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said to Nieztsche
That’ll Tietzsche,
You irritating little Krietzsche.
— 작자 미상의 그라피티
기독교는 자기가 심어놓은 광풍의 씨앗을 거두게 될 것1인가? 기독교가 유약한 틈조차 없이 폭정의 권좌에서 내려와 농담거리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있으나, 기독교가 천벌을 피하려고 하는 것을 기독교의 적들이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참 당혹스럽다. 우리는 우리를 박해한 이단심문관이 폐망하는데도 이렇게나 무심하단 말인가? 이들이 얼마나 가축화에 성공했으면 우리는 주인을 깨물어버릴 본능조차 빼앗겼단 말인가? 마침내 우리는 전제정의 사랑이라는 고문 궁전에서 탈출해 나와 뒤척이고 있고, 멍하고 혼란스러운 채로 패혈증이 발병해 버린 과거의 뒤틀린 상처에 아파 외축하였다(이제 이 상처는 세속 문화라는 걸레짝으로 대충 봉해져 있다). 기독교 이후의 인류가 발 삔 개때에 불과하단 것은 통렬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조르주 바타유는 자기 텍스트로 기독교가 아주 조심스럽게 심어놓은 조용한 죽음의 경로에 아주 뛰어난 걸림돌을 박아놓았다. 다 죽어가는 기독교의 고난을 20세기까지 연장해 놓은 그 조용한 죽음. 기독교는 인간종을 갈기갈기 해부하면서 보낸 2000년의 장장한 세월동안 쇠약해진 나머지, ‘포스트모너니티’의 망토를 뒤집어쓴 순진한 관용주의의 도움을 받아 무대 뒤로 살금살금 도망가려고 하는 중이다. 천재가 아니더라도 군사적 유신론에서 포스트모던적 양가감정으로의 전환이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지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군주는 수가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판을 엎을 수 있다. 형이상학도 마찬가지다. 칸트에서부터 실험적 철학은 기성(유신론적) 권력에 이득이 되는 결과를 생산하길 그쳤고, 우리는 갑자기 “이 판은 끝났으니, 무승부라고 하세.” 운운하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유럽 이성의 권위주의 전통은 철학의 대항해가 재밌어지자마자, 즉 무신론적이고 비인간적이고 실험적이고 위험해지자마자 숨통을 떼어 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 이율배반의 불가지론적인 교착 상황을 거부했기에 — ‘형이상학의 종말’이라는 표제어 하에 꾸며진 평화협정에 질려버린 사람들의 집회 장소였고, 가장 최근에 나타난 쇼펜하우어의 계승자는 바타유이다. 안티크리스트의 힘이 엄니를 드러내고 용기를 들쳐업은 채 일신론 헤게모니의 경야(經夜) 위 검게 그을린 쥐구멍에서 비상하고 있다. 해체론적 비결정성이라는 마비독이 묻은 땜질에 대한 한치의 믿음도 없이. ‘원칙상 죽음이 당도하는 순간부로 전쟁을 준비하지도 않고 종교적이지도 않은 태도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다.’2 전쟁은 이제 막 시작한 참이다.
데카르트나 칸트보다 더 터무니없는 철학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 둘은 자신의 겸허한 철학 체계를 과잉적인 바로크 양식 교회 건축 옆에다 세웠으니 말이다. 비량(飛梁) 아래 그림자에 서서는 거만하고 학술적인 말재간으로 “진리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이지?” 하고 물으면서. 이런 조건에서 ‘인식론적인’ 질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게 오로지 니체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철학자가 이웃으로 기독교 사제, 즉 전 지구 온 역사상 가장 허위적이며, 가장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체계의 수행자를 사귈 때, 어떻게 ‘진리’에 대해 긍정적 태도로 헌신과 탐구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 진리란 귀머거리의 특권에 불과하다. 서양 전통의 범주 안에서, 우리들의 ‘상식’의 기초를 다진 신학 개념이란 대성당 안에서, 진리에 대한 권위적인 담론을 대할 때 따져야 할 ‘오류’도, ‘논증의 구멍’도, ‘불합리한 판단’ 따위도 없다. 아무렴 이런 곳에선 광신적이고 뿌리 깊은 거짓말의 규범밖에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은가. 즉 미학적 사고의 한 지류가 쇼펜하우어, 니체, 바타유를 타고 번지는데, 역사상 최초로 이 질문을 제기하여서 상류중산층의 변론적3-인식론적 문제를 전복하는 것이다. “도대체 거짓말은 언제 가야 멈추나?”
기독교에 반하여 일어난 전쟁이 갖는 위대한 교육적 가치는 사제의 완전한 거짓됨에 있는 것이다. 이 정도로 순수한 것은 보기가 아주 힘들다. ‘신의 대변자’라는 놈들은 정직하게 구는 것은 고사하고, 진실이 시야에서 아예 사라 져버릴 때나 등장한다. 사제들의 온 소화기관은 거짓말이요, 그들이 숨 쉬는 공기, 그들의 빵과 와인이 아예 다 거짓이다. 사제들은 비밀스러운 거짓 의사 없이는 날씨에 대한 말조차 뱉지 않는다. 사제들은 가식의 세밀한 반사작용으로 하여금 어떤 조그마한 말도, 몸짓도, 인식도 잡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세간을 떠도는 거짓에 대해서는 제일로 더럽고, 추하고, 억압적인 졸렬로 감싼다. 사제의 입밖으로 나오는 모든 말은 사람들이 순간 잘못 알아들은 몇 마디 간계 빼고는 무조건 완전히 거짓이다. 사제의 말을 부정하려 들 때 우리는 땅바닥에 파묻힌 현실의 파편을 찾아낸다.
