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성, 즉 규정의 완전성
헤겔
I. 존재의 불완전성
인간은 존재하기 위하여 행동한다. 이는 보존(죽음으로 인하여 존재 바깥으로 내던져지지 않기 위해 제 스스로를 간수하는 것)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손에 닿지 않는 만족을 향한 비극적이고 끝없는 투쟁이라는 긍정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리멸렬한 몸부림부터 내리누르는 졸음까지, 수다질부터 자기 자신을 향하여 뒷걸음질치는 행위까지, 가슴을 어지럽히는 사랑부터 딱딱하게 굳어가는 증오까지, 실존은 때로는 영락하고 때로는 ‘존재’를 이룩한다. 아울러 사태가 중한 정도가 다 다를 뿐 아니라 다른 존재들이 들쑥날쑥 ‘존재한다’. 쏘달리고 컹컹대는 개는 어디 달라붙은 벙어리 스펀지보다 더 ‘존재하고’, 스폰지는 제 자신이 잠겨 사는 물보다 더 ‘존재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은 허망한 행인보다 더 ‘존재한다’.
주인이 소유한 힘이 노예를 주인의 자비 아래 종속시키는 일차적 운동에서, 주인은 노예에게서 존재의 일부분을 박탈해 간다. 그 대가로 한참 뒤에 주인의 ‘실존’은 삶의 물질적 요소에서 소외되므로 빈곤한 것이 되어버린다. 노예는 무력함 때문으로 노동에 갇히게 되나, 노동을 통하여 물질적 요소를 종속시킴으로써 제 존재를 드높인다.
인간 존재의 장황한 전개 속에서, 상호 모순되는 격하 운동과 승격 운동은 넋 나갈 복잡성에 다다른다. 노예와 주인으로 양분된 인간의 근본적 분리란 시발점에 불과하고, 개인의 ‘실존’이 알맹이를 비워내는 특수기능의 세계로 가는 입구일 뿐이다. 인간은 존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으며, 인간의 삶은 자신을 초월하는 창조와 파괴의 유희에 떠맡겨져, 실재성을 결여한 격하한 쪼가리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지〔知〕를 기능으로 간주한다는 점만으로 철학자는 옹졸한 무〔無〕일관성의 세계로, 생명이 다 빠져나간 기관(organes)들이나 해부해야 하는 위치로 내팽개쳐진다.1 변화무쌍한 생〔生〕이라는 기묘한 심천〔深川〕에 행위를 메아리치는 꿈에서 저멀리 유리되어 버린 만큼 행위로부터 저멀리 유리된 철학자는, 저이가 불안정한 이해 대상으로 선택한 ‘존재’조차 헤메이게 만들었도다. 존재는 한계를 모르는 생의 요란스러운 몸부림을 불려간다. ‘존재’인 동시에 지〔知〕인 것이 지로 환원하여 제가 제 사지를 자를 때, 존재는 쇠퇴하고, 쇠락한다.
지〔知〕의 대상이 존재 일반이 아니라 기관, 수학 문제, 법적 절차같이 협소한 전문분과에 불과하다면, 불완전성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행위와 꿈은 (행위와 꿈이 존재의 총체성과 혼동될 때마다) 이 전문분과들의 비참한 신세를 면치 못하매 대개 인생이라는 부조화 속에서 끝이 없는 불완전성이 제 얼굴을 드리운다. 존재는 나팔수의 기쁨이나 향촌 의자장이의 실소로 끝나고, 이루는 것이 있기는커녕 하찮은 부패작용이 되어버린다. 존재의 추락은 마룻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왕의 몰락에 비견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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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人生〕의 근간에는 불완전성의 법칙이 존재한다. 인간이라면 혼자 있을 적에는 다른 이들이 ‘존재’를 이룰 수도 없고 이룰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법이다. 모든 방담, 험담의 주제는 우릴 빼닮은 덧없음, 공허이다. 뻔히 턱 멈추어버린 대화는 설명할 수 없는 정점을 향한, 휘황찬란하고도 덧없는, 생〔生〕의 도망을 나타내노라.
