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유물론자들은 모든 정신적 실체를 제거해버리고자 하였으나, 위계적 상관관계가 딱 관념론에 대응하는 사물의 질서를 묘사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유물론자들은 다양한 개념으로 이루어진 상투적 위계질서의 정점에 사(死)한 물질을 올려놓고 만 것이다. 그렇게 물질의 관념적인 형태, 그 무엇보다 물질의 당위에 가까운 형태에 대한 집착에 빠져버렸다는 사실은 이해하지도 못한 채. 사(死)한 물질, 순수 관념, 신, 사실상 이것들은 죄다 관념론 철학자들만이 제기하는 ‘사물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정확하게는 ‘사물이 통하여서 가지적으로 변하게 되는 관념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교실에 앉아있는 고분고분한 학생들과 완전히 판박인 태도로 진부한 대답을 한다. 고전 유물론자들은 당위를 인과로 (‘quamobrem’을 ‘quare’로, 즉 운명을 결정론으로, 미래를 과거로) 바꿔치지도 않았다. 유물론자들이 부지불식간에 학문의 관념에 부여했던 기능적 역할하에 외부 권위에 대한 유물론자들의 요구가 온갖 견지에 당위를 덧씌워놨다. 유물론자들이 정의한 사물의 원리가 학문이 확고해 보이는 입장을 점하도록 허하는 정적인 요소, 참되고 신성한 영원성이라면, 우연에 선택의 여지를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대거 유물론자들에게 사(死)한 물질이 학문의 관념에 순응하는 것이란 앞서 신과 피조물 사이에 수립된 종교적 관계를 바꿔친 것이고, 서로서로 관념 노릇이나 하는 것이다.
유물론은 작위적 예외에 불과한 물리 현상 따위 추상에 순응하고 심리학적, 사회학적 사실 바로 위에 기반하지 않는 한 얼빠진 관념론으로 간주될 것이다. 따라서 다른 이들보단 – 먼 옛날에 죽었고 오늘날 자기 견해가 어떤 의의도 갖지 못하는 자연학자들이 아니라 – 프로이트에서 물질의 상(像)을 끌어와야만 한다. 심리학적 복잡성이 불러오는 공포(지적 무능의 증거에 불과한 공포)가 유유부단한 영혼들이 이러한 태도에서 정신적인 가치로의 회귀나 쥐구멍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유물론이란 말이 사용되는 지금, 발가벗은(brut) 현상에 대해 종교적 관계의 상징하에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 분석의 파편적인 요소에 기반한 체계가 아니라 모든 관념론을 배격하는 직접적인 해석을 만들어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