신학에 반한 전쟁이 없다면 진리도 없다. 심지어 ‘진리’라는 단어마저 사제가 거짓과 함께 뱉어낸 가래침이 묻어있다. 이 상황에서 사태를 끊어내는 것은 어디 다른 신념이 아니라 이미 뱉은 거짓에 대한 가차 없는 부정뿐이다. 위험한 이단자들은 변증술을 뛰어넘으나, 거짓부렁이를 죽이는 것은 회의주의자다.
철학이라는 이름이 농담거리로 떨어질 때마다, 철학은 지하에 도사리던 질문에 시달려왔다. ‘지식이란 것이 비지(非知)4를 단련할 수단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지표에 있는 얕은 것들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올 수 있었던 유일한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철학의 영광과 치욕은 지(知)의 끝을 찾았을 뿐이요, 이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뻔뻔한 궤변이 자리를 뜨고 나면 독단론자들의 주장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회의주의가 단 한 번도 실천된 적이 없다는 것뿐이다. 경험론의 향수가 풍기긴 하지만 꽤 강력한 주장이다. 불신의 철학적 변론자들이 자기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상념을 남용해서 경박한 난봉을 수용할 피난처를 세웠다는 데는 별 이견의 여지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다. 철학은 마치 무지가 고백해야 할 감정(pathos)인양 자신의 무지를 인정함으로써 궤변술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오로지 심각한 광증(escanity) [‘Escane’ — 정신이 나가다] 만이 실질적인 회의주의일진대, 그 반대격엔 믿음이란 것이 손쉽게 폐기할 수 있는 것, 배척할 수 있는 것인 양, 철학적 회의주의가 순진해 빠진 믿음론에 된통 당한 일이 있다. 아무렴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실상은 이조차 모르고 있고, 논고 따위가 궁핍한 처지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다. 믿음은 갖는 것이 아니라 갇히는 것이다. 우리는 광범위한 지식으로 지(知)를 부정하고도 완전무결한 지를 계속 믿고 있다. 지하감옥 처지에 수긍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벽에 구멍을 뚫는 것과는 다르다. 미지로의 여정이 신앙을 빠져나갈 유일한 길이다.
칸트는 위험한 회의론자들을 두려워한다. 지식의 땅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황야에서 온 ‘정착해서 땅을 경작하는 것을 싫어하는 유목민들.’5 이 자들은 탐험가다. 즉 비지(非知)가 치고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말이다. 이 반인본주의자들을 통해서 불현듯한 샤먼의 제로(zero) — 고대인의 에포케(ἐποχή) — 가 지상으로 전염성 광증을 끌고 들어온다.
에포케(ἐποχή)라는 단어는 간접 르포를 통해 피론의 것이라고 붙여졌다. 그러나 금방 제 부재 속에 남아있던 철학자의 이름마저 잃어버리리라. 혹자는 우리가 피론에게서 에포케를 빌어왔다고 주장하겠지만, 오히려 피론의 이름이 비지의 암호로써 에포케에서 튀어나왔다. 피론의 침묵 — 즉 소크라테스가 산문에서 자신의 존재를 감춘 것보다는 훨씬 심오한 침묵 — 이 없었더라고 해도 에포케란 우리가 그 진실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커녕, 독단적 상태 내지 방법론조차도 아니었으리라.
에포케란 불현듯 튀어나오는 것에 대한 르포르타주요 탈출의 르포르타주다.
1. […].
2. “현상의 세계는 조정된 세계이며, 우리는 그것을 실제라고 느낀다. “실재”는 동일한, 이미 알려진, 서로 관련된 사물들의 지속적인 반복에, 그것들의 논리화된 성격에, 우리가 여기서 계산하고 산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3. 이 현상세계의 반대는 “참된 세계”가 아니라 혼돈 상태에 있는 감각의 형식 없고 공식화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류의 현상세계, 우리에게는 “인식될 수 없는” 현상세계가 현상세계의 반대인 것이다.
