미일관 속 하나가 되고, 우리가 맞다고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실명으로)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주장하듯 무의식은 — 시간처럼 — 모순을 알지 못한다. 2차 과정(표상)을 차지하는 시각을 제외하면 오로지 1차 과정(바타유의 태양)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이 2차 과정이라는 것도 — 1차 과정 수준에서는 — 1차 과정일 뿐이다. 이는 논리로 다룰 수 없는 난란〔爛爛〕함으로, 현실을 기준으로 두고 행동을 구별하려고 노력하는 이성 관점으로 보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비논리적으로 태양과 동일한 (동일해야 하는) 리비도적 일관성이란 곧 불결하고 음란한 차이의 미궁 속에 헝클어진 아리아드네의 실이다. ≪태양 항문≫의 시작부에서 바타유는 이렇게 언급했다.

사고로 골몰하는 뇌 속에서 문장이 순환하기 시작한 이래부로 총체를 지각하려는 과정이 이어져 왔다. 이는 계사 도움으로 문장 하나하나가 사물을 다른 사물과 연결한 까닭이다. 만일 우리가 사고를 사고의 미궁 안으로 이끄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남긴 흔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면 모든 것이 서로 분명히 얽매어지리라 [I 81].

제방을 강에다 짓듯 인류의 온 노력은 태양에다 지어졌다. 그런데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태양 사회라고 하면 떠올리는 의미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지닌 태양 사회 — 태양의 사멸핵〔死滅核〕에 시선이 꽂힌 사회 — 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면, 처음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리라. ‘[우리 안에 있는], 태양처럼 선행〔biens, 재산〕과 생명을 아낌없이 헤프게 나눠주며 살라는 영광에의 의지’ [VII 193] 를 받아들인다면 사회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 폐쇄적 사회 체계가 태양의 선혹〔煽惑〕이라는 불타는 심장 속으로 지나치게 깊숙하게 들어간다면, 기반 역할을 하는 1차 억압을 매어놓고 있던 코를 다 헤쳐 풀어버리면서 파멸하고 마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근본적 공격성에 사치/도덕 규제의 열기와 분노가 얽혀 있던 것을,이웃을 향해 돌려서, 열기와 분노가 불타오르는 화로 변하여 이웃 사회로 밀어닥치게 둔다면, 한 사회가 태양을 면전에 두고도 존속할 수도 있는 법이다. 바타유는 아즈텍 문명에서 똑같은 경향을 발견해 냈다. 아즈텍 문명의 희생제의적 사회질서는 군사 폭력 덕분에 계속되었다. ≪저주받은 몫≫ — 태양사회학에 대한 바타유의 대작 — 에서 바타유는 아즈텍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제들은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희생제물을 죽였다. 희생자들을 돌로 된 제단 위에 눕혀놓고 흑요석으로 만든 칼로 가슴을 찔렀다.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을 파내어 태양을 향해 들어올렸다. 희생제물 대다수는 전쟁포로였기에, 태양의 생명을 위해 전쟁이 필수적인 것이라는 관념을 정당화시키기도 했다. 그렇기에 전쟁은 정복이 아닌 소진/소모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고, 그래서 멕시코인들은 전쟁이 중단된다면 태양 또한 더 이상 빛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VII 55, 저주 77].

바타유의 세밀한 조사 아래 밝혀진 내용은 아즈텍 문명에 대한 변론도 아니고 설명도 아니다. 바타유가 아즈텍 문화를 독해하는 방법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경제학적 밀접성이요, 태양과의 결탁〔結託〕이며, 모든 사회를 별이라는 근본에 엮어내는 계보학적 가통〔家統〕을 추적 탐구하는 것이다. 아즈텍인이 잔포한 행동에 꽂히게 만든 원초적인 에너지는 — 축적 문화의 기관〔機關〕을 통한 통제를 거쳐 — 반대로 바타유가 연구에 매진하게 만들기도 한다. 바타유의 내장을 찢고 갉아먹는 에너지의 궤적이란 암흑 공동체의 녹아내린 땅덩이로다. 먼 옛적부터 오늘까지 지구 표면에서 벌벌 요동치던 온갖 것들에 그이를 매어놓구나.

아즈텍 문명에 기이한 보편성을 부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 맹목적인 공포다. 공포란 곧 겉으로 표명할 수 없는 사회 동력의 원천을 나타낸다. ‘아즈텍 사람들의 눈에는 태양 자체가 희생제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VII 52, 저주 72]. 아즈텍 사회의 에너지는 목적 없는 살육에 바쳐졌다. 아즈텍인들은 살육 속에서 태양의 진리를 지상에서 실현했다. 서양인의 눈에 아즈텍인의 피에 대한 갈증은 도무지 변호할 수 없는 것, 괴상망측한 신화에 근거한 것으로, 툭하면 거짓에 경도되는 인간의 경향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에 불과할 것이다. 아즈텍 문화가 주관적 신화적 환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독해해도 문제는 없겠다만, 바타유에게는 소멸 갈증이라고 하면 태양과 동일한 것이다. 소멸 갈증이란 인간이 태양을 향해 기울이는 욕망이 아니라 태양의 궤적 그 자체, 즉 육생사〔陸生史〕4의 무의식적 주체인 태양이다. 태양의 지배력을 당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범민과 교양을 못 배운 자들이 인식하기로는 태양이 곧 영광의 상〔像〕이다. 태양은 환하게 빛난다. 이런 연유로 영광도 태양과 비슷하게 빛을 발하며 환하게 빛나는 것으로 표상한다’ [VII 189]. 이것이 ‘화염 속에서 제의적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태양의 광채에 인유〔引喩〕하는 것이 곧 인간이 우주의 영광에 회답하는 방법[일]’ [VII 193] 정도다. ‘인간 제물을 바치는 제의는 현실 질서와 자제가 없는 폭력 운동이 일어나는 기간을 겨루는 바로 그 순간’ [VII 317] 이기 때문이다.

바타유가 쓴 책에서 ‘희생’과 비슷한 위치에 자리하는 단어는 바로 ‘낭비〔dépense〕’라는 단어다. 이 단어는 바타유가 일반경제 내지 태양경제라고 명명하는 사유망 속에서 작용하고 있다. 일반경제 내지 태양경제란 곧 낭비의 경제학인데, 그 윤곽은 아까도 운운한 적이 있는 — 좀 버시시하면서도 참으로 아름다운 ‘이론’서 — ≪저주받은 몫≫에서나 완전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바타유는 이 책에 이렇게 썼다. ‘태양복사는 일방향적 성질을 갖고 있다. 태양복사는 계산하는 법 없이 소멸하고, 대응물 없이 소멸한다. 태양경제는 이 법칙 위에 세워져 있다’ [VII 10]. 태양이 수득을 바라지 않고 우리에게 빛을 펑펑 끼얹기 때문에 ‘생산된 에너지의 총합은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보다 크[며]’ [VII 9], 이는 ‘결국 우리[가] 태양이 낳은 결과에 불과하[기]’ [VII 10] 때문이다. 과잉, 즉 잉여는 언제나 생산, 노동, 자중, 교환, 결여에 앞선다. 욕구란 결코 기정사실이 아니며, 부를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원초적 임무는 생산도 생존도 아니다.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버릴 듯이 쏟아지는 풍요의 — 에너지의 — 홍수를 다 소진/소모하는 것이 생명의 본 임무다. 바타유는 이것을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술한다. ‘세상은 […] 썩어 넘치는 부에 찌들어있다’ [VII 15]. 낭비, 즉 희생제의적 소모라고 하는 것은 강변〔强辯〕도, 교환도, 교섭도 아니다. 낭비란 태양의 궤적으로 에너지를 되돌리는 무제약적 허비이며, 육생이라는 체계 — 인간의 제한경제로 정점에 이르는 체계 — 가 일순간 동안 정지시켜 놓은 소산 운동 속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다. 에너지의 유일한 결말은 주색〔酒色〕적 파멸뿐, 즉 축적 활동으로 잠시 중단할 수 있을 뿐인 소산 과정뿐이며, 축적 활동의 정점은 자본주의 부르주아의 형태를 취한다. 한데 그것도 잠시뿐이다. 태양경제에 있어 ‘잉여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출발점’ [VII 12] 이다. 그리고 잉여, 잉여란, 결국에는 소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부의 무제약적 흐름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일순간의 거부야말로 주권의 부정이요, 노예적인 차연〔differance〕이며, 막바지까지 연기하는 꼴이다. 에너지 소산의 불타는 가도는 이 가도를 초월하는 무언가의 이득을 위해 억제된다. 예컨대 미래, 약탈계급, 도덕 목표의 이득을 말하는 것이다. 에너지는 미래의 편익을 위해 사용된다. ‘도구를 사용하는 목적에는 언제나 도구의 사용과 같은 의미가 있다. 사용할 때마다 도구에 효용이 결부되고, 이 고리는 계속된다. 작대기로 땅을 파는 것은 식물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식물은 나중에 음식이 되기 위해서 재배하는 것이고, 음식을 먹는 것은 식물을 재배한 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 이렇게 실없는 무한 후퇴만 보더라도 유익성과 무관한 진정한 목적이란 것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 깨닫기 어렵지 않다’ [VII 298].

유럽이 초월, 논리적 부정, 순수 구분, ‘진실’에 집착하다가 낳은 결과 중 하나는 마냥 우쭐해하면서 질리지도 않고 항상 완성 직전에 다다랐다고 주장하는 물리학〔physics〕이다. 이 주장이 나타내는 현실 경멸의 깊이는 도무지 잴 수가 없다. 도대체야 무슨 리비도의 재앙이 일어났길래 물리학자가 자연의 비밀이 거진 다 드러났다고 말하면서 미소 지을 수가 있는가? 만일 이런 견해가 과대망상증자의 정신착란 모범사레가 아니랬더라면, 따라서 이 선례들을 보고서는 웃을 수도 없었더라면, 실실 웃는 유인원들이 손가락을 더듬거리고 있고 그 아래 우주가 뻗어있는 것보다 더 참담한 꼴도 없었으리라. 그러나 혹자께서 흉악하게 욕정을 부리시며 피상을 구하신다고 쳐도, 체계적인 방법으로 피상을 취하여 독립 대상으로 삼는다고 할 때 치러야 할 대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고 쳐도, 그분께서는 많은 것을 찾아내시지는 못하시리라. 아무렴 그것도 분명히 성취는 맞다. 그분은 몽매의 고장을 찾아냈고 잘 조작하기도 해보셨겠지만 그게 전부다. 안타깝지만 — 뉴턴이 대단한 말본새로 과학을 헤아릴 수 없는 대해(= 0)의 해변에서 해루질하는 것에 빗대었듯이 — 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섬세함이 필요하고, 섬세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취향, 최소한의 기품이 요구된다.

