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敎正典

sacred texts

I


이교도적 부정신학

II


번역에 대하여

닉 랜드

≪소멸 갈증≫

I

서문


1

말 되는 철학의 죽음


3

위반


/

11

끊나지 않는 소통


참고문헌


조르주 바타유

제쥐브


3

└ 송과안


희생


4

≪도퀴망≫

꽃말


5

≪비평 사전≫

≪철학 연구≫

미궁


10

≪사회학 학회≫

≪아세팔≫

니체와 파쇼들


제안


앙토냉 아르토

부록

색인


保管所

Archive

Assimilare

니체의 광증

조르주 바타유

1899년 1월 3일,

오늘로부터 50년 전,

니체는 광증에 굴복했다.

튜린의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눈물 흘리며 채찍에 얻어맞은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니체는 곧 땅에 풀썩 쓰러졌고,

정신을 되찾았을 적에는 자신이

디오니소스

이자

십자가에 못 박힌 자

라고 믿었다.

이 사건은

비극으로 간주하고

추념하여야만 한다.

차라투스트라 말하기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 명령할 때조차도

자신의 명령에 대해서 보상하여야만 하느니라

자신의 법에 대해 판관이자 수호자,

제물

되어야만 하느니라.”1

I

우리는 비극적인 사건을 추념하고자 하며, 생명을 지지대 삼아 지금 여기에 있노라. 별로 수놓인 창공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땅은 우리들의 발아래서 회전하고 있다. 우리들의 몸속에는 생명이 숨쉬고 있으나, 죽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기도 하다(사람이라면 저 멀리서도 마지막 숨을 내뱉는 순간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저 멀리 위에서는 밤에 잇달아 낮이 오고, 또 낮에 잇달아 밤이 온다. 한데 우리는, 우리가 무슨 존재인지 그것조차도 알지 못한 채로 큰 소리로 지껄이고나 있다. 그리고 이성을 지닌 자라는 우리는 언어의 규칙을 따라서 말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광인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우리는 혹여나 광인이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 벌벌 떨었고, 불안한 마음으로 규칙을 준수했다. 하물며 광인들의 비정상 행위는 분류 당하고 등급이 매겨진 나머지 한치의 특이성 없이 되풀이되고 있어서, 극심한 권태를 일으킬 뿐이다. 사람들의 눈에 비치기로는 광인들에게 일말의 매력조차가 없기 때문에, 논리가 갖는 무게와 가혹함은 늘어만 간다. 하나 사변에 빠진 철학자2란 어쩌면 미치광이보다도 더 부정한, ‘공허한 하늘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겠는가. 경우가 이러하다면, 범사를 뒤로 제쳐놓고 뛰어넘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아니 된다. 상투적인 말에 불과하니. 상투적인 말에 불과한 이상, 금방 의미를 깡그리 잃어버리고 마리. 그러나 하찮은 장난질이나 하는 그런 마음으로 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도 불안에 꽉 차 땀에 젖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꼭 체험해 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땀이 줄줄 흐를 때까지 열광하지 못 해봤는데 무슨 핑계를 대겠는가? 땀 흘려본 자들의 장난보다 땀 흘리지 아니하는 것이 훨씬 더 부정하다. 철학자는 현인이라고 불리우지만, 철학자라고 하여서 인간 집단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집단은 서로를 물어뜯는 몇 사람의 철학자들과, 어떤 때는 조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시끌벅적 하기도 한 대중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대중들은 철학자들을 못 본 체한다.

지금 바로 이 시점, 땀 흘리는 자들과, 변화무쌍한 역사가 인생의 의미를 또렷하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어둠 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있다. 과연 대중은 역사에 걸쳐 서로를 몰살하며 — 살육과도 같은 대화라는 형식하에 — 다양한 철학에 산재한 모순을 낳은 바 있으니. 하나 완성이란 곧 아이를 낳는 것만큼이나 힘든 싸움일지며, 완성과 싸움 너머에 죽음 말고 무엇이 있는가? 끊임없이 서로서로 파괴하는 말 너머에, 사람들이 땀에 젖고 웃음에 잠겨 미치게 만드는 침묵 말고 무엇이 있는가?