4. 우리가 감각의 수용성과 자발성을 완전히 제외하더라도, “물자체”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다음의 질문으로 반박되어야 한다. 사물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물성”은 우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가상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방식들이 여전히 많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6
사유의 개념에 얼마나 많은 산업주의가 숨겨져 있는가! 마치 더 일하면 일이 해결되기라도 한다는 양. 열심히 탈출로를 그려서 탈출에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일단 나간 다음에야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바타유의 니체는 세속 이성의 중심이 아니라 샤먼 종교의 중심, 바깥 영역을 향해 철학적 개념성을 뛰쳐나가는 작가, 물자체를 제거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물자체란 되기(탐험)7의 방향으로는 중요성이 없는 가지적 표상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죽음의 초월성을 부정하며 ‘보고된 바 없는 여행로’8의 길목을 개척한다. 바타유는 니체 독해에 결부된 얕은 현상주의(phenomenalism)에 맞서 심연의 회의주의로 통하는 균열을 좇는다. 칸트의 예지계(내지 예지 대상)에서 빠져나와,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남아 있는 플라톤주의를 한 꺼풀 벗겨내는) 물자체를 통과하여, 비범주적, 에포케적 물질, 랭보의 ‘보이지 않는 찬란함’9과 연결되는 저열한 물질을 — ‘이미지 없는 우주’의10 장대한 죽음경관(deathscape)을 — 향해 나아간다. 물체에 관념성을 결부하지 않는 이상 범주를 할당할 수 없는 법이다. 나아가 니체가 물자체(Ding an Sich)에 제기했던 문제는 물자체가 가정하는 독단론적 유물론에 대한 것이 아닌, 물자체가 ‘물질의 관념적인 형태’11를 절대 진리의 (격리당한) 초월론적 터, ‘참된 세계’ 로 가정했다는 데 있다. 물체가 없기 때문에 물자체도 없다. ‘사물성이란 논리적 필요에서 […] (즉 궁극적으로는 문법의 요구에 불과한 필요에서) 우리에 의해 사물에 덧붙여 허구적으로 날조된 것이기 때문이다.’12 물자체(Ding an Sich)란 절박하게 스스로를 감추려 하는 신(지고의 존재)을 위해 재단된 개념이다. 신이란 이젠 추잡한 것이 되어버린 문화의 오류에 불과하지만, 마침내 저 멀리 줄행랑치려고 발버둥질하고 있는 것이다. ‘실체라는 생각이 뿌리내리고 있는 곳은 언어이지, 우리의 외부에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13
가상 세계와 참된 세계의 대립은 “세계”와 “무”의 대립으로 환원된다.14
유물론은 교리가 아니라 원정이고, 사회 치안이 유지되는 신념에서 탈출하여 산으로 가는 것이다. 유물론은 ‘관념론을 억척스럽게 부정하는 것에 불과하고, 결국에 그 말은 곧 온 철학의 기반 자체를 부정한다는 뜻이다.’15 비범주적 물질을 탐험하는 것은 사유를 운으로 행보하고 물질을 ‘모든 규율 너머에 있는’16 난류로 행보한다. 그것은 판단해야 할 명제 따위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탐험로를 산출한다.
이것이 철학자들(새로운 사제들)과 전쟁을 치르는, 엄니를 장착한 시인 니체, 삶을 더 문제 삼고자 분투하는 니체의 모습이다. 바타유는 미궁 밖으로 우리를 빼내 줄 ‘합리성’이 아니라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실과 공명하는 욕망에 몰두한다. 니체는 복잡화하는 사유의 좋은 예시다. 니체는 탐구의 구미에 따라 지식을 이용한다(명료화하고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묘하게 만들고 자르고 끊기 위해서이다). 복잡화하는 사유는 제 강박적 경향이 해결과 결론으로 향하는 반응적 힘에 반하여, 적극적, 정열적 혼란 상태 — 섬망 상태 — 의 추동력을 강화한다. 그리고 철학적 추론의 근본 요지에 반하여, 지식에 반하는 사유, ‘진리에의 의지’라는 안정제에 반하는 사유의 편에 선다.
니체가 철학과 극히 고된 싸움에 갇혀 있는 것은 이 철학이란 것이 가장 냉소적인 명료성을 갖고선 문제 따위는 치워버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언제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어 했다. 쇼펜하우어야말로 이런 철학에 대한 한치의 꾸밈없는 예시다. ‘절대성’은 인간 나태의 극치다. 사유가 사유 안에서 — 아니면 철학자들이 한때 말하였듯 — ‘내재적으로’ 복잡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불충분하다. 이런 사유가 어디로 향하는지 우리는 이미 알기 때문이다. 내재적 비판을 요하는 지성은 이미 궁극적인 해결 가능성에 은근슬쩍 가닿으려고 한다. ‘지성은 자기 한계를 자기 안에서 찾는다’ — 지성에 대해서는 철저한 탐구조차 필요 없다! 이러한 사유 방식에서 가장 탁월한 모범은 비판철학의 칸트이며, 곧 니체가 앉아서 글을 쓰는 작가들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된 이유다.
지혜(sophia)는 탐험을 대체한다. 탐험을 비워내고 보들레르가 그려낸 — 도덕 교리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 여행17이란 캐리커처로 채운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잠자코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마취-플라톤적(narco-Platonic) 에로스 아래 종속당한 철학은 욕망이 끝나는 곳을 찾고 있다. 니체는 뒤로는 이런 고대 그리스적 사제-철학하기 이전으로, 앞으로는 근대적 한계 이후로 넘어가 지혜(sophia)를 재조립하여 탈주로 만들어버린다.