물리주의적 과학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복잡하며, 비교적 유용하다고 할 수 있는 타성의 철학이다. 물리주의적 과학의 영역은 신께 (그는 죽었으나 흙더미는 아직도 전율하는도다5) 복종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 영역에는 아주 잠깐이라도 교양 함양〔cultivation, 개간〕이라는 명을 벗은 논〔論6, tracts, 지대〕이 수도 없이 펼쳐져 있다. 게 중 하나는 ‘성령의 진담’일 터이고, 여기에 각종 유순한 자들의 커다란 무리도 같이 몰려 있다만, 이곳은 저항지는 아니다. 타당성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과학이 왕이다. 어쩌면 육지 전체가 과학의 소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경솔하게 과학의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없다. 허나 해양은 반란이다(그리고 — 사람들이 귓속말로 속삭이기를 — 육지는 해양 위에 떠 있다고 하더라).

과학의 완성이라는 신화 같은 유치한 허풍도 다 철이 지났다만, 아직도 과학의 성공 여부에 관해서는 대답이 없는 질문이 존재한다. 철학이 과학 때문에 를 입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 종말을 그리게 되기까지 하였으니. 상황은 흘러 이제 철학은 자기가 지력을 갖고 있긴 한지 자신감을 다 잃었고 부모의 자긍심이 있던 곳에는 시기심이 들어섰다. 철학이 느낀 양심의 가책7이 문체라는 결과로 이어졌고, 철학 담론을 난독 수준으로 망쳐놨다. 적어도 한 세기 — 어쩌면 두 세기 — 동안 철학자들의 주 노력은 과학자 배척 따위에 그쳤다. 어찌나 심한 방어 태세, 한심한 모방, 조잡한 자기기만, 암호적·신학적 애매주의, 지적 빈곤이 철학자들의 병든 막내손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8의 이름 아래 자행되었던가.

요러한 멜랑꼴리 뒤에 잊힌 것은 바로 철학이 과학의 원형이 아니고 동력원이라는 사실이다. 군수산업에 대체되기 전까지는 철학이 탐구 리비도의 원천이었다. 만일 과학이 기술 생산 과정의 하나로 완전히 동화되지 않았더라도, 차이는 고작 난해 철학의 다변〔多變, flux〕에 그친다. 왜냐하면 철학이란 사유의 전망을 흥분으로 바꿔주는 기계, 즉 발전기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갑자기 천지라도 됐다는 양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 사실을 모릅니까?’ 하고 묻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금방 떠오른다. 학자놈들.

학문이란 노동의 지표에 교양을 갖다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은 뻔한 양 부풀리기에 집착한다. 상대적인 추상 생산성에 투자한 결과다. 학자들은 두꺼운 책을 지나치게 중대시하며, 두꺼운 책을 휙휙 넘기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끔찍한 반감을 품고 있다. 학자들은 지름길이 있다는 생각, 전문화와 전문 분과가 필수가 아니라는 생각, 금욕적으로 배움을 꼭 견뎌야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도무지 견디지를 못한다. 학자들은 작가들의 알레그로, 쾌속하고 경쾌한 문체를 견디지를 못한다. 그리고 쾌속체로 쓰인 글을 읽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런 글을 우러러보는 척할 적에도 글을 읽고선 항상 결론은 ‘입맛이 떨어진다’ (참으로 관대한 표현이로다) 운운.

학자들은 읽히려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받으려고 글을 쓴다.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업계 윤리라는 게 이 꼴이었다.

호기심은 질문 던지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으며, 해를 입히기까지 이르렀다. 호기심이 자신의 역사를 의기양양하게 꿰뚫고 지나가지 못했다는 것은 수많은 기정사실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이것 때문에 호기심은 고통받고 있다. 호기심은 질문을 러시안룰렛처럼 쏘다가 멸종할 지경이다. 자연 과학의 엄격탄에 맞고 뇌 불구가 돼서는 말이다. 긁어낸 대답에는 난제가 주는 쓰라린 위로조차도 없었으니. 어떤 자들에게 이제 세상이란 뭉뚱그려서나 이해할 수 있는 곳처럼, 호기심의 백골로 수 놓인 단순 무식의 사막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호기심에 깨달음 이상의 가치가 있더라면? 불가능한 생각은 아니다. 생각의 동력원결과에 종속할 필요가 무어였는지 구한다 — 이것도 불합리한 질문은 아니다. 결말이라는 것은 사유를 넘어서는 이익관계가 있을때야 바람직하다. 아닌 경우 결말이란 수단에 불과하고 그 목적은 수쑤깨끼와 혼란을 고취하는 것이다. 사유가 해결책을 견뎌야 한다는 것은 비운에 불과하다. 어쩌면 그것조차 아닐지도.

호기심은 욕망이다. 다 굳어서는 버려진 역동적 충동이라는 말이다. 호기심을 몽매주의와 신비주의라는 포름알데하이드에 담가 보존하겠다고 한다는 것은 — 썩 많이 보이는 짓거리기는 하다만 — 반편짓이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딱 확답이 호기심을 해치는 만큼 호기심을 해하기 때문이다. 사유를 말살하는 자들이 믿는 이데올로기는 교조주의다. 그리고 어느 파 교조주의인지는 관련이 없다.

수수께끼를 지키고 보존하는 능력은 중요하지 않다. 수수께끼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안락한 결말에 다 이르고 얻어낸 결과로 남는 글은 거머리 같아서, 쟁점의 고혈을 빨아먹고 혐오스러운 타성만을 도로 뱉어낸다. 반면 글의 생명은 그 글이 이루지 못한 것, 때아닌 종결, 결론의 부재에 있다. 생명력 있는 글은 언제든 너무나도 짧은 법이고, 피 말리는 마취성 집착 대신 찌르는 듯한 자극이 있다.

이 책은 그런 책은 아니다. 이 책은 바타유의 속도를 끌어내리고, 질주하는 바타유의 광기를 형이상학과 사이비 과학의 늪으로 몰아넣는다. 천문대에서 숙식하시는 분들께 태양을 넘겨주기를 거부하는 나의 태도 — 그리고 그로 인한 꼴사나운 싸움 — 은(는) 바타유와 나 사이의 관계를 다소간 문제로 만들며, 내 글의 상당 부분을 망가뜨린다. 반면 과학 지식과 나의 관계는 그야말로 추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독자께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은 자기 무능을 번쩍이는 숨찬 열변의 망일 뿐이다. 실증 지식을 통하여 정교하게 만든 개념을 망상의 자원으로 이용하며, 오직 게으른 자, 부적응자, 그리고 정신이 병든 자들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모종의 집단적 정신적 격동이 일어나서 우리가 자연과학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그래서 자연과학이 대신 신성 시학으로 읽힌더라면, 그 결과야말로 뒤따르는 글과 공명할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적어도 무질서는, 계속하여 증가하는도다.

닫힌계(예컨대 우주)에서 무질서는 항상 증가한다.9 자연께서 스스로 이루신 것에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계에 존재하는 요소들의 확률분포를 따르는 계의 기본 상태는 ‘엔트로피’라고 부르는데, 엔트로피라는 용어는 열기관과 열 과학 분야에서 카르노, 클라우지우스, 그리고 이 둘을 계승한 자들이 이룬 업적을 함축하고 있다.10 엔트로피 개념이 도입되면 모든 것이 바뀐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시계장치가 아니고 소멸(열죽음) 내지 경향성이 된다. 메커니즘〔Mechanism〕은 동력원에, 열 차이, 에너지 플럭스, 열원〔熱源, reservoir〕, 열침〔熱沈, sink〕11에 종속된다. 질서란 덧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연〔chance, 확률〕, 무질서의 편차, 비평형이다. 음의 무질서 — 네겐트로피 — 란 곧 에너지원이며, 확률은 동력원의 퍼텐셜화이다. 에너지 소산의 퍼텐셜, 물질/에너지의 유동화, 에너지가 쏟아지는 무규칙·무질서한 심연으로의 방출 가능성, 신 죽음으로서의 힘〔Macht, puissance〕. 질서란 법칙이 아닌 힘이며, 힘은 편차다. 니체, 프로이트, 바타유에게 있어서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욕망을 사유할 때 필시 취해야 할 배경이다. 대동력원〔大動力源〕.

욕망과 태양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성〔性〕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고 우주적·비논리적이다. ‘성행위는 잠깐 번득이는 순간 동안이라도 에너지 정체를 벗어나 태양 운동을 연이을 수 있다’ [VII 11]. 욕망에 대한 우주론적 이론은 물리주의의 잿더미에서 부상한다. 아무렴 이것은 관념론, 유심론, 변증법적 유물론(조악한 관념론) 및 유사한 대안들은 전부 이미 철저한 무신론적 자세로 폐기당했다는 것을 전제하겠다는 말이다. 리비도적 유물론, 즉 무조건적 (비목적론적) 욕망 이론이란 곧 물리주의적 편견을 길게 설명하여 진단함으로써 남은 그스름에 불과하다.

물리주의적 사고가 가진 근본적인 문제를 정식화하는 것은 아주 쉽다. 물리주의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이다. 물리주의 입장은 제1원인으로의 후퇴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물리주의는 전율할 신살해〔神殺害〕로 권좌가 텅 비었는데도 옛 신학의 기반에 묶여있다. 물질이 모든 개체를 초월하는 본질적 합리성과 외부 물체·힘의 합을 통하여 외부로부터 추진력과 결정성을 받는다는 것이 물리주의적 견해다. 모든 ‘내재적’ 과정(예컨대 부패)은 자연법칙의 표현에서 비롯되나, 모든 외재적 과정은 원초적·우주적 운명이 수동적으로 소통되어 비롯된다(확률론적 물리학이라도 본질적 차이는 없는데, 수학적 — 하물며 형식적, 외재적 — 확률 규정마저도 인과적 필연보다 더 엄밀하면 엄밀했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로 물리주의적 물질이란 한치의 모호함 없이 수동적이며, 제 구성 방식의 보편합리적 요구에 따라 외부 힘을 전달하면서도 부패하는 이중적 성격 때문에 기진맥진한다.

어떻게 보면 과학적 유물론은 아직 시작도 못 했다고 할 수 있다. 표상 대상과 실재하는 물질/에너지 메트릭스〔matrix〕 사이에 있는 거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질성이란 것이 법칙상 개념 형태로 단순화할 수 없는 한 말이다. 지성의 파악〔把握, prehension〕으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타자는 ‘카오스〔chaos〕’라고 부를 수 있고, 볼츠만 열역학과 합치되는 용어를 쓰자면 절대 비개연성 네겐트로피〔absolutely improbable negentropy〕라고 할 수 있겠다.12 이것이 외부에서 과학적 유물론으로 빌어온 무책임한 하위철학 개념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시도록 볼츠만이 1895년에 쓴 (‘옛 조수 슐츠 박사’에게 헌정한) 소론 <기체 이론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대하여>13에서 얘기했던 심오한 우화 하나를 인용해 드리겠노라.