하나 만일 인간 전체, 즉 인간들의 완전한 존재가 — 전체만큼이나 고독하고 고적한 — 한 사람의 육신 속에 다시 났더라면, 그 사람의 머리는 잠재울 수 없는 싸움의 장일 것이요, 너무나도 난폭하여서 금방 폭발하여 파편을 공중에 흩뿌리고 마리라. 육신에 난 이 자의 광기가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격동과 분출에 이르게 될지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드니까 — 신을 마주하게 되는 즉시 죽여버려야만 하고, 곧 자기 자신이 스스로 신이 되면서도, 금방 무 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이 자의 광기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드니까. 그러고는 맨 처음 스쳐 지나간 행인이나 마찬가지로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깨닫겠지만, 평안을 취할 수 있는 수단조차 모두 빼앗긴 처지에 놓여 있으리라.

실상 이 자는 생각하고 말하는 것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고 말한 것대로 살아야만 하도록 내면의 욕구가 강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하나의 육신에 난 자는 너무나도 자유로워서 그 어떤 언어도 (변증법조차도) 이 자의 움직임을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육신에 난 인간의 사유만이 축제로 화할지며, 그 흥분과 방탕은 비극과 불안의 감정보다 더 광란할 것이다. 이것은 ‘육신에 난 자’조차도 미쳐야만 한다는 것을, 그 누구도 이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바다.

머릿속에서 지축이 몇 번을 빙글빙글 돌아야만 하겠는가! 어느 때가 되어야 십자가에 못 박히겠는가! 언제가 와야 디오니소스의 축제가 되겠는가(그리고 그 뒤에는 그의 … 를 보고 겁에 질릴 자들이어)! 하지만 그가 혼자가 된다면, 황제가 된다면, 전능하고 신성한 자가 된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이 자를 영접할 적에 눈물 흘리며 쓰러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인의 이성이 비이성을 알지 못하는 무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신 신께서는,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1939년 1월 3일)3

II

그러나 이렇게 거센 움직임을 표출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은, 곧 말의 존재 의의와도 같은 욕망과 결의와 결속하지 않는다면, 충동을 져버리고 말 테다. 절정에 이른 광기의 표상이란 불가능한 것이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이라면 마치 하나의 뼈가 다른 뼈와 연결되어 있듯 스스로를 동류와 매어주는 표현 도구를 직접 파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블레이크의 격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다른 이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우리가 미쳐야만 한다. 광증이란 인간의 총체성 바깥에 놓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 총체성이란 광인 없이는 이룰 수조차 없는 것이다. 니체는 우리 대신에 미침으로써 이 총체성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니체 이전에 미쳤던 자들조차도 니체만큼의 폭발력으로는 이뤄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같은 인간들에게 자신의 광증으로 선사하는 선물이란, 준 것 이상으로 되돌려 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일까? 하물며 타자의 광증이라는 휘황찬란한 선물을 받는 자 당인의 비이성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합당한 답례품이 될 수 있겠는가?

블레이크가 남긴 다른 격언이 있다. 욕망하면서도 그 욕망을 행동에 옮기지 않는 자는 병을 퍼뜨리는 자다.
욕망을 표출하는 것을, 욕망을 행동에 옮기는 것과 혼동하는 경우 최악의 병이 생겨난다 —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인간이 거센 충동을 따르는 것을 멈추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곧 적어도 충동을 표출하는 동안은 충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니까. 충동을 표출한다면, 우리는 정열과 정열을 상징하는 피상적인 기호를 바꿔쳐야만 한다.4 고로 스스로를 표출하고자 하는 자는 타오르는 정열의 장을 지나 상대적으로 냉철하고도 잠잠한 기호의 장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표출한 내용이 우리의 면전에 있다면, 그것을 표출한 자가 깊은 잠에 빠져들 준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항상 질문해 봐야만 한다. 그리고 이 질문을 하는 데는 아주 가차 없는 (sans défaillance) 태도를 가져야 한다.5