우리 철학자들, “자유로운 정신들”은 “늙은 신이 죽었다”는 소식에서 새로운 아침놀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의 가슴은 감사, 놀라움, 예감, 기대로 흘러넘치고 있다. 마침내 우리에게 비록 밝지는 않을지라도 수평선이 다시 열릴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배가 다시 출항할 수 있게, 모든 위험을 향해 출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식의 모든 모험이 다시 허락되었다. 바다가 —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 그러한 “열린 바다”는 아마도 일찍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을 것이다.18
신죽음은 어떤 계기, 기회19이다. ‘예지계’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것도 타당하다. 하나 ‘기회’란 이렇게 써먹는 것이 아니다. 기회란 이해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한 자에게, 신이라는 개념이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또 의심쩍은지, 어찌나 날개를 잘라대는지!’20 일신론은 대단한 문지기요, 일신론이 끝나는 곳은 죽음의 탐험이 시작하는 곳이다. 금지된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그곳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거나, 그곳이 우리에게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종국에 시란 위로 천국의 거미줄에 걸려있는 게 아니라면 밖으로 지옥의 그림자 너울에 걸린 침략과 소각의 궤도에 해당하지, 표현 양식 따위가 아니다. 시란 창조와 생성 바깥으로 나오는 길목이고, 각 길목은 제 운명에 따라 수수께끼요 유혹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제 고되고도 피할 수 없는 여정 — 갈 수 있는 곳의 끝장을 향한 탐험이 시작된다.’21 ‘나는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22 가장 천상에 가까운 호기심마저 — 영원의 거듭제곱, 영겁의 세월 앞에선 — 심연의 길을 따라간다.
가끔은 바타유가 기독교에서 모든 것을 빌어온 것처럼 보인다. 바타유가 악을 이해하는 방법은 에로틱한 사랑의 중심에 담겨있다. 바타유의 글에서 나타나는 히스테릭한 정서는 곧 분변에 대한 집착이자 환희에 대한 간질적 지각이요, 악, 시궁창의 영영무구한 악취다. 이는 분명히 기독교적인 것이매, 제국의 하수구에서 착안된 교리에 잘 맞춰져 있는 것이다.23 그러나 바타유의 글에 산재하는 범죄적인 힘과 무질서가 불가능한 제안을 영원히 되풀이한다. 신이란 목적론적 개화는 고사하고 종교의 정점은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억압의 법칙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이다. 신(theos)의 통일성은 신성한 제로의 묘석이요, 세속의 궁핍이란 묘에 꽂힌 채 부식되고 있는 화강암 초석이니라. 이 말은 사실에 너무나도 근접하여 사실 신의 존재란 우리보다는 신 당인에게 더 커다란 재앙이 되리라. 예수의 십자가형이 신이란 존재의 모멸적인 고문 앞에 어찌나 하찮아 보이던가. 결국 존재란 추와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여서, 영원한 존재의 냄새를 상상하기만 해도 우리 얼굴은 창백하게 변하고 만다. 어쩌면 이것이 신이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인’24 이유, 바타유가 ‘나는 신이면서도 신을 끝까지 부정하노라’25라고 하는 이유일 것이다(니체는 이렇게 예언한다. ‘니힐리즘은 신적인 사고방식일 수 있다.’26). 신이 우주를 노예 상태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가 창조한 것들을 재로 불사르고 스스로 소멸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눈 부신 태양의 신 […].내가 찾아 들쑤시던 죽음의 신’27이다. 바타유는 자기 살을 도려내는 신성의 어둑한 저류를 불러낸다. ‘절망의 신이시여, 나에게 […] 당신의 심장을 주소서 […] 당신께서 존재하심을 더는 견디지 못하는 그 심장을.’28 (신이 탐험가라면 더는 신은 없다.)
바타유의 텍스트는 ‘신이나 존재 이유 따위 없는 말의 헤카톰베’29이다. 바타유의 텍스트는 유신론과 종교를 분리하고자 하는 열렬한 충동에 경도되어, 신성을 샤먼의 불경에 되돌리러 서구의 지하 묘지로 내려간다. 그러나 무언가를 그냥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고, 지옥은 더 이상 무고한 지하 세계 따윈 못 되리라. 우리 귀에 들려오는 동화와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구렁텅이에는 지옥불이 활활 타오른다. ‘화염이 우리를 둘러쌌다. / 발밑에서 심연이 갈라졌다.’30 바타유는 불가능을, ‘부재에 자족하는 명상에서 끝나지 않는 심연’31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말한다. 불가능의 입술이란 불길에 재로 그슬린 지고한 주체성의 폐허니까. 바타유는 고한다. ‘이 세상에서 더 할 것이 없구나.’, ‘오로지 남은 것은 불사르는 것 뿐.’32 ‘나는 타버리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 죽음을 사랑하는 존재의 숨결처럼 들이마실 수 있을 만큼 죽음에 다가가지 못 하는 것이.’33 긴긴 시간 동안 대항해가 죄다 불타서 실패로 끝났던 것이 종교 박해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한 세기 너머 동안 보고 싶은 자는 다 봤으니. 일신론의 폐허에서 제원을 끌어오지 않는다면 저 멀리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죽음은 종교적 사건 — 위반, 영벌에 관한 실험, 일말의 무신론적 전쟁 — 이다. 그러나 신죽음이 대단한 범죄 활동은 아니다. 지옥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우리 시류에 아무 관심 없다. 죄악에 대한 반동적인 지껄임을 영벌로의 여정과 혼동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얄팍한 성격이다. 지옥조차 정의의 문제 아래 떨어지는 양, 사람이 지옥으로 유람을 갈 수 있다고 상상하는 단테의 오류가 그것이다. 우리들의 범죄는 파멸로 가는 길에 걸리적거리는 돌부리에 불과하다. 마치 모든 지상에 투영된 지옥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의 예시에 불과하듯. 위반은 범죄 행위가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이요, 경제를 통하여 계획된 종말과 시가 가진 종교적 반역사성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위반이란 불가능성의 불가피한 발생이다. 위반이 죽음과 같은 것은 아니나, 양자가 꼭 다른 것도 아니다.