우리는 우주가 열평형 상태에 있고 영원히 열평형 상태에 머무를 것이라 상정한다. 우주에서 일부분(단 한 부분)이 특정 상태에 있을 확률은, 이 상태가 열평형 상태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더 작아진다. 다만 이 확률은 우주의 크기가 클수록 더 크다. 만약 우주가 충분히 크다고 가정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이 특정 상태에 있을 확률을 원하는 만큼 크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전체 우주가 열평형 상태에 있더라도 우리 세계는 현재 상태에 있을 정도로 확률을 크게 만들 수도 있다[B III 543–4].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열역학 제2 법칙을 인정하는 한에서는 아마도 위에서 볼츠만이 보여준 설명이 유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물리주의적 무신론일 것이라는 점이다. 이 설명은 우주가 충분히 크다면 우주에서 우리가 속한 영역의 에너지 양성〔陽性, positivity〕(네겐트로피 내지 ‘H값’)을 이루고 있는 열적 비평형 상태가 가능할 뿐 아니라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시사한다. 고로 네겐트로피의 존재는 신학적 공리 없이도 확률론적 방법을 통하여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볼츠만의 설명은 개연성〔probable, 확률적으로 있을 법 함〕 네겐트로피와 비개연성〔improbable, 확률적으로 있을 법 하지 않음〕 네겐트로피 사이 개념적 구분을 도입한다. 후자는 — 만일 존재하긴 한다면 — 열역학의 고질적인 문제를 전면으로 끌고 올 것이다. 볼츠만은 타당한 근거를 갖고 제2 법칙을 힐난하는 자들이 비개연성 네겐트로피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또한 볼츠만은 모든 부분적 비개연성, 즉 편차를 일반적 개연성, 즉 열평형(통계학적 정합성)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본인의 사변적 우주론을 고안해 냈다. 일반적 비개연성 내지 절대 비개연성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양성〔陽性, positivity〕을 통계물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주나 가진 성질일 것이다. 비개연성 네겐트로피를 경험론적 방법으로 입증한다고 일반 통계역학을 반증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확률이 낮더라도 통계역학적 관점에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관점에서는 우주론을 일반 카오스론에 기초하여 재정립한다는 것이 독단적인 행보에 불과해 보일 것이며, 독단적인지 아닌지 정도는 (수상하리만치 종교와 비슷한) 확률론적 설득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볼츠만은 위에 인용한 글에서 개략적으로 제시한 아이디어를 체르멜로와 나눈 논쟁1415에서 발전시킨다. 근본적인 사유는 같다. 고 H값, 즉 네겐트로피란 확률적 편차이므로 역학 법칙을 위반하지 않는다. 볼츠만은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르면 고〔高〕 H값이나 상승하는 H값이 등장하는 경우는 ‘무에 근사할 정도로 극소한〔verschwindend wenig〕’ 것으로 예상되지만, 확률에 시간(t)을 곱하면 t값이 충분히 큰 경우 어떤 H값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용한 시간 개념에 대해서 부연하는 것이 좋겠다. 뭐가 되든 간에 추상적 지속〔duration〕 따위가 아니라 순열의 역학이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 H값을 가진 열죽음 상태조차도 에너지를 담고 있는 저장조〔reservoir〕이다. 에너지는 완전히 소산되었으며 완전히 엔트로피적인 상태이지만서도 여전히 에너지를 담고 있다. 소산된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는 퍼텐셜을 상실했지만, 쉼 없이 변화하는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확률론적 관점을 따르면 이러한 변화로 의미 있을 정도로 커다란 H값 차이가 나타나는 일은 거의 있음직하지 않은 것이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변화가 영구적 순열을 관류하다가 갑자기 멈추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시간 함수는 거듭되는 순열이 가진 항〔恒, constant〕 에너지 저장조를 낳는 힘을 만들어내며, 이 힘은 양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우주론적 순열의 총합, 즉 H-값의 잠재 변화는 에너지에 시간을 곱한 것과 같다. 고 H값의 비개연성은 일정 규모의 순열 범위 내에서 이 값이 차지할 것이라 예상되는 비율로 나타낼 수 있다.

볼츠만은 이렇게 썼다. ‘어찌 되었든 운동 시간이 충분히 길다는 조건하에 H곡선에서 큰 봉우리에 도달할 수 있다. 즉 시간의 길이가 충분히 연장되면 이전 상태도 반드시 재현되어야 한다(또한 수학적으로 운동 시간이 무한히 길다는 가정 하에 이 과정은 분명 무한히 자주 발생해야 한다)’ [B III 469].

t=∞라면 그 어떤 H값이라도 높은 확률로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고, 꼭 필요한 주장이다. 실상 이 주장은 어떠한 변화 근원에 의지하고 있는데, 통계역학 이론에서는 이 변화 근원이 ‘에르고드적〔ergodic〕이다’고 부른다. 가능 무작위 발생보다 우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우주론적 해석을 예로 들자면, 이것이 에르고드적 근원에 기반하고 있으리라고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볼츠만의 주장을 따라간다고 무한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특정 유한값 t에서 우주의 물리적 한계와 양립하는 아무런 유한 H값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피상적 수준에서 이러한 공식화가 일정 수준의 에르고드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빈약한 기계적 반복을 무한히 반복한다고 하면 큰 t값을 허용하면서도 높은 H값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푸앵카레가 한 주장16을 극단적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사실 볼츠만의 입장과는 무관하다. 볼츠만은 실재 네겐트로피의 존재와 가능 반복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지 가설에 근거한 네겐트로피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겐트로피의 재생산에 대한 — 확률론적 설명이 아닌 — 협의〔狹義〕상의 역학적 설명이 열역학 제2 법칙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 역학적 설명은 상승하는 H값과 감소하는 H값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성을 분열내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열평형 상태가 다른 상태로 향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우주에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영역이 고 H값 상태에 있으므로}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르면 저 H값 골보다는 고 H값 봉우리17에 대해 말하는 게 더 타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상호성에 대한 볼츠만 본인의 해석은 흥미롭기도 하면서도 다소간 자연과확화된 칸트주의 형식을 취한다. 볼츠만은 열평형 상태(골)로부터의 편차는 엄청나게 긴 기간에 걸쳐 일어나기 때문에 마땅한 관측 방법이 없으며, 고로 가능경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인식론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볼츠만 본인은 ‘그 기간의 길이는 모든 관측 가능성〔Beobachtbarkeit〕을 허사로 만든다’ [B III 571] 고 하였고, ‘자연이 역학을 통하여 보여주는 것에 반한 반대의견은 모두 […] 대상이 없으며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 [B III 576] 고도 했다. 고로 엔트로피적 경향에서 편차를 보이는 자연 과정에 대한 사변은 칸트적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며, 엔트로피적 경향을 따르는 과정만이 가능경험의 적법한 대상을 취하고 있다. 학자처럼 첨언하자면 볼츠만은 엄격한 논리로 네겐트로피적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경우는 ‘무에 근사할 정도로 극소[하다]’고 주장하는데 그치는 듯하다.

볼츠만은 칸트의 무시간적 물자체를 막대한 시간으로 바꾸어놓는다. 이 막대한 시간은 최대 엔트로피와 열평형을 특징으로 하며, 따라서 최소 H값을 특징으로 한다. 칸트의 현상계는 네겐트로피, 열적 비평형 상태, 고 H값이라는 에너지적 기반에 세우기 위해 바꿔놓았다.18 볼츠만이 상정한 두 우주론적 시간, 즉 ‘현상계적’ 시간과 ‘예지계적’ 시간 양자〔兩者〕의 특징은 에너지와 원자의 보존이다. 이는 열평형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네겐트로피 봉우리의 확률론적 출현이 가능해지려면 시간은 초월로 내쫓겨야 하며, 요소의 순열적 변화를 가능케 하는 순수 형식으로 사유해야만 한다. 볼츠만이 주장한 것 중에서 핵심은 바로 시간이란 무연의 격자판에 불과하므로 H값에서 양의 편차가 아무 시간에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리비도적 물질은 시간에 대한 상호 초월 관계에 저항하며, 이분법적, 관념론적, 유신론적 개념성에 의거치 아니하고, 물리적 실체라는 철저한 수동성에서 벗어난다. 리비도적 물질은 대리하는 권위도 없고 인과관계 사슬로 환원할 수도 없는 변화 과정을 함의한다. 이 과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컬어진 바 있다. 나는 잠정적으로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이프를 따라 ‘욕동〔Trieb, Drive〕’으로 부르겠다. 욕동이란 고전물리학의 원인/결과〔cause/effect〕쌍을 전제한다기보다는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욕동은 작용인자〔作用因子, effectiveness〕를 동역학적으로 설정하고 개시하며, 고로 물리학에 선행한다. 이는 욕동이 자연법칙에 앞서는, 돌발하는 물체 역학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고로 쇼펜하우어가 주도면밀하게 입증하듯, ‘리비도 경제’라는 이름이 붙은 욕동의 ‘학〔學〕’은 물리학의 기초이다.

리비도적 에너지론은 욕망의 의도를 말하는 이론, 욕망을 결여로, 초월로, 변증법으로 이해하는 이론을 변형한 것 따위가 아니다. 이런 개념은 신학자들이나 쓰라고 두는 게 좋겠다. 외려 리비도적 에너지론이란 열역학의 탈바꿈, ‘에너지’의 의미를 쟁취하기 위한 분투다. 욕망의 유물론은 에너지 연구 분야에서 스멀스멀 (남모르게) 집성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확률. 엔트로피는 확률론 기관〔機關, engine〕의 핵이며, 자동적〔自動的〕 욕동이요 법칙의 부재다. 에너지를 이루는 것은 결정성이 아니고 차이이다. 왜냐하면 모든 질서는 비개연성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독자성 개념의 혁명이 일어나고, 이제 독자성 개념이란 차이의 함수인 확률에서 파생하므로 양적, 비절대적, 불영속적이다. 에너지는 오로지 확률에 ‘이끌려’ 자동으로 하류로 쏟아지며, ‘노동’ 또한 지금부로 (헤겔적 파토스에서 자유를 얻기에) 유희, 사슬 끄르기, 생성〔Becoming〕을 의미한다.

2

경향. 비개연성에서 개연성으로 진행하는 운동은 자동방향성, 즉 추동〔推動〕이다. 엔트로피는 표상되지 아니하고, 의도와 목적을 불어넣지 아니하고, 결정성을 갖지 않으므로 목적인이 아니다. 이에도 불구하고 엔트로피는 힘〔power〕, 압력, 욕동을 일방향적, 양적, 불가항력적 물리력〔forces〕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경향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목적론 도식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아니하고, 인내할 필요도 없으며, 유효하지 아니하다.

3

에너지. 도처에 양적 어휘뿐. 이천 년 동안의 숨 막히는 존재론 이후 마침내 새뜻한 공기. 본질은 에너지의 비영속적 배치 속으로 융해된다. ‘존재’는 시간화의 무의식적 동력원, 순열 역동성의 동력원인 작용인자〔作用因子〕와 구분할 수 없다. 가지적 우주의 본질은 에너지적 비개연성, 즉 엔트로피로부터의 차이이다.

4

정보. 고생스러운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 숭배, 기호, 사유, 이데올로기, 문화, 꿈, 갑자기 이 모든 것들을 자연의 힘, 네겐트로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련의 유사 문제 전체가 실증성 아래 뭉뚱그려진다. 언어란 자연적인가 아니면 인습적인가? 관념은 대상과 어떻게 대응하는가? 정념과 개념의 연결고리는 무엇인가? 모든 신호는 네겐트로피이고, 네겐트로피는 에너지적 경향이다.