각개 존재의 완전성은 저마다 쉼 없이 각개 타자의 반대에 부딪힌다. 내게 사랑과 동경을 표해오는 시선조차도 나의 실체를 어루만져오는 의문으로 다가온다. 깊고 깊은 불완전성이 내 모든 몸짓, 모든 말, 모든 허물에서 스며 흘러나오고 폭소와 혐오가 내 행동을 맞이한다. 느닷없는 내 죽음을, 완전한 허물을, 무를 수 없는 허물을 흐느낌이 맞아주듯.
너나 할 것 없는 이 불안은 점점 불어나고, 굽이 굽이마다 구역질을 일으키며 ‘인간은 나신의 밤에서 자신의 고독을 찾아낸다’고 메아리친다. 만물이 자리한 — 그런가 하면 또 만물이 이내 제 자신을 잃어버리는 — 대계〔大界〕의 밤은, 인간의 본질이 암야에서 솟아올라 비극적인 중대성을 선사하지 않는다면, 존재의 무〔無〕나 매한가지로 무〔無〕를 위한 존재, 타에 미치지 못하는 존재로 보이리라. 하나 이 기막힌 밤은, 인간이 밤 속에서 우스운 궁지에 갇힌 제 운명을 발견할 때마다, 음정이 맞지 않아 추하기 그지없는 나팔 소리를 닮은 제 운명을 찾아낼 때마다 ‘존재’와 의미를 비워내기에 이른다. 세상 속에 ‘존재’가 있으라 내게 주문하고 드는 것, 곧 비인간적 자연과 인간적 자연에 역력한 불완전성 따위가 아니라 ‘존재’가 있으라 내게 주문하고 드는 것이, 언젠가는 필연 인간의 잡소리에 회답하야 우주를 가로질러 신적인 완전성을 투사하리. 마치 반향처럼, 비굴한 노예가 된 존재의 병마처럼 불완전성을 투사하리.
II. 존재의 복합 성질과 자성(IPSE)에 존재를 고정한다는 것의 불가능성
세상 속에 있는 존재란 것은 참으로 불확실하여 내가 원하는 곳(아〔我〕 바깥)에도 투영할 수 있다. 미련한 인간, 자연의 난국을 면할 수조차 없는 인간은 존재를 ‘아〔我〕’에 가둔다. 하나 과연 존재는 어디에도 있지 아니하며, 장난으로 광대한 양의 단순 물질을 갖고서 구성체의 일부를 이루는 존재를 형성하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존재를 갖다 놓고 거룩하다 불렀던 일도 장난의 낙승이었을 뿐이라.
전자〔電子〕 — 이 단순 요소가 자성(ipséité)을 결하지 않았더라면 존재는 전자에 한정할 수도 있었으리라. 원자는 자립적으로(ipséellement) 판단하기에는 복잡도가 지나치게 단순하다.2 존재를 구성하는 입자들은 적이 빡빡하면서도 적이 또렷한 모냥으로 제 자성의 조성에 끼어든다. 만일 칼을 갖다가 날과 손잡이를 끝없이 바꿔대면 그 칼의 자성은 그림자만 남게 된다고 할 수 있을 텐데, 한때 새것을 이루고 있던 수많은 구성요소들이 오육 년이 지나 하나하나 고장나서 대체된 기계의 경우에는 그렇지 아니하다. 그러나 기계를 통해서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자성이란 여전히 그림자와 같을 뿐이어라.
복잡성의 극단에 이른 존재는 찰나적 겉모습의 불완전성보다 더한 것들을 사유에 뒤집어씌운다. 그러나 이 복잡성은 점점 더 꼬이고 꼬여가며, 출현물이 괴상야릇하게도 길을 잃어버리는 미궁으로 변해버린다.