죽음 ‘자체’에 대해 양가감정이 화답한다. 죽음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미궁적(labyrinthine)인 것으로, 불연속성에는 불가결한 구조가 풀어져 버리는 일에 해당하는 것이다. 허나 죽음은 내재성의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음이 일어날 가능성 자체를 전제할 개별성 자체가 죽음이 불가능한 한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연속성이란 것이 단 한 번도 실현된 적 없기 때문에 죽지만, 이는 아직껏 죽는 ‘인간’ 또한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34 대신에 제로, 내재성, 신성과의 상상치도 못할 소통(communication)이 존재한다. ‘허무의 감정보다 더 심하게 우리를 충일(充溢) 속에 내던지는 감정은 없다. 그러나 그 공허는 결코 소멸과는 다르다. 그것은 낙담한 태도의 초월, 위반이다.’35
기독교의 단순한 “진리” 문제는 — 기독교의 천문학이나 자연과학에 관한 것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신의 실존에 관한 것이든 아니면 기독교의 발생에 관한 전설의 역사성에 관한 것이든 간에 — 기독교 도덕의 가치문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 완전히 부차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36
만일 영원회귀가 믿음이 아니라면?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식은 모든 믿음, 즉 모든 ‘무엇인가를-참으로-간주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세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37) 바타유는 이렇게 말한다.
회귀는 순간에서 동기를 앗아가고, 목적에서 삶을 뿌리쳐내며, 이로써 즉각 삶을 처박는다. 회귀는 […] 이제 매 순간이 동기를 결하여 보이는 자의 사막이다.38
기독교 — 윤리적 ‘종교’의 전형 — ‘더딘 자살’39이요 방해물이 제로(zero)인 상태와 샤먼적 감응에 대한 표상(믿음), 그러나 니힐리즘적 회귀의 재촉발과 함께 모든 조심, 사려 분별, ‘도래할 시간에 대한 근심’40의 모든 전형이 우주적 ‘소음’의 무의미로 되돌아간다. 회귀와 함께 ‘시간에 걸친 나 자신의 지속이 아닌, 미래를 향한,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멸[인]’ ‘미래’41가 도래한다. 종교의 위기는 더를 미룰 순 없다.
니체가 자기 사상을 완성하던 시기에 영원 회귀는 무기나 ‘망치’, 진단과 개입 사이를 연결하는 요소로 여겨진다. 기독교가 쇠락에서 자기 보존을 수복하여 제로(zero)에의 크나큰 추락을 모면할 때, 영원회귀는 심연의 풍경을 다시 열어 보이고 정동을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간다. 이것이 바로 니체 텍스트에서 ‘선택’이 갖는 주된 의미이다. 보존을 위한 가치의 연쇄에서 혼미하게 제로를 추출해내는 것, ‘마치 기독교가 그러하듯 종교의 애매하고 비겁한 절충,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죽음과 자기 파괴를 장려하는 대신 모든 실패자와 병든 자를 보호하고 번식시키기까지 하는 교회’42를 꿰뚫는 것.
힘에의 의지 55번 단편에 정리된 유고가 이 병적인 사유 가닥을 드러내고 있다. ‘의미도 목표도 없는, 그렇지만 회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무에 이르는 피날레도 없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존’(상자), 이거나 ‘무(“무의미한” 것), 영원히.’43 회귀의 허무주의는 제로의 수렴성 감속과 죽음에 이르는 길로써의 범우주적 (비국지적) 가상성을 놓고 자신의 (기독교적) 역사적 의미에 대한 양가감정에 시달리고 있다. 기독교의 도덕은 ‘절망과 무로 뛰어드는 것으로부터 삶을 보호[했]’으므로’44 공격받아야 마땅하다.
도덕은 불리한 자들을 허무주의로부터 보호했다. 도덕은 복종, 겸손 등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도덕에 대한 믿음이 몰락한다고 가정하면, 불리한 자들은 자신들의 위로를 더는 받지 못하고, 몰락할 것이다.45
인간 종교의 역사는 병증의 기술에 기반하고 있다. 탈수, 기아, 신체 절단, 수면 부족 및 일반적인 ‘불리한 자들의 자기 파괴, 자기 해부, 독살, 도취.’46 기독교의 보존 도덕 — 일반화된 종적 비겁 — 이 사유화, 표상화한 모종의 여정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초월적인 팔루스 아래 처박히고, 얼려지고, 박해받고, 다른 곳으로 유배되었다. 기독교란 병자를 가두는 장치다. 그러나 회귀는 우리를 녹여 뚫는다.
