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을 입법하기 위해 용감히 군주정의 속박을 벗어던지는 국가, 이미 오래전에 낡아 헤진 부패 국가, 이 국가는 부지기수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서야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화정이란 이미 뭇 범죄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일 공화정이 범죄에서 덕치로 나아가고자 한더라면, 즉 폭력 국가에서 인권 국가로 나아가고자 한더라면, 공화정은 곧 나태와 태만의 상태에 떨어지겠고 그 결과는 곧 확정 파멸이리라.
사드
언젠가는 정치의 가면을 쓰고 정치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사실은 종교 운동이었음이 드러나리라.
키에르케고르
오늘날 외톨이인 너, 홀로 사는 너, 너 언젠가는 공동체가 되리라. 스스로를 택한 자들이 언젠가는 선택받은 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리라. 그리고 이 공동체에서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날 것이다.
니체
우리가 착수한 일을 타와 혼동하지 말지어다. 생각의 표출에 한정할 수 없을지어다. 하물며 적확히 예술로 간주되는 것들이 있다만 여기에도 한정할 수 없을지어다.
생산도 섭취도 필수적이다. 부지기수의 사물이 다 필수적이다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물며 정치 동란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누가 끝까지 투쟁해 보기도 전에 인간들에게 자리를 내주려 하겠는가? 바라보기만 해도 멸해버리고 싶기만 한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려 하겠는가? 그러나 정치 활동 너머에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면 인간의 야욕은 공허를 마주할 뿐이리.
우리는 맹렬히 종교적이다. 그리고 우리의 실존이 오늘날 알려진 모든 것들을 정죄하는 한, 내면의 주문(主文)이 명하기를 우리에게 똑같이 명령자가 되라더라.
우리가 감행하는 것, 그것은 전쟁이다.
이제 문명과 계몽의 세계를 버릴 때다. 이성을 가진 자, 교양을 배운 자가 되기에는 너무 늦었다. 마력이 없는 생〔生〕으로 귀결하는 자가 되기에도 너무 늦었다. 암암리에건 대낮에건, 완전히 다른 것이 되던가, 아예 존재를 그치든가 하여라.
우리가 난 이 세상은 개개인의 불완전성 밖에는 아끼고 가꿀 것을 주지 않는다. 개개인의 실존은 효용과 편의에 한정되어 있다. —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모습처럼 — 죽어도 좋으리만치 아끼고 가꿀 수 없는 세상이란 사리사욕과 노동 의무만을 대변할 뿐이다. 지나간 시대와 작금을 비교한들 작금이 모든 시대 중에 최악이요 추하다고 말해 무엇하리.
옛 시대는 황홀경에 잠기는 법을 알았다. 교양을 배웠다는 이 범속한 시대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문명이 주는 혜택은 인간이 문명에서 이익을 얻는 방법 때문에 상쇄된다. 작금의 사람들은 문명에서 이익을 얻음으로 인하여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존재자 중에 가장 비속한 처지에 떨어진다.
생〔生〕은 항상 명백한 일관성 없이 야단법석 가운데서 일어나는 법이다. 생이 숭고함과 실재성을 취하는 것은 황홀경과 황홀한 사랑에서나 가능한 법이다.
황홀경을 무시하려는 자들, 등한시하는 자들, 이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이들의 사유는 분석에 그친다. 존재란 와글대는 공허 따위가 아니다. 존재는 춤추는 자를 열광하게 만드는 춤이다. 죽은 파편을 대상으로 취하지 아니하는 사유, 이것은 마음속에 불과 같이 존재하는 것이어라.
불굴의 자세를 취할지다. 끝끝내 문명 세계의 존재가 불안하고 의심스러워 보이도록. 문명 세계의 존재를 믿을 수 있는 자들, 문명 세계의 존재를 권위처럼 입는 자들, 이 자들에 응하지 말아라 쓸데없는 일이다. 이 자들이 말할 적에 이 자들을 듣지 말고 쳐다볼지며, 설사 이들을 쳐다보는 일이 있어도 이 자들의 이면 저 멀리에 있는 것만 ‘들여다볼’지어다.