가루로 찧어져 세포 더미, 즉 생동하는 수많은 고립 존재로 이루어진 더미가 되어버린 스펀지는 또다시 새로운 스펀지를 이루고, 그 속에서 제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관해파리 조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이고 그 조각이 엉겨 붙은 관해파리 전체로써도 일체성을 이룬 존재에 거의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생동하는 개체의 존재 양상이 단일체에 메어져 집합체를 이루는 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선형동물(즉 지렁이, 곤충, 생선, 파충류, 새, 포유류)에 이르러서야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비선형 동물의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데 반해, 고등 동물은 제 집합체가 육체적 결합을 일으키는 바 없이 응집한다. 비버나 개미처럼 인간도 독립적 조직체를 갖는 개별 사회를 형성한다. 한데 이 독립성이란 존재의 기준에서 따지고 들면 말단의 흔적이거나 단순한 오류일 뿐인가?
인간과 연한 모든 존재는 언어와 각별히 연결되어 있고, 언어는 말을 통하여 발생 양태를 각 사람 내부에 고정한다. 각 사람이 자신의 총체적 존재를 표상한다는 것은 오로지 말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이는 각 사람이 제 눈으로 직접 보더라도 똑같다. 말은 수많은 인간적 존재와 초〔超〕인간적 존재로 들어찬 사람의 머릿속에서 솟아 나오는데, 이것과 연하여서 인간의 사적 존재가 존재하는 것이다. 고로 존재란 말로 매개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독립적 존재’라고 자의적으로 칭할 수밖에 없는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연한 존재’이다. 조금만 흔적을 따라 반복되는 말의 행로를 좇으면 혼란한 광경 속에 인간 존재라는 미궁의 구조가 드러난다. 사람이 제 아웃을 안다고 하듯, 속칭 지〔知〕3라고 부르는 것은 단 일순간에 구성된 존재에 불과하다(모든 존재란 곧 구성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 즉 원자는 다양한 전자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지〔知〕란 일순간 동안 두 존재 사이에다 부분만큼이나 실재적인 합을 만들어내는 일을 한다. 대화 속에서 미사여구가 제한된 수로, 하물며 상투적인 투로 오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두 존재 영역의 병치라는 엉터리 해석이 생겨난 이유다. 삶과 죽음이 정반대되듯, 이 짧디짧은 왕래 끝에 사람이 제 이웃을 안다고 지각한다는 사실은 길거리에서 아는 채 않고 지나치는 경우나,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다른 수많은 존재에 대한 무지와 정반대된다. 인간 존재의 지란 불안정한 생물학적 연결로 나타나나, 그것은 조직 속 세포들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연결만큼이나 실재적인 것이다. 과연 두 인간 입자 사이에 일어나는 교환은 일시적 분리를 겪고도 살아남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간은 불안정하고도 복잡하게 얽힌 전체에 삽입된 입자일 뿐이다. 옷깃을 스친다고 하듯, 개인의 삶 속에서 이 전체는 수많은 가능성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입자의 존재는 구성체와 결코 유리될 수 없으며, 구성체는 일시적 존재로 이루어진 회오리 한가운데에 입자를 놓고 어지럽힌다. 제 스스로를 향해 뒷걸음질치는 고립된 존재라는 이 덧없으면서도 안락한 환상, 이것은 연결의 불안정성으로 인한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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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한 평이한 문체로 쓰자면, 외따로 떼어놓을 수 있는 우주의 모든 요소란 항상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전체 속에서 구성체를 이룰 수 있는 입자로 나타난다. 존재란 상대적 독립성만이 남아있는 입자로 이루어진 합에 불과하다. 이 두 가지 법칙이 모든 것을 끊임없이 문제에 부치는 도정을 통하여 자립적 존재의 불안정한 존재 상태(présence)를 지배한다. 대계의 유희에서 예측불능한 운〔運〕의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극에 달하는 불안을 안고, 전체성의 주문〔注文〕으로, 절대적으로 화〔化〕하는, 제 자신을 구성하는 운동에 혼미할 정도로 경도된, 총체를 자처하는 자립적 존재란 광대한 무한성에 이르는 시련이고, 제 불완전성의 맹위〔猛威〕를 비집고 빠져나오는 시련이요, 길 잃은 망령에 고유한 운〔運〕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비극적인 부정이라. 하나 인간은 굴곡마다 동류에 대한 지로 곤두박질치매, 이 지가 인간의 본질을 거두어들이고는, 세상의 완전한 암야 속에서 인간이 쥔 독립성의 맹렬한 광증을 초월하는 합을 구성하는 부분 따위로 환원한다.