‘불리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는 정치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특히 생리학적 의미에서[…]. (모든 신분 계급에서) 가장 건강하지 않은 종류의 인간이 이 허무주의의 토양이다. 그는 영원회귀에 대한 믿음을 저주로 느낄 것이다. 이 저주를 받으면 사람들은 어떤 행위도 주저하지 않는다. 소멸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소멸하는 것.’47
병증과 죽음을 원인과 결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건강의 징조이다. 그러나 이 둘의 사이에 존재하는 병적인 상호 연관관계는 아예 다르다. 질서정연한 표상의 계열중에 죽음이 병증을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병증이 죽음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버리는 것이다.
계보학은 병증을 역사적인 주제 따위로 환원하지 않는다. 병증 — 자극을 중단할 수 없다는 불능(不能) — 이 지속적 시간속에서 일어나는 미연한 사건의 전개 따위를 벗어나 에포케적 중지 속 시간의 소멸로 향하기 때문이다. 반응성이 더듬거리는 반사발작은 곧 건강이라는 극히 표면적인 것 기저에 널린 비시간적 지속이다. 죽음이란 ‘어떠한 역사도 갖지 않는 것’48이고, 니체의 방법론은 시필리스다. ‘오로지 종교만이 제 자신을 추동하는 물질을 파괴하는 소진/소모를 담보한다.’49
철학은 폐허에만 도사리는 구울에 불과한 것이요, 병증에 올리는 우리의 찬송가에서 꺽꺽대는 쉰 소리는 이제 막 울리기 시작했다. 흠칫 놀라대고 덜덜 떨어댄다는 불안 행동의 표면 하(下) 잔잔히 또 거침없이 흐르는 심한 탈진의 급류에서 태어나 지독한 고형으로 손가락은 발톱같이 되며 견딜 수 없을 만치 더디게 잔해로 가라앉아 불이 치솟는 구멍으로 떨어져 배배 뒤틀린 꼬챙이 신세가 된 검댕을 열병으로 팩 파인 두 눈으로 들이마셨노라. 영원회귀는 우리의 절멸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기가 엄마의 젖가슴을 쥐어 잡고 매달리듯 영원회귀를 쥐어 잡고 매달린다.
바타유는 랭보와 공명하는 단어로 이렇게 썼다. ‘시는 지(知)를 미지로 끌고 간다.’50 시란 곧 흐르는 적막, 유일하게 신성(=0)에 가닿은 글쓰기의 모험이다. 왜냐하면 ‘미지란 […] 말으로 지칭할 수 있는 것만 갖고서는 무와 구분할 수 없으므로.’51 불가능의 벼랑 끝을 써 내려간다는 것은 곧 사변체계를 위반하는 것,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유인하는 것이다. ‘시는 비도덕적이다.’52
랭보는 자라투스트라적 몰락/죽음[Untergang]의 반대편에서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랭보는 병자들의 니체라는 미궁처럼 꼬인 공간을 고대하고 있고, 니체가 강화하는 문화적 격동으로부터/때문에 뛰쳐나오는 것들을 고대하고 있다. ‘시인은 길고 막대하고도 원리적인 과정을 통해 모든 감각의 한계를 해제함으로써 선각자로 거듭난다.’53 그리고 이러한 한계의 해제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격통.’54 의 원천이라고, ‘격통은 그야말로 엄청나다’55고 랭보는 말한다. ‘미지에 가닿는 것’56에 적응한 생물은 없다. 미지에 가닿는 것은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한계 해제또한 불가피하게 만든다. 계통학적으로 예측된 바 없는 자극을 느끼면 우리 신경계는 끽끽 비명을 지른다. ‘체험은 깊은 충격을 주며 기억은 곪은 상처가 된다.’57 자연의 내장이 구불구불 용암으로 처박히는 지옥의 밤. ‘그것은 지옥이다, 영원한 불길이다.’ 랭보는 불타오른다. ‘더할 나위 없이.’58
그리어 시인은 선각자가 되어야만 한다. 동방 세계는 진정한 평정을 알고 있으나, 서방 세계의 계승자가 된다는 것은 개미 떼에 뜯기고 말은 의미에서 풀려난 채로, 망상의 이파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줄기가 훤한 폐허로 통하는 문을 열어줄 때까지 불규율(不規律)의 정글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한 번도 이해받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추한 명은 세기가 지나고 광증의 길이 뻗어나갈 수록 골이 깊어지기만 하는구나. 우리는 열대의 열병에 갉아 먹힌 몸을 이끌고, 영영무구한 무존재에의 몰락을 뚫고 수영해 나온다. 판을 깰 운명에 처한 채.