열경련이란 현실이요 순수 카오스다. 우리가 난 곳이다. 죽음 욕동은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 난 곳에서 죽는 것처럼 그곳(‘그것〔it, {id}〕’ 자체)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리움이다. 열경련이란 아우성, 소멸하는 강도, 비개연성의 정점이다. 에너지적 물질은 경향, 즉 죽음욕동〔Todestrieb〕을 갖고 있다. 요즈음 과학에서 이 운동은 영구적 에너지 감소와 차이의 소산을 의미한다. 상류는 네겐트로피 저장소, 비균일 분포, 열적 비평형 상태다. 하류는 혼돈19, 통계역학적 무질서, 차이의 부재, 열죽음이다. 열역학 제2 법칙은 무질서가 증가해야만 한다는 것을, 일부 영역에서 네겐트로피가 증가한다고 해도, 그곳에는 엔트로피 총량의 증가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생명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죽음을 퍼뜨리기 때문이며, 무질서의 증가와 확산은 항상 편차〔deviation, 생명이 죽음을 피하는 것〕보다 대성한다. 소산은 생명을 빨아 ‘이득’을 본다. 일반경제 안에서 조직 과정은 필연적으로 모두 편차에 불과하고, 불변하는 사류〔死流〕 속에서는 한낱 복잡이나 우회 따위일 뿐이요, 정보의 동력원 속에서는 흐름, 하류로 폭포치는 에너지, 소산일 뿐이다. 닫힌계도, 정법〔正法, stable code〕도, 본래 기원도 없다. 오로지 열경련 충격파, 경향적 에너지 플럭스, 에너지 소산만이 있을 뿐이다. 정보 — 강도 — 의 영수서는 하류로 흐른다.

그러나 리비도적 유물론(니체)은 열역학이 아니다. 리비도적 유물론에서는 힘과 에너지, 네겐트로피와 에너지를 구분 짓지 않기 때문이다. 리비도적 유물론에선느 엔트로피 수준이 곧 본질적 존재나 실재 존재의 속성이라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물리학적 열역학의 경우와는 반대로 리비도적 에너지는 카오스적이며, 존재론에 선행한다. ‘존재’, ‘물자체’, 결과〔effect, 효과〕와 분리할 수 있는 기층〔基層, substratum〕 등등에 대한 니체의 신랄한 공격도 이와 같다. 열역학은 에너지의 존재론, 입자의 존재론 (볼츠만), 시/공간의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하여 편차 수준과 엔트로피 수준을 에너지의 속성으로 해석하지만, 리비도적 유물론은 오로지 카오스와 구성〔composition〕만을, 즉 ‘생성에 세계를 존재의 세계에 근접하는 것’ [N III 895, 힘 §617] 만을 인정한다. 리비도적 재구성을 통해 존재는 구성체가 되고, ‘존재의 등급〔degree, 정도〕을 얻고 존재 상실하게 된다.’ [N III 627, 힘 §485]. ‘존재’라는 결과〔효과〕는 과정의 파생물이다. ‘번영을 누리기 위해선 우리가 우리의 믿음 안에서 안정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참된’ 세계는 변화하는 세계도 아니고 생성〔becoming〕하는 세계도 아니며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N III 556, 힘 §507].

니체 사유의 대축〔大軸〕은 리비도적 에너지론 공간의 윤곽을 그려낸다. 첫째: 같은 것, 동등한 것, 동일한 것, 동일성〔die Gleichheit〕에 대한 논리수학적 이해 방식에 관한 결연한 질문. 논리수학적 이해 방식은 구성, 유〔類, type〕, 다양성, 종〔種〕, 규칙성으로 이루어진 일반 에너지론 속으로 융해된다. 구성을 보존하고, 전도〔傳導〕하고, 순환하고, 향상하는 힘, 구성의 영역표지〔領域表識〕, 보유〔保維〕, 전용〔轉用〕 속에 동화되어 있는 힘, 탈억제와 소산으로 방출되는 힘, 디오니소스적 구성 내쏟기{풀어헤치기}. 본질을 추구하는 철학 너머에는 예술이 존재한다. 억제할 수 없는 구성의 끊임없는 변화〔flux〕, 자극과 소통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환인 예술이.

둘째: 열역학적 기준치(볼츠만의 영원회귀론)와 리비도 정점 사이에 뻗어 있는 영원회귀의 형상. 존재론적·과학적 발견을 자극으로 변환하는 이론적 기계. 맨 먼저는 과학적 형상 — 에너지적 힘들〔forces, 물리력들〕과 힘들의 순열에 대한 이론으로써의 회귀 — 확률, 경향, 에너지, 정보. 무질서한 조합과 재분배의 유희 속에서 힘들은 저장하고 있는 가능 상태의 고갈로 향하는 경향이 있으며, 긍정과 도취의 형상인 원의 형태로 기울어진다. 그런가 하면 원은 가르침, 교훈, 신호의 형상이기도 하다. ‘서로 함께 흐르고 돌진하는 힘들〔forces〕의 바다이며, 영원히 변화하고 영원히 되몰아치며, 엄청난 회귀의 세월과 함께, 자기 형태의 썰물과 밀물로 가장 간단한 것으로부터 가장 다양한 것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쓰고, 가장 고요하고, 가장 단단하고, 가장 차가운 것으로부터 가장 작렬하고, 가장 거칠고, 가장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나아가고, 다음에는 다시금 충만으로부터 단순한 것으로 되돌아오고 […] 순환의 즐거움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면 그 어떤 목표도 없고, 순환의 고리가 자체에 대해 선한 의지를 지니지 않는다면 의지가 없다. —너희는 이러한 세계에 이름을 붙이기를 원하는가? [N III 917, 힘 §1067]’ 그다음에는 리비도 정점. 구성 지층을 뚫고 오르는 원동력의 회귀, 언제나 noch einmal, 다시 한번. 상한〔上限〕, 지평선, 완전한 본질에는 영원히 닿지 않는다. ‘ 너희는 거대한 밀물을 맞이하여 썰물이 되기를 원하는가.’ [N II 279, KGW XIII 17].

셋째: 질서를 위계질서(구성)로써 다루는 위계의 일반 이론. 초월적 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객관화 등급’은 목이 잘려 뒤집혔고, 한계는 개방되어 양방향으로 강도의 연속과 마주하게 되었다. 칸트는 패배했다. 초월/경험 차이가 위계 속으로 찌부러졌으니(하지만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우리에게 와닿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역사는 되돌아온다(이제 무시간성이란 것이 중요할 이유가 무언가?). 그러고는 ‘오로지 정도의 차이와 많은 미묘한 단계가 있을 뿐인 곳에서 줄곧 {이분법적} 대립에 관해 말[한다]’ [N II 589, 선악 §24].

넷째: 니힐리즘, 욕망의 쌍곡선〔hyperbolic〕을 진단하기. 회귀란 곧 위계를 가로질러 구성의 원동력이 돌아오는 것, 즉 창조적 욕동의 끝없는 야욕이다.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 즉 자극(고통)의 회귀와 극복의 환희다. 기진맥진한 자들, 처우를 잘 받지 못한 자들〔Schlechtweggekommenen〕20에게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 자들은 ‘단 한 번의 도약, 죽음의 도약으로 끝을 내려는 피로감,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바라지 못하는 저 가련하고 무지한 피로감’에 사로잡혔으니. ‘그와 같은 것이 온갖 신과 배후 세계라는 것을 꾸며낸 것이다’ [N II 298, KGW XIII 48].21 괴기망측한 거머리처럼 인간의 타성을 빨아먹은 것, 그 맨 먼저는 플라톤이었고, 그다음엔 기독교였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인류(종말의 동물)를 만들어냈다. 법칙적으로 니힐리즘은 제 스스로를 단번에 완결낸다. 신에 대한 상상, 최종 존재에 대한 상상, 생성을 멸〔滅〕한다는 상상, 너머에 욕망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궁극의 존재에 대한 상상이 생겨난다.

프로이트도 에너지론자다(다만 라캉과 기호학자 똘마니들을 읽을 적에는 생각지도 못했으리라). 프로이트는 욕망을 결여나 표상, 목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소산하는 에너지 흐름, 즉 흐름을 막고 뚫는 2차 과정(현실원칙의 영역)에 속한 기관이 억제하는, 에너지 흐름으로 이해한다. 쾌락은 목표 실현과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원초적 자극 내지 원초적 긴장이란 곧 불쾌에 해당하고, 이것이 성행위의 평형화 흐름으로 완화되는 것이다(목표는 없고, 오로지 제로〔zero〕 뿐이다). ‘불쾌는 흥분 양의 증가에, 그리고 쾌락은 흥분 양의 감소에 해당한다’ [F III 218, 정신 272]. 이렇게 프로이트의 글 속에서 나타나는 제로에 대한 강박은 — 잘 알려져 있듯이 — 양가감정적이다. ‘정신 기관은 정신 기관에 있는 흥분 양을 가능하면 낮은 상태 내지 적어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F III 219, 정신 273]. 허나 이러한 양가감정은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혼란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욕망이라는 현실을 철저히 견지하면서 나타난 증상이다.

무의식의 학〔學〕으로써 정신분석학은 생존의 지시에 반한 위반의 결과로 억압을 겪는 자의 결의를 타고났다. 성〔性〕에서 죽음욕동까지 아우르는 심오한 사유의 가교로 프로이트를 인도하는 것은 이런 억압된 자아 위협을 추구하는 행위다. 초기(제1차 세계 대전까지 시기)에는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생존과 욕망 사이의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을 명쾌하게 설명하려는 시도가,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신화 해석과 아버지의 법이 가진 의미를 향해 프로이트를 인도한다. — 어머니를 향한 유아의 근친상간적 갈망 사이에서 상관관계를 가진 자로 새로이 나타나는 — 아버지와의 경쟁이 욕망과 생존의 관계에 최초로 위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나중에 죽음욕동 개념을 창안해낼 적에는 욕망이 갖는 희생제의적 성격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사유하는데, 따라서 단순히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서 존재하라는 위협과 욕망이 구조적으로 통합된 정도가 아니라, 자체의 경제가 갖는 내재적 경향을 통하여 죽음과 욕망이 바로 결부된다. 이제 정동〔情動, affect〕의 강도는 생래적〔生來的〕으로 자기 자신의 소멸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사유되고, 날 적부터 죽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으로 되어 있는, 죽음(즉 무기물질)으로부터의 차이로 사유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의식을 가진 자아가 곧 욕동의 조절이며, 고로 모든 심적 에너지는 무의식(이곳에서 자아 에너지가 차용된다)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현실원칙이 가진 권위와 자아의 대변자 자리에 계속 매달리는 듯하며, 따라서 생존(적응)을 치료행위의 속성이자 절대 명령으로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렇듯 욕망의 주장에 대한 근본적인 편견 때문에 정신분석학은 항상 억압의 기술로 퇴보하는 경향을 갖고 있었으며, 자아의 지휘권을 키우는 데 그치고 말았다. 현실원칙과 정신분석학의 보수적 시기 양쪽의 용어를 따르자면, 욕망은 생명 보존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음압〔陰壓〕으로, 개인과 개인의 문명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제의를 향해 거침없는 힘을 갖고 나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험천만한 내적 맹습이다.