이 길에서 분주히 움직인다고 한들, 덧없이 시간을 보내며 웃고 홀로 희한한 짓을 하며 기분 내기를 하는 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들 아무짝에 쓸모없으리라. 인간의 생은 우주의 머리와 우주의 이치를 섬기다가 다 쇠해버렸다. 인간의 삶이 머리와 이치가 되는 한, 인간이 우주 속에서 필연과 필요에 의한 것이 되는 한, 인간의 삶은 예속에 순응하는 법이다. 인간의 삶이 자유롭지 아니하다면 존재는 공허하고 생동이 없을 것이고, 인간의 삶이 자유롭다면 존재는 곧 놀이이리라. 나무들을 새들을 낳는 대지, 하늘에는 재앙을 낳고 땅을 울리는 대지, 자유로운 세상이지 아니한가. 자유라는 마력은 대지가 온 우주 위에 필연성이 법칙처럼 군림하라고 주문하는 자를 낳았을 때 쇠해버렸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떤 필요도 필연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있었다. 인간은 온 우주 속에서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라면 다 닮아도 된다. 다른 것들이 기묘한 존재가 되지 않게 잡아두는 것이 인간 본인이나 신이란 생각은 버려도 된다.
수형자가 옥을 벗어나듯 인간은 머리를 벗어났다.
인간은 제 자신 저 너머에서 죄악의 금제인 신이 아니라 금제를 모르는 존재를 찾아냈다. 머리가 없는 모습이 나를 웃게 만드는 존재를 나라는 존재 저 너머에서 만났다. 순수와 죄로 만들어져 있기에 나를 불안으로 가득 채우는 존재를 만났다. 그자는 왼손에 쇠로 된 무기를 쥐고, 오른손에 성심〔聖心〕을 닮은 불꽃을 쥐었다. 그자는 일폭발〔一爆發〕로 생과 사를 하나로 합한다. 그자는 인간도 신도 아니다. 그자는 내가 아니다. 하나 나보다도 나 같다. 그자의 위장은 다이달로스의 미궁이고 이 미궁에서 그는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나조차도 그자와 함께 헤매고 있다. 내가 그자가 되어버렸다는 것,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곳에서.
내가 지금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나 홀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나 홀로 상상한 것이 아니다. 낚시꾼들이 사는 마을에 있는 아담하고 추운 집에서 글을 쓰고 있노라. 방금 한밤중에 개 한 마리가 짖더라. 내 방은 주방 옆에 붙어있는데, 주방에는 앙드레 마송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북적거리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내가 방금 이렇게 글을 쓰는 동안 마송은 전축으로 ‘돈 후안’ 서곡이 담긴 음반을 틀었다. 내 바깥에 놓인 황홀경을 향하야 나를 열어젖히는 시련과, 나에게 주어진 실존을 연결해 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돈 후안’ 서곡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머리가 없는 이 존재를, 똑같은 만큼 강력한 두 가지 집념으로 이루어진 찬탈자를, 그자가 ‘돈 후안의 무덤’이 되는 것을 본다. 요 며칠 전 나는 바로 이 주방에서 앙드레 마송과 앉아 있었고 손에는 와인 한 잔을 들고 있었다. 그때 마송은 난데없이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의 죽음을 상상했고 두 눈은 허공에 박힌 채로 괴로움에 떨며 거의 울부짖을 지경이었다. ‘죽음이 보드랍고도 열광에 어린 죽음이 되었음이 분명하다’고, 피고용인의 손으로 죽음까지 주무르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토하면서 말이다. 인생〔人生〕의 운명과 인생의 끝없는 소동은 눈먼 자일 수가 없어서 경천동지할 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꿈에 경도된 선각자가 되기로 한 자들에게만 열려있으라는 것을, 이미 나는 더는 의심할 수 없었다.
1936년 4월 29일 토사에서.
▲좌측부터 — 앙드레 마송, 아세팔(드라이포인트 판화, 1936), 검(드라이포인트 판화, 1936)