체념과 피할 수 없는 권태, — ‘존재’란 번뇌할 정도로 욕망하지만서도 견딜 수 없는 것이므로 — 이것이 인간 존재를 인생의 발로와 미사여구를 교환할 수 있는 수많은 ‘지〔知〕와 지인〔知人〕들’이 만들어낸 안개 같은 미궁 속으로 내던진다. 하나 이렇게 도망쳐 — 자립적이며 암야 깊숙히 고립된 — ‘존재’의 번뇌를 벗어날 적에, 자기 안에 있을 적에도 견딜 수 없었던 눈부신 섬광을 자기 바깥에서 찾아낼 수 없다면 인간은 다시 불완전성 속으로 내던져지고, 눈부신 섬광의 맹렬함이 없다면 인간의 생이란 어렴풋이 치욕이 느껴지기만 하는 빈곤에 불과하도다.
III. 미궁의 구조
불가해한 공허 속에서 두 유령 (하나는 수염으로 덮여 있고, 다른 하나는 둥글게 땋은 머리를 하고서는 다른 하나보다 상냥하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위성의 모습을 하고 존재의 유희 속으로 솟아오른 작디작은 인간 존재는 처음으로 자신을 초월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속에서 완전성의 환영을 보았음이라. 인간이라는 입자가 속해 있는 복잡하고도 얽히고설킨 전체 속에서 이러한 위성적 존재 양상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개체란 정해진 형태도 없고 구조도 없는 전체 속에 있는 하나의 요소(보잘것없는 ‘지인〔知人〕’들과 수다질로 이루어진 세상의 한 부분)이자, 핵 주위 궤도를 도는 주변 요소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이 궤도에서 존재는 굳어간다. 길을 잃고 헤매던 아이가 자신을 돌봐주는 전능한 자족적 존재에서 발견했던 것을, 버림받은 인간은 장대한 무질서 속에서 매듭과 응집이 형성되는 모든 곳에서 찾아낸다. 각개 존재는 무리 중심에 위치한 집단에 ‘존재’의 본질적 총체성을 실현하는 사명을 위임한다. 인간은 전체 존재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자족하고, 전체 존재는 그 형태가 소박할 적에도 참으로 너저분한 특성을 갖는다. 이처럼 상대적 안정성을 띤 합들이 형성하는데, 그 중심은 도시이고 초기 형태는 왕과 신이라는 두 암술을 둘러싸는 화관을 닮았다. 여러 개의 도시가 단 한 도시의 이익을 위해 중추의 기능을 포기하는 경우, 왕과 신이 집결한 수도를 중심으로 영토가 형성된다. 따라서 중심을 둘러싼 중력이 주변 도시들의 존재를 몰락시키고, 그 중심에서 존재의 총체성을 이루던 기관들(organes)은 퇴화한다. 구성 운동은 점점 더 복잡성을 더해가며 인간 종을 보편성의 수준으로 점점 끌어 올리지만, 그 극치에서 보편성은 오히려 모든 존재를 산산이 조각내고 폭력으로 해체하는 모양이로다. 대계의 신께서는 망령을 섬기는 인간 집성체를 용인하느니 차라리 불사르시라. 신은 송장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망상이 상흔으로 뒤덮인 송장을 두고 숭배해야만 할 대상이라고 하던들, 신께서 화〔化〕하신 보편전체가 존재의 몰락을 막으려고 들 때 자성이라는 금 간 벽조차도 세울 수 없는 것이던들.