메타심리학은 태양심리학이다. <쾌락원칙을 넘어서>의 심장에 프로이트는 우주에 대한 눈부신 통찰을 계락적으로 그려 놓았다.

만약 생명체의 목표가 아직 달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본능이 가진 보수적 성격과 모순될 것이다. 반대로 생명체의 목표는 상태, 즉 그곳으로부터 생명체가 과거 어느 시점에서 떨어져 나왔고 또 그곳을 향하여 그것이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길을 굽이굽이 거슬러〔Umwege〕 돌아가려 하고 있는 어떤 처음 상태에 있음이 틀림없다. […] 아마도 오랫동안 생물체는 끊임없이 새로이 창조되고 쉽게 죽어 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결정적인 외부의 영향력이 일변하여, 아직 살아 있는 물체가 죽음이라는 목적에 이르기까지는 훨씬 더 복잡한 우회로〔immer komplizierteren Umwegen〕를 택해야 했다. 보수적 본능이 충실히 답습하는, 죽음에 이르는 이러한 우회적 길〔Umwege〕은 오늘날 우리에게 생명 현상의 모습을 제시해 줄 것이다. [F III 247, 정신 313-314]

생명은 에너지 공백에서 떨어져 나가 카오스적 제로〔zero〕의 표면에 덧입혀지는, 죽음에 덧씌워진 틀이다. 이 표면은 미로 — 에너지 기준치로 돌아 나가는 복잡한 탈출로 — 이기도 하며, 미로의 복잡도란 곧 자기 자신에게서 탈출하려고 노력하는 생〔生〕이요, 생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궁을 헤매는 생. 즉 생 자체가 죽음을 향한 행로로 되어 있는 미로요, 공백으로부터의 편차를 쫓아 따라가는 꼬이고 꼬인 우회로〔Umwege〕다. 생의 우회로가 뻗어가게 만드는 ‘결정적인 외부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태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22

근래 군 역사에서 등장한 말 중 가장 심오한 것은 ‘과잉살육’, 즉 ‘오버킬〔overkill〕’로, 욕망의 불타는 핵에서 나온 무언가를 함의하는 말어다. 피상적으로는 누군가가 새총을 맞고 죽었든 고폭탄, 소이탄, 백린탄에 무진장 피격당해 죽었든 큰 관련이 없다. 이 경우 ‘과잉살육’이란 단지 불필요한 무기 낭비를 의미하는 경제학적 용어에 불과하다. 한데 월남전은 — 과잉살육이라는 말은 월남의 초토화된 토양에서 싹텄다 — 통화적 기반 위에 파괴력의 수량화에 이른 일련의 군사적 산업적 경향이 다다랐던 정점 따위가 아니었다. 월남전은 약학과 폭력의 기술이 교차하는 결정적 지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과잉살육을 저지르게 되는 체계적 경향은 본디 이미 다 불타고 폭발한 베트남인 송장에 화포를 낭비했다는 것을 뜻했지만, 지하에서 일어난 대체〔displacement〕 과정에 의하여 사기가 꺾인 미군 징집병들이 헤로인, 대마, LSD에 ‘찌들었다〔wasted, 허비되다〕’(‘만취했다〔blitzed, 공습당하다〕’, ‘쩔었다〔bombed-out, 폭격으로 파괴되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차 지점은 (체계적·언어학적 양가감정을 통해서도 기술할 수 있듯이) 방화, 사지 절단 및 갖가지 말살 행위에 대한 — 한없이 냉소적인 기준에라도 따르는 — 통제가 완전히 결여되었던 것이 내사〔內射, introjection〕된 갈망의 가려진 핵이요, 부어오른 전쟁 규모 속에서 반향친 욕망의 핵이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미국의 전쟁 기계가 동남아에 그토록 자유민주적으로 살포한 초망라〔超網羅〕적 섬멸이 서양이 강력히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뻔히 보이지 않는가? 그 열망은 월남전의 경야에서, 약학, 성, 대중 전자음악에서 일어난 거진 모든 것이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완전히 사라지고’ 싶어한다. 그것을 욕망한다. 과잉살육 갈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후, 파멸은 (열반원칙으로써의) 죽음욕동이라는 전통적 의미를 상실했다. 이제 죽음은 기준치에 불과한 것이 되었으며, 기준치를 넘는 것은 도를 넘는 ‘피학〔masochistic〕’욕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죽음과 과잉살육 갈급증〔渴急症〕의 관계는 생존과 통설 타나토스 개념의 관계와 같다. 즉 최소 만족의 관계다. 죽음을 욕망한다는 것은, 호흡을 욕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피한 것에 대한 공허한 긍정에 불과하다. 과잉살육에 이르러서야 욕망은 운명과23 충분한 거리를 두게 되며, 집약적 규모의 자극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프로이트의 에너지론적 신경계 모델에는 심적 자극의 원인이 되는 두 가지 경제가 존재한다. 먼저 양적 안정을 이루고 있는 에너지 저장소가 존재하며, 정신은 이것을 이용하여 (자아를 포함한) 사랑{에로스}의 대상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리비도} 집중을 일으킨다. 그 다음으로는 그야말로 대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거대한 양의 외부 자극을 신경계로 보내는 타자성과의 정신 외상적 결합이 일어나는 ‘일반경제’가 존재한다. 프로이트가 이 두 번째 경제의 존재를 인식한 것, 그리고 1914년에서 1918년 사이 전쟁신경증 발생 사례에서 (대부분 끊임없이 쏟아지는 엄청난 야포 세례 때문이었다) 이 경제가 행하였던 역할, 이렇게 두 가지가 죽음욕동의 발견에 있어서 핵심적이었다. 이러한 정신 외상적 경제가 과잉살육을 쉽사리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 외상이 무한정으로 이어지는 자극 규모의 연쇄에 따른 결과이기 때문이며, 그 치사성은 임의적 수준에 따라 구할 수 있다.

열역학 제2 법칙이 닫힌계에서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고 선언하므로, 생명은 무질서를 ‘배출’할 수 있는 열린계 속에서 질서를 국소적으로 증가시키는 데 그친다. 이렇게 국소화가 일어나는 공간은 열역학 모델의 주제 대상으로 취급되지는 않으면서도, 열역학 모델의 전제로는 다루고는 한다. 국소화가 일어나는 공간은 본질적으로 균질한 연장〔延長, extension〕이며, 그 공간을 매우고 있는 확률분포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바타유는 공간을 (상정하지 아니하고) 사유한다. 바타유의 사유와 유관한 근본 주제는 ‘미궁’이라는 표제 아래 정리할 수 있으며, 이 책에 있는 나머지 부분에서 자세하게 탐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당장 중요한 문제는 더 기초적인 문제다. 바로 우주적 에너지 저장조(0)의 폐쇄장〔閉鎖場, closed field〕과 교환이 가능하도록 개방되어 있는 국소적 비평형 경제의 관계를 이론화하는 것이다.

‘일반’경제와 ‘제한’경제의 차이라는 것이 ‘닫힌’계〔폐쇄계〕와 ‘열린’계〔개방계〕의 차이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싶으시리라. 두 경우 모두 먼젓번에 있는 용어는 에너지 교환이 일어나는 전체 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고, 다음번에 있는 용어는 전체 장 속에서 미분화된 영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 혹여나 문제를 이렇게 변형하더라도 완전 부당하지는 않다만, 전체 사태가 지나치게 단순해진다. 바타유가 기술하는 경제 속에서 순환하는 것은 일반적인 요해도〔了解度〕 내지 국소적인 요해도를 가진 ‘내용물’이라기 보다는, 자체로써 상대적 고립과 제한을 할 수 있는 능력에 해당한다. 어떤 견지(특히 과학적 객관론)를 따르면 효용이 음〔陰〕의 엔트로피를 전제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추상적인 체계는 ‘운하화〔canalisation〕’ [VII 467] 개념과는 아주 다르며, 운하화야말로 효용의 기본 성질이다. 열역학 제2 법칙의 일반화를 억제하고 있는 반〔半〕자립적 영역은 바타유가 말하는 ‘구성’의 조건인 것이 아니고, ‘구성〔composition〕’이란 말의 본뜻 자체이다. 달리 말하면 구성과 공간‘’ 실제 미분화는 동시적이다.

관념론 도식은 마르크스가 분석한 범위 안에서만 계속 작동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으며, 정치경제학 비판에 뚜렷한 인간적 경향을 묻힌다. 바타유는 바로 위에서 말한 방법으로 관념론적 도식에서 ‘생산’을 뜯어낸다. 노동이란 역사적 구체화를 통하여 신의 피조물을 지양〔止揚, sublation〕하는 근원 따위가 아니다. 노동이란 에너지를 이용(방출)할 수 있는 비개인적 잠재력이다. 계급사회에서 인간을 착취하게 된 것에는 원형이 존재한다. 잉여생산은 태양으로부터 받은 것을 착취를 통하여 노략질할 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바타유의 태양경제학은 잉여에 대한 이론이 없는 마르크스주의의 빈틈 속을 깊숙이 파고든다. 태양경제학은 진정한 본원적(비개인적) 자원 축적을 기술한다. 이 우주·역사적 경제는 ‘생산된 에너지는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 보다 크다’ [VII 466] 라는 공리로 정리할 수 있다. 우주·역사적 경제는 지구상에서 발전이 일어난 핵심과정〔main-sequence, 주계열〕의 윤곽을 그려나가고, 문명의 격동이란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발전에서 나타난 편차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리비도적 핵심 과정, 비개인적 축적 내지 원초적 (태양) 억제라고 하는 것은 생명과 동시에 등장하여 정착 농업이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떤 경우에는 마지막 빙하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날것 상태로 계속된다. 생명이란 핵심과정의 표면 효과에 우리가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핵심과정 다음으로 나타나는 상당히 불규칙한 리비도 과정과 비교하자면, 핵심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리비도가 초기 단계를 벗어나는 것은 이미 초기 단계 속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바뀌었기 때문일 뿐이며, 핵심과정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부분이 지질학적 수준의 기간 속에서 일어나기는 한다만, 핵심과정을 기하학적으로 가속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경향이 존재한다는 증거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핵심과정은 곧 연소 사이클이다. 이는 지표면의 물리화학적 휘발화, 즉 에너지 사이클의 복잡화로 이해할 수 있다. 더욱 일반적인 방법으로 말하면 유기 물질을 이루고 있는 태양경제 회로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확장 과정은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증가하는 (‘무기〔無機〕’) 에너지 인프라와 지질화학 인프라의 비율을 아우르는 구조에 유기물질을 밀접하게 결합한다. 유기성과 무기성을 구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쓸모없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유기 물질이라는 것은 초안정적〔超安定的, meta-stable〕 국소 구성체 속에 얽매인 무기물질의 편린에다가 붙인 이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일 부정접두사를 쓴다면 생명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차이는 일방향적이고, 무기물질은 배타적이거나 자체의 조직화에 무관하지만, 생명은 선택과 여과 기능을 바탕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콜로이드〔colloid〕는 핵심 과정 속으로 들어오고 나면 두 가지 경향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이 두 경향은 바로 프로이트가 보다 높은 수준에서 ‘φ’와 ‘ψ’, 즉 소통과 고립(내재성/초월성, 죽음과 혼란)이라고 명명하였던 것이다.24 유기 리비도는 욕동이 표면상 두 분류군으로 서서히 분화될 때 나타난다(프로이트는 후기까지 두 분류군을 다루지 않는다). 진보적 경향은 먼저 세포 분열을 (원핵세포→진핵세포) 통하여 유기체를 고립시키고 ‘개별화’하며, 그다음에는 생식세포계열을 고립화하여 원형질을 생식세포와 체세포로 나눈다.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가 말한 ‘에로스〔Eros〕’의 태곳적 형태이다. 한편으로는 몸과 생식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반대편으로는 소산하려는 힘을 종〔種〕의 경제 속에 보존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후자는 궁극적으로 생물의 성〔性〕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에로스적·종화적〔種化的〕 경향은 끊임없이 해체로 나아가는 퇴보적 경향(타나토스)의 위협을 받는다.