진정한 시는 흉물스럽다. 저열한 소통(communication)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변체계, 즉 자기가 한데 모으는 말을 고립하고 구분하는 것을 전제하는 거짓 소통과는 반대된다. 소통이란 — 바타유가 부여하는 위반적인 비(非)-의미(non-sense)에선 — 엄청난 위기이며, 역겨운 정동과 관련 있는바, 가늠할 수 없는 모멸이다. 자아란 곧 소통의 내재성을, 두텁고도 불경한 무리를 뛰쳐나와 형성하는 것으로, 고립된 존재라는 사막화의 씁쓸한 진실로 귀결하는 역사에 시동을 건다. 자아에게는 소멸로 느껴지기만 하는, 저열한 접촉에서 풍기는 불안에 자아는 자율성이라는 권태, 끔찍한 절망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자빠진다. 탈출이 힘을 다하는 곳에서 생겨나는 곳, 자아가 외부 세계에서 일어나는 불행한 일로부터 은둔하는 곳이 바로 권태이므로 그 공포는 배가된다. 권태는 자아가 외부로부터 고립됨에 대해 화답하는 것도 아니고, 불순(不純)도 오염도 아니고 (상기한 것들을 부정하는 것은 자아에게는 실존의 조건이다) 다만 완성된 존재의 진리 자체, 개인성의 핵심 정동이다. 권태는 억누를 수도, 초월할 수도, 해소할 수도, 부정(aufgehoben)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몸부림이란 권태와 몸부림을 증류하여 더 순순하게 만든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권태는 ‘제 자신을 버리고 떠나갈 필요’59의 형태로 기획(project)의 구조에 스며든다. 바타유가 쓴 저작이 서 있는 토양이 화산암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궤멸적 백열(白熱)의 산발적 격동 때문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단종(斷種)이 다산을 예고하기 때문인 것이다. 무성한 망상의 정글 아래, 초입에는 장대하고도 참담한 절망의 잿밭이 널려 있다. ‘나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지옥에 있다.’60 의미는 바뀌었을지만서도 블레이크가 했을법 한 말이다. 이 말이 랭보의 펜에서 뚝뚝 흘러내렸기에 상상력보다는 완전한 인식론적 무책임으로 나아가는 정당화라는 지질학적 위기를 가리키고 있다. 진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들의 역할이 아니다. 진리란 도인들이 명하는 것이니까. 중요한 것은 적응하는 것, 우리의 반응성이라는 빈약한 자원을, 우리의 저열한 간능(幹能)을 도야하는 것이다. ‘믿음’ — 곧 고해의 망토인 것 — 믿음이란 관념론의 발악에 소모하기에는 너무나도 귀중한 재원이다. 신실한 신념, 지푸라기라도 부여잡으려는 신념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런 것은 강자(아님 꺼벙이), 우방, 빛의 노예, 파놉티콘 장치를 피하고자 신념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지하도를 걷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가. 영적 헌신은 적응성을 무디게 만든다.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이미 수도 없이 봤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얼어붙은 토끼들. 열등한 신념 주변을 빙 두르고 선 것이 왕족이 아닌 탐구를 막아내는 차양에 불과할 때. 우리, 그림자의 생물인 우리들은 이 자들의 계몽주의를 피해 숨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믿으리.
열등한 민족이 ‘게걸스럽게 신을 기다린다.’61 ‘이리 떼가 죽이지 못한 짐승을 놓고 그러듯’62 그리스도를 뜯어먹으며. 창조, 신약에 나와 있는 계보, 그리스도의 수난… 이 중 어떤 것도 다른 무엇도 열등한 민족의 서사는 못 된다. 열등한 민족은 자기만의 서사를 갖기에는 너무나도 나태하기 때문이다. 이 자들에겐 도둑질과 거짓말, ‘약탈’만이 ‘어울린다.’63 랭보가 물려받은 것은 ‘특히 거짓과 게으름’이다. 랭보는 말한다. ‘나는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나는 체형(體刑)을 받으면서 노래하는 종속이다.’64 기독교, 신의, 의무, 신에게 특권을 선사받았다는 서사를 망각하는 것, 오로지 이것들만이 열등 민족이 나사렛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다독여 준다. 백인들은 총을 갖고 있다. 고로 진리도 갖고 있다. “백인들이 상륙한다. 대포! 세례(洗禮)를 받고, 옷을 입고, 일해야 한다.’65
상위에서 내려오는 (채찍질처럼 떨어지는) 교조주의자들의 젠체하는 선포, 그 반대편에 놓인 지옥의 전갈은 지저(地底)의 것이며, 말의 지하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니라. ‘지옥은 확실히 아래에 있[는]’ 것이니까. 저승이 숨겨진 세계가 — 진짜 세계나 참된 세계가 [Wahre Welt] — 아니라, 온 세상으로 가려진 세계이듯, 지옥 밑바닥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리는 소리는 뒤집힌 광경, 개념, 신념과는 한참 다르다. 그 지옥 같은 윤곽에는 상아탑이 아니라 잃어버린 미궁으로 이끌고 미궁을 꿰뚫는 길이 존재한다. 지옥에서는 수득이 불가능하니라.
시란 신념 사이를 으스대며 걸어대는 것이 아니다. 시란 틈 사이로 스며드는 것, 병충 사이에서 다시 태어난 용암류다. 위대한 사상이란 것들에 지하, 균열, 액포66가 없었던들 시가 이것들을 감염시킬 일도 없었으리라. 신앙은 떠올랐다 저물어 가는데, 쥐새끼들은 골목을 들쑤시는구나.
랭보의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흉과 탈로 가득한 채 담화 속에 맥동한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아니하고 병을 옮긴다. 역병을 일으키는 ‘열병의 확산’67으로 가득 찬 물질처럼, 전염병의 진로가 떼를 이루는 곳으로 침몰한다. 실체란 병의 숙주일 뿐. ‘말이든, 책이든, 비석, 상징, 웃음이든 열병의 확산로, 역병의 길목에 불과할 뿐.’68
나는 아무것도 결론지을 수 없었다…
그것은 제로의 일.