IV. 존재 구성과 해체의 양태
더 화려하고 더 매력적인 타자〔他者〕를 위해 조금씩 제 생을 비워나가는 도시는 구성에 몰두하는 존재 유희의 상이다. 구성의 인력으로 말미암아 구성체는 개별 요소에서 대개의 존재를 비워내어 중심, 즉 구성체를 이롭게 한다. 여기에 일정 영역에서 한 중심의 인력이 인접한 중심의 인력보다 강하다면 후자의 중심은 몰락한다는 사실도 덧붙여야겠다. 이렇듯 인간 세계를 아우르는 강력한 인력극의 작용은 각개의 저항 강도에 따라 수많은 개인의 존재를 텅 빈 그림자 처지로 떨어뜨리며, 더구나 인간들이 종속된 인력극이 더 강력한 인력극의 영향으로 인해 몰락할 때는 더 그렇다.
고로 다소간 자립성을 띄고 단절된 활동 양태에 대해 인력의 흐름이 미치는 효과를 생각해 본다면 이러하다. 한 도시에서 생겨난 유행이 그때까지 잘 착용하던 옷의 가치를 박탈하고, 그 결과로 이 도시의 영향권 아래 그 옷을 입던 사람들의 가치도 박탈한다. 인접권에서 더 화려한 도시의 유행이 첫 번째 도시를 유행에 뒤떨어진 곳으로 격하하는 경우 박탈 효과는 더 크다. 이런 상관관계가 가진 객관성은 중심지의 멸시와 조소가 타지에서 전혀 벌충이 되지 않고 대단한 유혹으로 바뀌어버릴 적에야말로 비로소 현실화한다. ‘유행을 따라가기 위한’ 주변부의 노력은 주변부에 존재하는 입자들이 자립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웃음은 이러한 존재의 가치 판단에 끼어들어 인간세계를 아우르는 인력의 운동이 그리고 있는 행로를 드러낸다. 웃음은 돌연히 수준 차이가 생겨날 때마다 나타나 존재들의 공허한 합을 어처구니없는 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일종의 번득이는 환희 — 돌연하고 눈부신 존재 현현의 계시 — 가 경이로운 외양이 제 부재에, 인간의 공허에 반하여 나타날 적마다 터져 나온다. 웃음은 생〔生〕의 공허에 죽음을 불러오는 난폭한 힘으로 가득 찬 시선을 던져넣는다.
하나 웃음은 기묘한 격동 속에 조립되는 구성체에 지나는 것이 아니고, 전체 합을 가로질러 기능하다가도 때로 구성 자체를 문제에 부칠 정도로 사나운 맹렬함을 업고 곧잘 전체 합을 보잘것없이 해체해 버린다. 웃음은 주변부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은 백치와 아이(텅 비어있는 자들)의 존재에 한하지 아니하매, 아버지와 중심이 차례차례 당인들의 불완전성을 보여줄 때마다, 저이들을 중심으로 싸고도는 입자들의 불완전성에 비견할 때마다, 여지없는 전복을 통하야 아이에서 아버지에게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되쏘아진다. 이러한 중심부의 불완전성은 으레 의례를 통하여서도 드러난다(사투르날리아나 당나귀 축제(fête de l’âne)로 드러나고 또 아버지가 유치하게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아이를 놀아주는 모습으로 드러나듯). 불완전성이란 피로〔疲勞〕로 말미암아 권력의 덧없는 본성이 드러나게 하여 권력을 몰락시키고 무너뜨릴 때마다 아이와 ‘추레한 자’의 행동으로도 드러나는 것이다. 이 두 경우 모두 지배적인 욕구가 드러나고 존재의 심오한 본질이 드러난다. 존재는 절대 총체성의 무시무시한 위대함을 이룰 수도, 위대함에 이를 수도 있지만, 그 완성이란 더욱더 강력하게 존재를 공허한 암야로 던져버릴 뿐이다. 주변적 존재의 상대적 불완전성은 총체적 존재의 절대적 불완전성이다. 웃음은 이성적 존재보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전방향으로 되퍼져나가는 파동의 그물망처럼 인간이라는 피라미드를 관통한다. 울려 퍼지는 이 격동이 어둑어둑한 암야 속에서 머리 끝까지 신의 고통으로 수놓인 무수한 인간 존재들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죄여온다.