‘φ’ , 즉 소통 경향은 생물학적 물질과 ‘바깥’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호작용’을 강하게 만든다. 따라서 ‘φ’란 유기 장벽 경계를 내리는 것과 동일하며, 광반응성, 동화〔同化, assimilation〕25, 사이버네틱스적 통제, 영양 처리 과정 등에 있어 필수적이다. 즉 이것이 바로 바타유가 원초적 내재성과 관련 있다고 말하는 유기적 기능의 복합체이다. ‘ψ’, 즉 고립 경향이란 교환 억제, 불변하는 안정성의 척도를 만들어내는 유기 장벽 경계를 높이는 것, 코드 보존, 비축한 유기 에너지를 통제하에 소비하는 것 등에 해당한다. 이 두 경향이 합동하여 작동하면서 유기체와 주변 환경 사이에 일어나는 융합 정도의 선택적 분포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것이 구성의 수준을 안정화하기는 하지만서도 안정화 자체는 항상 영 불안정하다. Φ가 최대에 달한 상태(φmax)는 유기체가 완전히 해체되어 제로〔zero〕의 끝자락을 자유로이 떠다니는 상태와 같다. Φ 수준이 최대에 달하지 아니하는 경우 유기체는 일정 정도의 통합을 유지하며, 우리가 ‘유기체’라고 명명하는 것은 이러한 가변 응집성, 즉 강도〔强度, intensity〕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바타유가 말하는 ‘초월’의 참된 기반이매, 그것은 곧 미궁 바깥이요 그 이름은 죽음이라.

고립, 즉 초월성(ψ)은 강도적 경향이다. 연장〔延長, extension〕에 대한 선험적 좌표를 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ψ의 발생에 대하여 타당한 논리수학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ψ ‘자체가’ 식별성과 동일성의 근본 척도이기 때문이다. 소통(φ)은 식별 가능한 독자성도, 동일성도 벗어난다. 소통이란 곧 무분화〔無分化, indifferentiation, 무미분화〕, 아무 제약을 받지 않는 자유로운 흐름, 강도적 제로, 에너지 공백, 적막, 죽음이기 때문이다. φ의 미분화(dφ=ψ)를 통하여야만 자원, 에너지 저장, 구성 촉발 (형태, 행동, 기호) 기능이 가능하다. 따라서 ψ의 강도적 양은 연장적 축적의 기반이자 통화라고 할 수 있다.

바타유의 경제학은 에너지 교환(ψ₁ → ψ₂)이 근본적으로 축적을 야기한다는 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연장적 교환은 두 개의 강도적 변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낭비(ψ → φ)와 수득(φ → ψ)이 그것이다. 여기서 후자가 항상 대체 요구량을 초과하므로, ψ₁ < ψ₂이다. 바타유가 이에 대해 강조한 것이 있는데, 덕분에 이를 오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식물이 생존 방식으로 유용하는 에너지는 식물의 생존 방식에 필요한 에너지 최소량보다 크[]’ [VII 466], ‘동물이 생명을 통하여 유용한 에너지[] 동물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최소량보다 더 크다’ [VII 466]. ‘생존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양의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곧 생명의 본질이다. 달리 말하면 생명화학적 과정은 에너지 축적과 낭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축적은 낭비를 주문하지만 (기능적 에너지, 이동, 전투, 노동) 항상 후자의 양이 전자의 양보다 적다’ [VII 473]. 기호로 표현하면, ψ₁ → ψ₂ = dφ → d+nφ.

마르크스는 자신의 근본 기획에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작금에 와서는 혹자가 ‘이중적 독해’라고 부를 법한 것과 비슷하다. ‘노동’이라는 단어를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마르크스가 — 부르주아들이 본인들의 경제체제를 설명하던 것을 해석하던 중에 —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노동자에게서 노동자가 생산하는 상품으로 전달된 가치를 지칭하는 데 사용했고, 다른 편으로는 ‘생산 비용’이나 피고용자의 노동 비용을 지칭했던 것이다. 리카도 경제이론의 진일보로 인하여 정치경제학 전통은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은 상품의 생산에 투자한 노동의 양에 따라 다르다는 것에 광범한 동의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노동함으로써 임금을 받는다면 이 임금은 다시 상품의 가치에 추가될 것이고, 상품을 생산하고 교환하는 데 있어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간파한 것은 노동을 통하여 임금을 받는 것과 노동의 가치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점이었다. 마르크스는 ‘노동력〔Arbeitskraft〕‘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 존재하는 거래 대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고, ‘노동[arbeit〕’이라는 단어는 상품에서 최종적으로 생산된 가치를 가리키는데만 사용했다. 이렇게 ‘노동’과 ‘노동력’ 개념을 구분한 이후, 다음 단계로 마르크스는 상품의 작동 방식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이라는 것이 생산할 수 있는 노동의 양을 기반으로 결정된 가격으로 거래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탐구하게 되었다. 노동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그러한 능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량의 차이점은 이윤의 기원이라는 불가사의를 설명해 줄 것이었다. 만일 왜곡되지 않은 시장에서 완전히 냉소적인 태도로 노동을 거래한다고 할 경우, 가능한 한 가장 낮은 수준에서 노동자가 최저 생계를 유지하고 노동을 재생산할 수 있게 해주는 가격을 산출할 것이다. 왜곡되지 않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다른 모든 상품 또한 생산에 필요한 노동 시간의 최소량에 근사하는 가격을 산출하는 경향을 보일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경제 속에서 전체 노동의 평균 가격은 대략 사람이 최소 생계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과 동일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노동의 가치 – 노동의 가격 = 이윤

그런데 노동력이 거래되는 가격은 왜 노동력의 최소 생계 조차에도 미치지 못하는가? 이 문제에는 이중의 답이 있다. 첫 번째는 역사적인 답이고 두 번째는 체계적 답이다. 다만 두 답을 분리하는 것은 이론적 추상화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서로 맞물리는 이 두 가지 답은 모두 노동의 잉여, 즉 노동 시장 포화에 기반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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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적 축적’이라는 제목이 달린 장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계보를 파악하려고 시도하면서, 소위 ‘인클로저 운동’이라고 부르는 영국사 사건과 관련 있는 일련의 과정을 조사하게 된다. 개략적으로 말해 유럽 소작농들이 대규모로 도시화됨으로 인하여 자율적 경제 활동을 하던 인구는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으며, 이것은 어찌 되었든 폭력을 통하여 농토에서 소작농을 쫓아냄으로써 이뤄낸 것이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를 창출한 변혁의 서막은 15세기 마지막 후반과 16세기 초 수십 년 동안에 일어났다. 제임스 스튜어트가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도처에서 쓸데없이 집과 농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봉건적 가신집단의 해체를 통해 아무런 권리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대규모 프롤레타리아가 노동시장에 내팽개쳐졌다. 그 자체가 부르주아 발전의 산물인 왕권이 절대적 통치권을 얻으려는 노력에서 이 가신집단의 해체를 강제적으로 서둘렀지만, 그것이 결코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다. 이보다는 왕권과 의회에 대하여 완강하게 저항한 대규모 봉건영주가 토지에 대하여 자신과 동일한 봉건적인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던 농민을 토지로부터 강제로 내쫓고 그들의 공유지를 강탈함으로써,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하였다. 잉글랜드에서 이들을 몰아내는 데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특히 플랑드르의 양모매뉴팩처의 번영과 그에 따른 양모 가격의 상승이었다. 대규모 봉건전쟁이 과거의 봉건귀족을 휩쓸어버렸고, 새로운 귀족은 화폐가 모든 권력 중의 권력이 된 시대의 자식이었다. 그래서 경작지를 목양지로 바꾸는 것이 그들의 구호가 되었다. [자본 989]

고로 도시화라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따지면 부정적인 현상, 즉 일종의 내부적 추방인 것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언어로 말하면 소작농들은 농업 생산의 굴레에서 ‘자유를 얻은’ 것이다. 리베르떼〔Libert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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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노동 시장은 소작농을 징발함으로써 포화되었지만, 내부 역학을 이용하여 똑같은 잉여를 창출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자본은 과잉생산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경향 때문에 실업을 만들어낸다. 경쟁 압력은 자본에 노동력의 생산성을 증대하여 끊임없이 비용을 낮추라는 강요를 넣는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있어 아주 결정적인 두 가지 구분법을 이해해야 한다. 그 첫 번째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구분이며, 이것은 곧 상품이 가진 효용과 상품 가격의 구분이다. 모든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치 사이에는 아주 빈약하고 간접적인 연관성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산성 향상은 상품이 가진 두 가지 측면이 이루는 비율의 변화를 나타낸다. 따라서 사용가치가 점점 하락하면, 노동력은 점점 더 커다란 양의 효용으로 변형할 수 있게 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변화 과정이 다른 과정과 얽혀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 과정은 경제가 기능하는 데 있어 훨씬 더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있으며, ‘고정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분을 통하여 설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고정자본이란 재계〔財界〕에서 ‘시설〔plant〕’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고정자본이란 (직접) 노동에 사용하는 자본이 아닌, 노동을 성공적으로 고용하기 위하여 인자〔因子, factor〕에 사용하여야 하는 자본의 양이다. 이 인자들이 생산 과정에서 소비되므로 인자의 가치가 상품으로 전이되며, 상품이 팔리는 순간 복구된다. 그러나 — 왜곡되지 않은 시장에서 — 고정자본은 아무런 잉여 수익도 이윤 수익도 낳지 못한다. 반면 가변자본은 생산 과정에서 소비되는 노동에 사용한 자본량을 의미한다. 가변자본이란 직접 노동력 이용을 통하여 기능하는 자본, 즉 잉여 가치 추출이다. 따라서 이윤을 생산하는 것은 자본이 가진 이러한 측면이다. 마르크스는 고정자본에 대한 가변자본의 비율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부르며, 사용가치의 상대적 증가, 즉 — 왜곡되지 않은 노동시장을 가정하면 — 생산성 개선은 고정 자본 비율의 상대적 증가와 관련 있으며, 따라서 이윤의 감소와 관련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악마로 취급하게 만든 문제들은 대강 두 가지 종류로 묶을 수 있다. 첫째, 대도시에서 이윤과 임금이 증가한다는 경험론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문제는 성급하게시리 마르크스의 이론을 위반하는 것으로 해석된 바 있다. 사실 진짜 문제는 다른 문제인데, 이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바로 노동을 거래할 수 있는 자유시장의 부재이다. 최대한 간단히 말하자면 완성된 체계로써의 ‘자본주의’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고, 대신 증가하는 상품화 경향만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때 이 상품화 경향은 다양한 정도의 노동 상품화를 포함한다. 부르주아 경제의 발전 과정에 있어 정치적 개입 같은 관료적·협동적 요소는 항상 존재했으며, 지금까지는 경쟁에 산재하고 있는 허무주의적 잠재성을 억제해 왔다. 마르크스가 상호 파멸로 나아가리라 생각했던 자본 단위의 개체화는 국가 지원을 받는 카르텔화로 대체되었으며, 따라서 모든 산업경제의 가격 구조는 완전히 왜곡되고 말았다.