그곳으로 나는 가련다.
내 마음과 손을 믿고.
열린 바다로 무작정
내 제노바의 배는 향한다.69
모든 것이 새롭게 빛난다.
시간과 공간 위에 잠들어 있는 정오.
오직 그대의 눈만이 두렵게
나를 응시하는구나, 영원이여!70
- 호세아 8:7 (개역개정)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 영미권에서 해당 구절은 인과응보에 대한 격언으로 여겨진다. (역주)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12 Vols. (Paris : Gallimard, 1970-1988), vol. II, 246.
- APOLOGETIC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변론(apologia)과 어원상 같은 단어로, 영어에서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사과조 말투를 의미한다. - UNKNOWING
넓은 의미에서는 회의주의적 태도, 좁은 의미에서는 바타유의 ‘non-savoir’에 해당한다. 스튜어트 캔달은 ‘non-knowledge’라고 번역했다. -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1, 백종현 역, (아카넷, 2006), A판 머리말, 166.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이진우 역, (휴머니스트, 2023), §569.
- BECOMING
-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곽민석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 85.
-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133.
-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136.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I, 179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558.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562.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567.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I, 220.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I, 97.
-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1821~1967)의 시 「여행(Le Voyage)」을 가리키는 듯 하다. (역주)
-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안성찬 · 홍사현 역, (책세상, 2005), 343.
- CHANCE
바타유의 용어로 1945년에 출판된 책의 제목 「니체에 대하여: 운(chance)에의 의지」에도 나타나 있다. 영어와 프랑스에서는 ‘chance’가 기회와 운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아래 ‘기회’나 ‘운’으로 번역된 단어는 본래 불어와 영어 모두에서 ‘chance’로 동일하다.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I, 116.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I, 29.
-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88.
- 기독교는 로마 제국 하층민 사이에서 선제적으로 포교되었다. (역주)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21.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52.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15.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I, 203.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59. (인용문 확인 불가능)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220.
- 조르주 바타유, 아르캉젤리크, 권지현 역, (미행, 2020), 45.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99.
이 인용문은 동사 ‘abîmer’의 과거분사형 ‘abîmé’를 명사 ‘abîme’로 보고 옮긴 랜드딴의 오역이다. 스튜어트 캔달은 알맞게 옮기고 있다. ‘부재에 대한 충만한 명상 속으로 끝없이 빠져들어.’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IV, 17.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246.
- 바타유 본인께서는 이렇게 말하신 적 있다. ‘의식은 완결된 죽음의 조건이다. 내가 죽는 것은 죽는다는 의식을 지님으로써이다. 그러나 죽음이 의식을 앗아가 버림으로 인해, 나는 죽는다는 의식을 갖지만 또한 동시에 죽음은 내게서 이 의식을 앗아가 버린다.’ 조르주 바타유, 죄인/할렐루야, 신용호 역, (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22), II. (역주)
- 조르주 바타유, 에로티즘, 조한경 역, (민음사, 2009), 78.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251.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15.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I, 23.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247.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I, 50, 167.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I, 29.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247.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55. (번역 수정)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55.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55.
-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에의 의지, §55.
- 랜드가 해당 문장의 일부만 인용하였으므로 이진우 씨의 번역 또한 수정하였다. 랜드가 사용한 펭귄판 Kaufmann 역본의 원문은 이렇다. ‘[…] not to be extinguished passively but to extinguish everything that is so aim- and meaning-less.’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역, (아카넷, 2021), 두 번째 논문, 13
- 조르주 바타유, 종교 이론, 조한경 역, (문예출판사, 2015), 69. (번역 수정)
조한경 씨께서는 대명사 ‘elle’을 ‘인간’으로 해석했는데(‘종교만이 인간의 실체를 소진시키고 파괴시킨다.’), 인간이 아니라 해당 문장의 주어 religion과 등가이다.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57.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33.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212. (인용문 확인 불가능)
- A. Rimbaud, Collected Poems, tr. O. Beranrd (Harondsworth : Penguin, 1986), 10.
- A. Rimbaud, Collected Poems, 11.
- A. Rimbaud, Collected Poems, 6.
- A. Rimbaud, Collected Poems, 6.
-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이상엽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6), 19.
-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73.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37.
-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73.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김현 역 (민음사, 1995), 32.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26.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26.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40.
-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44.
- 액포(vacuole)는 세포대사에서 생성된 독성 물질을 격리하고 외부 생명체로부터 조직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세포소기관이다. (역주)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11.
- 조르주 바타유, Oeuvres Complètes, vol. V, 111.
- 콜럼버스의 출생지인 제노바에 대한 인유이다. 니체는 실스마리아에서 보낸 여름을 제하고 1881년 대부분, 또 1882년과1883년에 겨울부터 초봄까지를 제노바에서 보냈다. 즐거운 학문 §124, §283, §289, §291, §343, §377 참고. (역주)
-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부록, 포겔프라이 왕자의 노래 — 새로운 바다로,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