V. 미궁의 암야 그 한가운데서 사는 괴물
존재는 비극적인 소멸 속에서 눈부신 섬광에 이른다. 존재를 속박하던 사슬을 끄르는 추락 속에 죽음의 표상이 추잡스레 다시 취해질 적에야말로 웃음이 존재에 극강의 위력을 미친다. 존재의 번득이는 섬광은 원소의 결합에 불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죽음의 형상을 입은 해체요 부패일지다. 진부한 웃음을 일으키는 — 헛된 삶의 결핍과 이룩한 존재의 완전함을 견주는 — 수준의 차이는, 고양의 정점에 온 존재를 감추는 어둑한 심연을 대치시키는 차〔差〕로 환치할 수 있으리. 그리고 이렇게 웃음이 존재의 총체성에 감싸안기라. 존재 자체는 속죄양이라는 치사스러운 간교를 뿌리치매, 밤의 가장자리를 누비는 존재 합 자체로서, 발아래 땅이 꺼지리라는 생각에 경련하며 요동친다. 총체성 속에서 고독으로 말미암아 전쟁으로 죽음과 맞설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고, 이제 동등한 합이 아니라 무〔無〕와 씨름해야만 할 필연성이 얼굴을 드리운다. 총체는 황소를 닮아, 어떤 때는 동물성이라는 무사태평함으로 침참하여 죽음의 은밀한 창백처럼 버려진 듯하고, 다른 때는 깡마른 투우사가 얼없이 제 앞에 펼쳐 보이는 공허로 곤두박질치는 분노에 잠기는 듯하다. 하나 총체가 마주하는 공허란 곧 나신이고 공허가 곧 — 아주 경박하게 뭇 죄악을 끌어안는 — 괴물일 적에 제 아내로 맞이하매, 총체가 더는 황소와 같이 무의 노리개이지 아니하고, 이유인즉 무 자체가 총체의 놀잇감이기 때문이라. 총체가 공허로 — 이 무가 발아래 완전히 뚫리지 않았던즉 영원히 다다르지 못하였을 공허로 — 몸을 던지는 것, 이것은 공허를 찢어발기고 한순간 광막한 웃음으로 밤을 밝히기 위함이도다.
- 고로 지〔知〕, 앎을 일종의 기능으로 간주하는 철학자는 시체를 난도질해서 생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덧없는(vain) 짓을 하는 사람이다. 바타유는 이 문장에서 프랑스어 어휘 ‘organe’의 이중적 의미로 언어유희를 시도하고 있다. 첫째, Organe, Organum, Organon은 지적 탐구를 위한 기능(fonction)을 지닌 기관이자 도구이고 도구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Organon)이나 베이컨의 신기관(Novum organum)이 그 예시이다. 둘째, 따라서 철학자들의 기관은 생명력 없는 죽은 신체기관, 난도질당한 내장(organe)일 뿐이다. (역주)
- 폴 랑주뱅(Paul Langevin), La notion de corpuscule et d’atomes, Hermann, 1934, p. 35.
- 여기서 바타유는 불어 단어의 이중적 의미를 활용하고 있다. 지(知, connaissance)란 철학자들의 인식 방법인 지식이기도 하지만 일면식하는 것, 아는 채를 하는 것(faire connaissance)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의미를 풀어 쓰면 ‘지〔知〕와 지인〔知人〕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