두 번째 문제도 국가·자본 복합체와 관련있는 ‘관료적 사회주의’ 내지 ‘붉은’ 전체주의의 문제다. 마르크스의 이름하에 자행된 무수한 혁명은 노동자의 삶의 근본 양식에 의미 있는 변화를 불러오지 못했다. 대부분의 인구가 식민주의와 전체주의가 혼합된 잉여 착취로 고통받는 지역의 경우 변화가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권위주의 국가에 의하여 비효율적으로 관리·감독 되는 ‘정상적’ 착취로 변화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 두루 얘기하기로는 — 실재 세계에서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두 종류의 문제 모두 바타유의 마르크스주의와는 무관하다. 왜냐하면 이 두 문제는 각각 이론적 경제주의와 실제적 경제주의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즉 사회주의가 생산 효율이 향상된 체계여야만 한다는 것, 자본주의는 지나치게 냉소적, 비윤리적, 낭비적이라는 것, 혁명이란 곧 하나의 경제질서를 더 효율적인 경제질서로 대체하는 수단이라는 것, 사회주의 체제는 공공이 생산 자원을 축적하도록 관리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바타유에게 ‘자본’이란 일관적 체계나 공식화할 수 있는 체계가 아닌 선〔善〕의 폭정(그 정도에 상관없이, 축적의 이익에 따라 소비를 정당화하는 것)이며, 혁명은 수단이 아닌 절대적 목표이고, 사회가 붕괴하여 포스트-부르주아 공동체가 되는 것은 성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희생제의적 축제를 통하여서이다.

정치경제 너머에는 일반경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일반경제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근본 사상은 낭비의 절대 우위성이다. ‘우주의 척도에서는 모든 것이 풍요롭다’ [VII 23, 저주 18]. 바타유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제 체계는 일반 에너지 체계 속에 있는 개별 요소이며, 태양 복사라는 일방향 방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26 태양 에너지는 헛되이 {무(=0)를 위하여} 낭비된다. 그리고 개별경제 속에서 일어나는 태양 에너지의 순환은 오로지 쓸모없는 낭비라는 최종적 결말을 유예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모든 에너지는 결국 목적 없이, 남김없이 사용하여야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어디서, 언제, 누구의 이름 아래 이 쓸모없는 방출이 일어날 것이냐는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 바타유가 ‘낭비〔dépense〕’라고 명명하는 — 이 방출, 즉 최종적 소모가 경제학의 근본 문제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일반 에너지 체계 수준에서 ‘자원’은 항상 잉여 상태에 있고, 소진/소모〔comsumption〕는 바타유가 ‘이성적 소진/소모’라고 부르는 이차적 (지구적) 생산성에 도로 빠져버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은 영원히 제 부에 목이 막히고 독이 올라 잉여를 제거하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라고 자극을 받는다. ‘생명체와 인간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필요가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인 사치/과잉이다.’ [VII 21, 저주 16]. 잉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진/소모로 이성적·재생산적 형태를 넘쳐버리게 만들어 순수한 상실, 무상환적 상실로 나아가는 것이 필수적이고, 이렇게 결국 희생제의적 황홀경, 즉 ‘주권〔sovereignty〕’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바타유는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발전과 문화 발전이 죽음의 진화를 통하여 생긴 부산물이라고 해석한다. 오로지 죽음에 달해서야 말로 생명이 태양의 메아리가 되며 필연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그 필연이란 곧 순수한 상실이다. 이 기본 개념이 곧 마르크스주의와 정신분석학 전통을 지배하고 있는 표상을 기반으로 한 설명보다 관념론의 찌꺼기가 훨씬 옅은 유물론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경제학 기질〔基質, substrate〕과 통합할 때 형이상학을 통하여 드러난 주체의 매개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란 근본적으로 경제적이다. 데카르트의 송과선이나 변증법의 기적이 가지성에 불과했던 것을 실천으로 바꿔 주는 이데올로기적 추세가, 문화를 통과하여 흐르고 있기 때문 따위가 아니고, 글을 기록할 적에 사용한 에너지를 생산의 수준에서 회수할 수 없는 부정성으로 변환해 버리고 말겠다고 위협해오는 문학의 가능성이 신출귀몰하고 있으니까. 바타유는 시〔詩〕가 곧 ‘말의 대학살’이라고 했다. 문화는 자본 생산을 표현할 수도 없고 표상할 (섬길) 수도 없다. 문화는 부르주아들의 속물 근성 앞에서 저자세를 취하고 자본과 타협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부르주아들의 ‘문화’에는 비굴한 통제와 자기폄화 밖에는 특징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 자본이란 정확히, 철저히 반문화〔反文化〕의 결정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란 곧 모든 낭비 거부 중에 가장 극단적인 낭비 거부(의 투영)이다. 바타유는 베버가 자본 축적의 진화와 프로테스탄트 주의 발전의 관계에 대하여 결론 내린 것을 받아들이며, 프로테스탄트들이 종교 개혁 사상을 바탕으로 가톨릭에 대해 비판을 가했던 것을, 경제적 소진/소모로 기능하는 한에서, 즉 사회가 생산한 잉여를 빼내는 배수구로 ‘기능하는’ 한에서 종교 비판으로 인정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사치를 거부했던 것은 — 호화로운 대성당 건물이나 ‘노동’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지지하는 전체 사회·경제학 기관과 마찬가지로 —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근대적 형태를 취해가는 경제에 대한 문화적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사회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완전히 낭비를 배제한 최초의 문명이며, 귀족과 교회가 눈에 튀는 사치를 부리는 것에 반대하고, 양자를 이성적·재생산적 상품 소비〔consumption, 소진/소모〕로 바꿔놓은 최초의 문명이다. 자본 생산이 ‘시장 포화’라고 불리게 되는 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과잉생산이 문제라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급박한 잉여 생산 흡수의 한계를 (수준은 바뀌지만, 실상은 급박하다는 것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부르주아, 즉 관리자 계급이 경제학적 갈등 상황이라고 정식화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고로, 자본주의 경제라는 것은 마치 소진/소모〔comsumption, 소비〕 의 문제가 원칙적으로 생산에서 파생하는 양, 따라서 소진/소모 문제를 수요 부족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양 (대략 1930년에서 1980년 사이 미국이 준〔準〕케인즈주의 해결책을 택하고는 군비 지출을 늘린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운영되는 경제이다. 반대로 바타유는 생산을 통하여 잉여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고 해서 문제라고 보지 않고, 고전 정치경제와는 철저하게 다른 방법론을 시사하며, 생산은 바로 생산에 성공하는 한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본다.


  1. ‘계몽(啓蒙)’은 우리말로는 ‘무지몽매한 상태를 일깨운다’는 뜻이지만, 영어로는 ‘Enlightenment’, 독일어로 ‘Aufklarung’, 불어로 ‘Lumieres’로, ‘밝히다’, ‘빛을 비추다’, ‘일깨우다’, ‘눈을 뜨게 하다’는 뜻이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1784년에 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ärung?〕>에서 ‘계몽의 표어’를 주창했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숙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숙 상태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미숙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스로 져야 하는 것은, 이 미숙 상태의 원인이 오성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오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여에 있는 경우다. 그러므로 과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이다.’ (역주) ↩︎
  2. 각주 1번 참조. (역주) ↩︎
  3. 칸트의 용어이며 종합의 세 단계 중 맨 첫 번째이다. 직관에 주어진 잡다는 정리되지 않고 무규정적이다. 따라서 ‘잡다에서 직관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그 잡다를 일별하고, 다음에 그것을 총괄함이 필요하다’ [순이비 A99]. 이 작용을 포착〔apprehension〕이라고 한다. (역주) ↩︎
  4. 즉 지표에 살아가는 지구 생물의 역사. (역주) ↩︎
  5. 창세기 2:7 참조. (역주) ↩︎
  6. ‘논하다’, ‘서술하다’를 뜻하는 논할 론〔論〕. 영어에서 ‘tracts’는 지대〔地帶〕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라틴어 ‘tractatus’의 줄임말로 ‘소논문’ 내지 ‘논고’를 의미하기도 한다. (역주) ↩︎
  7.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I.16 참조. (역주) ↩︎
  8.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이라는 용어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 사용한 용어인 ‘moral sciences’의 번역어로 독일어에 처음 등장했다. 이 용어는 윤리학 단일분과가 아닌 철학, 생물학, 사회학, 윤리학, 등 인간 세계를 아우르는 학문을 가르킨다. 해당 용어는 데이비드 흄이 ≪도덕의 원리에 관한 탐구〔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에서 인간의 본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지칭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사용한 바 있다. 독일어에서는 독일 해석학자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가 사용하면서 유명해졌다. 딜타이는 ≪정신과학 입문〔Einleitung in die Geisteswissenschaften〕≫이라는 책에서 자연과학〔Naturwissenschafte〕과 정신과학 〔Geisteswissenschaften〕을 엄격히 구별하여 정신과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구축하고자 했다. 딜타이는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과학이 대상영역에 접근하는 방법은 자연학문의 가설과 법칙에 기반한 방법이 아니고, 내적 경험〔Erleben〕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딜타이에게 자연현실은 기계적 반복과 객관적 필연성이 지배하는 곳이며, 인식, 논리, 충족이유율을 통하여 파악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인간의 세계인 인간학, 심리학, 역사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법학, 국가학, 종교학, 문학, 시, 미술, 음악, 예술 등은 인과율적인 접근법으로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곳이었다. 따라서 딜타이는 세계가 정신적 삶〔Seeleleben〕을 통하여 파악하여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했으며, 여기에 표상, 감정, 의지라는 정신 구조를 결부했다. 이런 시도는 (랜드가 혐오해 마지않는)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이 계승한 바 있다. 이 책의 1장 참조. (역주) ↩︎
  9. 엄밀히 말하면 우주는 고립계〔Isolated system〕이고 닫힌계〔Closed system〕는 아니다. (역주) ↩︎
  10. 열역학은 자연과학 분야의 통계역학 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헤르메스〔Hermes〕≫ 3권 에서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열역학이 갖는 중요성을 ‘물리철학은 정보이론이다.’ [p. 44] 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했다. 원칙적으로 확률론적 설명을 도입하고 나면 자연과학의 형식과 내용을 서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해당 분야에서 셰르의 작품이 갖는 중요성은 어마어마하며, 셰르의 글은 수미일관 아름답다. 정보란 이산변수가 아닌 연속변수이므로, 정보 연구를 통하여 도출한 결과는 양적〔量的〕 성질을 갖는다. 이러한 양은 음의 엔트로피, 즉 네겐트로피로 나타낸다. 엔트로피 개념은 클라우지우스의 작품에서 유래하여 카르노가 열기관 이론을 통하여 그 기반을 재구축하였으며, 볼츠만의 방정식을 통하여 현대적 계산법을 갖추게 되었다(S = K log W). 여기서 S는 열에 대한 에너지의 비율로 나타낸 엔트로피를 의미하며, 볼츠만 상수 K(에르그/도)를 통하여 도출한다. W는 열적 확률, 즉 가능한 순열의 총량이다. 순열 상태의 총합이 비개연성〔improbability〕의 거듭제곱과 같도록 로가리듬〔logarithm〕을 사용한다. 이는 정보이론 개념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2비트에 2비트를 더하면 결괏값은 4가 되고, 이것은 메시지 정확도가 4배 증가한 것과 같다. 정보이론은 섀넌〔Claude Shannon〕과 위버〔Warren Weaver〕가 공저한 ≪정보통신의 수학이론〔The mathematical theory of communication〕≫이라는 논문에서 유래했다. 정보이론에서는 열역학의 엔트로피 개념을 차용하여 ‘정보 불확실성’, 즉 ‘잠재 정보’를 설명하는 데 사용한다. 양자는 가능한 신호의 집합을 의미하며, 이 집합에서 특정한 신호를 골라낼 수 있다. 릴라 개틀린〔Lila Gatlin〕은 ≪생명 시스템과 정보이론〔Information Theory and Living System〕≫이라는 책에서(이 주제에 관해서 내가 찾아본 책 중에서 가장 바삭하고 예리한 책이다) 신호의 최대 엔트로피가 신호에 있는 알파벳 자모 수의 로가리듬과 같다고 하며, 그 수치는 문자 ‘a’로 나타낸다. {DNA 사슬은 알파벳 자모 A, T, C, G 총 4개의 뉴클레오타이드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a = 4이다 — 역자} 따라서 볼츠만의 K log W는 log a로 단순화된다. 이진로그를 사용하는 경우 정보의 단위는 ‘비트’가 된다. 한 신호의 정보치〔level of information〕는 계의 엔트로피와 같다. 예를 들어 유전 코드처럼 요소가 4개인 계에서는 존재할 수 있는 정보 내지 사건은 총 4개이며, 가정상 그 중 하나는 메시지 내부 어느 위치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불확실성이 최대인 상태에서 각 신호는 log 4의 정보 값〔information value〕을 갖고 있을 것이고, 이는 2와 같다.