한때는 광증이 인간을 완성해 주리라고 생각했던 자들은 이제 명철한 정신을 갖게 되어, 더는 광증과 이성 사이를 가르지 아니하며, ’코골이를 의로운 행위로 만들어 주는 악몽‘이라는 위선과, 자기 자신을 지배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사이를 가르도록 되었도다. 정점에 이른 폭발과 촌열을 목도한 자가 그 어떤 부정을 저지른다고 해도, 미친 척하는 예술 따위만큼이나 가증스럽게 보일 일이 없으리라. 자기 명령의 제물이 되어야만 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제 운명을 완수하려고 하면, 운명께사 자기 자신을 잃어버려야만 하노라고 주문하고 든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 그래서 이 자의 두 눈에 광증과 죽음이 휘황찬란한 축제와도 같아 보인다면 — 삶, 그리고 운명의 사랑 그 자체가 사람이 이라는 죄를 범하기를, 그리고 나중에 그것을 속죄하기를 그 무엇보다 바라오리라. 운명을 주문하는 것이, 극단의 운이 불러오는 감정으로 엮여 있는 그것이, 바로 여기에 있노라.

무력한 섬망에서 힘으로 나아가는 이 사람의 인생은 — 마치 삶의 종착지에서 역으로 힘이 파멸로 뒤바뀔 때도 그래야 하는 것처럼 — 힘을 찾아내려 제 자신을 떠나, 동서로 고군분투 할 적에나 비로소 흐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총체성이 비극과 결속되어 보였던 그 순간, 사람은 이 계시가 어찌나 깊은 쇠락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는지 이해했음이라. 사람은 자기 말고도 비밀에 다가가는 다른 자들이 — 고로 대지의 진정한 ‘기지’ 내지 ‘의미’를 현시하는 자들이 — 문학과 예술이라는 방종한 잠에 빠져든다는 것을 볼 수 있었으라. 고로 사람에게 인간 존재의 운명이란 힘을 취할 가능성조차를 모두 잃어버린 몇 사람이나 관련 있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도덕적 타락을 겪는 사람 중에 어떤 자들은, 주변에 자리한 군중과, 군중을 대표한다는 자들이 손에 닿는 것이라면 죄다 필요에 굴복하게 만들 때조차도, 자기들이 믿는 것보다 더 커다란 무언가를 지니고 있으니까. 비극을 명상함으로써 극한의 상태에 이르는 결실을 본 자는6고로 — ‘상징적인 표현’에 머무르며 자족하지 아니하고 — 동지들에게 무엇이 절실한지 가르쳐야만 하느니라. 이 자는 완고와 강단으로 동지들을 이끌어, 적수들에게는 곧 경멸의 대상인 파쇼들과 기독교도들과는 비교되지 아니하도록, 이들이 서로 뭉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자들에게는 굴종하는 삶을 받아들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에게 운을 가르쳐야 할 임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운이라고 함인 즉, 이 자들이 곧 운이지만, 의지 부족으로 포기한 바로 그것이다.


  1.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부 12장. (역주)
  2. 원고(삭제) : 토론장에서 발화하는 철학자
  3. 원고(삭제): 생제르맹앙레, 1939년 1월 3일.
  4. 원고(여백 주석) : 이 사실은 총체적 존재의 격정을 지닌 자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그 자가 누구든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한다.
  5. 원고(여백 주석) : 실패(défaillance)란 절정에 이르지 아니한다면, 정당할 수 없다.
  6. 원고(종결부 내용이 다름) : 고로 혹독한 수행을 통하여 강해진 자는 동지들에게 똑같이 이 혹독한 수행을 가르쳐야만 하느니라. 이 자는 자가당착에 빠진 파쇼들과 기독교들과는 반대로 동지들을 이끌어 잠에서 깨우고, 문학으로 입을 헹구는 자들의 행패로부터 동지들을 떼어놓아야 한다. 그는 동지들에게 가서 동지들에게는 타에 굴종하는 인간들에게 운을 가르쳐야 할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알려야만 하느니라. 운이라고 함인 즉, 이 자들이 곧 운이지만, 중대한 결의, 명정한 결의 없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노라면 필수 불가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