    개틀린은 이렇게 썼다. ‘따라서 우리는 잠재 정보가 가진 고 엔트로피 상태에 잠재 메시지의 다양성〔variety〕, 긴 어휘 목록, 놀람 값〔surprisal value〕, 예기치 않음〔unexpectedness〕 개념을 결부한다’ [p.49]. 잠재 정보는 에너지가 최대값, 즉 log a에 접근할 때 증가한다. 반대로 음의 엔트로피, 즉 네겐트로피는 저장된 정보, 즉 정보의 밀도와 같다. 따라서 네겐트로피란 곧 계의 질서도를 나타내는 양이다. 저장된 정보를 잠재 정보의 비율로 표현한 것을 중복성〔redundancy〕이라고 한다. ‘만약 아무런 제약이 없고 가능한 모든 문자의 조합이 동일 빈도로 발생한다면, 잠재 메시지의 다양성은 최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류를 탐지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류 탐지와 수정은 금지 조합과 제한 조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p. 50]. 효과적인 통신과 마찬가지로, 제어 시스템 내부에서의 효과적인 에너지 전달 또한 순수 정보(무질서)와 안정성(질서) 사이 균형을 요한다. ‘언어를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능력은 엔트로피 최대치나 최소치에 달린 것이 아니고, 다양성과 신뢰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요소를 섬세하게 최적화는 일에 달렸다.’ [p. 51] 이 주제에 대해서 아주 권위 있는 책이 두 개가 있는데, 각각 카르납〔Rudolf Carnap〕의 ≪엔트로피에 대한 두 소론〔Two Essays on Entropy〕≫(London, 1977)와 쿨백〔Solomon Kullback〕의 ≪정보이론과 통계학〔Information Theory and Statistics〕≫(New York, 1968)이다. 다만 나는 두 책 모두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원주) ↩︎
  11. 원문에 집수조〔sump〕라고 되어있는 것을 열침〔heat sink〕으로 보고 번역했다. (역주) ↩︎
  12. 이 문장은 뒤에 나오는 내용과 합치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역주) ↩︎
  13.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전문을 볼 수 있다 [링크]. (역주) ↩︎
  14. 에른스트 체르멜로〔Ernst Zermelo〕의 재귀 반론〔Wiederkehreinwand〕이란 긴 시간에 걸쳐 일어나는 H값 변화의 반복에 기반한 논증으로, 푸앵카레의 공식에 근거하여 H값의 방향적 경향이 입자역학과 모순된다고 주장한다.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가 저서 ≪역학에 대한 통계적 접근의 개념적 토대〔The Conceptual Foundations of the Statistical Approach in Mechanics〕≫에서 주장하기로 체르멜로의 반론은 볼츠만이 거부한 입자 충돌〔Stosszahlansatz, 충돌수 가정〕 측면에서 열역학적 과정을 공식화하는 방법에 기반한다. (원주) ↩︎
  15. 서울대학교 화학과 명예교수 신국조는 이렇게 요약했다. ‘비평형 열역학의 선구적인 개척자로는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했던 볼츠만〔Boltzmann, Ludwig〕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엔트로피의 통계적인 근원을 밝혔으며 열역학 제2 법칙에서 제시된 비가역성의 미시적인 근원을 찾기 위하여 확률적인 개념을 도입하였다. 1872년에 발표된 볼츠만 방정식은 어떤 입자가 어느 위치에서 어떤 속도를 지니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확률을 나타내는 확률밀도함수가 만족시키는 방정식이다. 이 방정식은 원천적으로 뉴턴의 방정식으로부터 유도된 것으로 볼츠만 자신은 이로써 비가역성의 미시적인 근원을 찾아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무한정 오랜 시간을 기다리면 평형상태에 도달할 것이며, 이 때 볼츠만 방정식의 해가 바로 평형상태에 있는 입자들의 속도 분포를 나타내는 맥스웰·볼츠만 분포함수로 귀착된다. 그러나 볼츠만 방정식은 곧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다. 로슈미트〔Josef Loschmidt〕와 체르멜로〔Ernst Zermelo〕 등은 원천적으로 가역적인 뉴턴의 방정식으로부터 비가역적인 볼츠만 방정식이 엄밀하게 유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볼츠만 방정식의 비가역성은 푸앵카레〔Henri Poincare〕의 ‘재귀정리〔recurrence theorem〕’에도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볼츠만은 이러한 반론에 부딪쳐 자신의 이론을 더욱 다듬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비가역적인 자신의 방정식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분자들의 무질서도에 관한 ‘에르고드 가정’이 도입되었고 회귀시간이 엄청나게 길 뿐이지 푸앵카레의 회귀정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그의 생전에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로 인한 우울증과 집안에서 유래된 지병이 악화되어 1906년에 볼츠만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우한 생애를 마감하였다.’ 신국조, 과학사상 제4호, 비평형 열역학과 프리고진, pp. 256-266. (역주) ↩︎
  16.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방정식을 상세히 논의하며 [B III 587], 푸앵카레 방정식의 핵심 전제를 ‘역학 미분방정식의 적분이 갖는 일의성〔univocity〕과 가역성’으로 설명한다 [B III 587]. 이전 주석 참조. (원주) ↩︎
  17. 즉 H곡선〔H-curve〕의 골과 봉우리. (역주) ↩︎
  18. 이 부분 또한 바로 이전 문단에서 등장하는 내용과 합치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역주) ↩︎
  19. Tohu-Bohu, 혼돈
    성서 히브리어 구절 ‘תֹהוּ וָבֹהוּ(ṯōhū wāḇōhū)’에서 음차한 것으로, 창세기에서 빛이 생기기 이전 땅의 상태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킹 제임스 성경에는 ‘형체가 없고 공허하다〔without form, and void〕’로 번역되어 있고, 칠십인역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형체가 없다〔ἀόρατος καὶ ἀκατασκεύαστος〕’로 되어있다. ↩︎
  20.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인류를 ‘개선하는 자들’, §4 참조. (역주) ↩︎
  21.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배후 세계를 신봉하는 자들에 관하여 참조. (역주) ↩︎
  22. 프로이트 본인의 설명은 바로 이전 부분에 나와있다. ‘그러면 모든 유기적 본능은 보수적이고, 이 본능은 역사적으로 습득되고 이전의 상태를 회복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유기적 발달의 현상은 그 원인을 외부의 장애적 영향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기본적인 생명체는 바로 그 시작에서부터 변화에의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상황이 그대로라면 그것은 항상 같은 삶의 진로를 되풀이하는 일만을 할 것이다. 결국 유기체의 발달에 흔적을 남기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역사와 이것의 태양과의 관계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유기적 생명체의 진로에 가해지는 모든 변화는 보수적인 유기적 본능에 의해서 접수되고 앞으로의 반복을 위해서 저장된다’ [정신 313]. (역주) ↩︎
  23. 즉 죽음이라는 숙명 내지 숙명으로써의 죽음 개념을 뜻하며, 프로이트가 <쾌략원칙을 넘어서>에서 사용하는 아난케〔Ananke〕를 의미한다. (역주) ↩︎
  24. 이러한 차이는 <과학적 심리학 초고>에서 가장 명시적으로 나타난다(내가 인용하는 독일판에는 없고 표준판SE I 283에 있다). 프로이트는≪꿈의 해석(Traumdeutung)≫에 붙인 중요한 주석에서 그 일반성을 논한다 [F II 516n]. (원주) ↩︎
  25. 외부에서 섭취한 에너지원을 자체의 고유한 성분으로 변화시키는 일. (표준국어대사전) ↩︎
  26. 바타유의 태양 경제학은 종종 인본주의 좌파로부터 자연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자연화에 대한 저항은 곧 칸트적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겠으며, 초월 철학과 동시적이다 (수많은 최신 ‘이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후기 부르주아적 현대 문화 전복이 아니다). 칸트주의의 시발점은 반자연주의적 방법으로 대상에 접근하는 것이다. 만약 ‘이데올로기’를 자본의 합리성(과장된 표현이다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더라면, 이 이데올로기의 핵심 성격은 자연화가 아닌 반자연주의이다. 꼭 실재의 탈자연화에 ‘진보적’ 성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반자연주의를 — 신화적·신학적 역행 없이 — 신중하게 수행할 수 있다면, 분명히 신흥 자본(의 이해관계)을 지원하여 기존 자본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며,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대다수 경우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금기시한 것은 전혀 다른 것 — 자연적 탈자연화, 즉 리비도적 상승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트가 비평의 지평 내에 — 정당한 기호학 비평 분야로 — 들어가는 한편, 니체는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이다. (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